265화 구원자
강림하는 게 저 두 아이들이라고?
‘예언서’에 나오는 대로 어르신들은 충실하게 동산을 지켜 왔었다. 그런데 막상 하늘이 열리고 드높은 단상 위로 어떤 존재가 강림하니 당연히 예언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들은 동산 내에서 압도적인 무력과 감각을 보유하고 있다.
저 아이들이 동산의 구원자일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르신들은 움직였다.
“뭐야? 너희 하종과 율명이 아니더냐?”
“그런데 어떻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냐?”
“무슨 일이야! 대체!”
난리가 났다.
어르신들이 앞으로 나서자 금방 조용해지긴 했지만, 눈동자에 감도는 열망을 숨길 수는 없었다. 동산에서 예언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저 단상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르신들은 감히 드높은 단상에 장난으로라도 올라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가끔 단상에 오르는 장난꾸러기들이 있었지만, 어르신들은 봐주지 않고 10년 구금을 명했다. 이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10년의 세월은 길다. 그런 이후부터 단상을 함부로 만지는 사람들도 없었다.
“너희.”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느냐.”
“아는 대로 모두 말하여라.”
숨 막히는 기운.
오랜만에 본 어르신들의 외모는 더욱 흉악해졌다. ‘어르신들’이라고 하여 늙고 나약한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동산에서 어르신들은 가장 강한 세 명의 장로를 말했다. 동산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들이 혈마교주라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하종과 율명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그분이 없어졌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될 것 같다고 두 사람을 안아 찢어지는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한 장본인이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아니, 저랑 같이 떨어진 사람 없었어요?”
“키가 크고! 피부가 너무너무 하얗고! 얼굴이 너무너무너무 잘생긴 공자님이요!”
“갈!”
외눈의 어르신 도난이 성난 기세로 두 아이를 일갈했다.
“너희 외에는 이곳에 발을 들인 자가 없다. 그리고 동산이 어떤 공간인지 나갔다 오며 깨닫지 않았느냐? 이곳에 다른 인간들은 진입할 수 없다.”
확실히 동산에 오니 느낌 자체가 다르다.
바깥에서는 몸이 찌뿌둥하게 짓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동산에 오니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동산의 기운을 다루는 무공을 익히지 못했는데도, 그 차이가 대단했다.
하지만 하종과 율명을 억울했다.
같이 온 것이 사실인데, 어르신이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아 버리면 누가 믿겠는가? 아마 어르신들의 일갈에 모두가 동참할 것이다. 동산에서 그들의 말 한 마디가 곧 법이었으므로.
하지만 두 소년, 소녀의 예상은 틀렸다.
유일하게 두 사람을 옹호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들아! 딸아!”
둔저가 소리친다.
그 목소리에 두 남매가 어깨를 파르르 떨더니 눈물을 떨구었다.
“아, 아빠!”
“흐윽!”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는 예언에서 말한 그 강림자이자 구원자가 분명하다! 어르신들이 혼내는 것을 신경 쓰지 말아라! 어르신들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하늘을 찢고 단상 위로 올라오시는 분들이 바로 예언에서 말한 그 사람이라고!”
피를 토하듯 외치는 둔저의 말에 모두가 당황한다.
그들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지금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어르신들이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건 예언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내려오너라.”
“이야기를 들려 다오.”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르신들이라 추앙받는 존재들이 말한다.
아이들은 그 기세에 주춤주춤 내려오고 있었다. 둔저는 위기감을 느끼고 말한다.
“기다려라! 아직 내려오지 마!”
어르신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둔저에겐 아이들이 가장 소중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해코지를 할 수도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
뿔피리 소리가 동산 내부에 가득 울려 퍼진다.
- 뿌- 뿌우우우우!
- 뿌뿌뿌뿌!
- 뿌우! 뿌우! 뿌우!
사방에서 울리는 뿔피리 소리에 모두가 당황한다. 몇몇 눈치 빠른 동산의 전사들이 창과 검을 들었다. 외관은 조악하기 그지없었지만, 창날과 검날에선 기묘한 힘이 일렁이고 있었다.
“전투 준비!”
“모든 방위를 방어하라!”
“어떤 놈이 왔느냐!”
어르신들도 긴박한 상황에 동산에서 눈을 뗐다.
예언도 중요하지만, 동산의 부족원들이 모두 죽어 버리면 무슨 소용이랴? 뿔피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다. 어르신들마저 긴장할 정도로 말이다.
“동쪽에 황랑늑대! 서쪽에 이두백호! 남쪽에 백탄! 그리고 북쪽에서…….”
보고를 위해 달려온 전령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한다.
“이무기가 나타났습니다!”
“……!”
하나만 구역을 침범해도 비상이 걸린다. 어르신들도 나서야 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다. 그런데 네 방위 모두에서 동산의 괴물들이 모두 나타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대체 무슨 일인가?
“모두 죽음을 각오하라.”
“전투 준비.”
“너희는 내려오지 말아라.”
어르신들은 결단을 내리고 각자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어르신들이 가지 않는 방향에는 더욱 많은 전사들이 붙었다. 따로 명령하지 않아도 그들은 생존을 위해 최적의 길을 선택한다. 그렇게 살아오고 훈련받았으니까. 하종과 율명과는 달리 모두 무공을 익힌 듯하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야.”
“그, 그러니까.”
율명과 하종이 당황하며 아래를 바라본다.
솔직히 두 사람이 내려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으리라. 동산에 진입하여 몸이 가벼워졌다고는 해도, 무공을 익히지 못했으니 짐승들과 싸울 수는 없었다.
“대체 그분은 어디로 간 거지?”
분명 같이 들어왔지만 없어졌다.
그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 * *
“묘지인가.”
황극린이 거대한 공동에 주위를 둘러본다.
아주 먼 곳에서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괴성과 땅울림. 무언가가 싸우고 있는 느낌이다. 마경이라면 전투는 일상일 것이라 판단하며 황극린이 주위를 탐색한다.
두 아이는 느끼지 못했지만, 공간을 찢고 돌입하는 순간.
황극린은 아이들과 멀어지는 걸 느꼈다. 혼자 동떨어진 공간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뼛조각이 많군. 하지만 인간의 것은 아니야.”
이곳을 묘지라 생각하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공동 중앙에 놓인 거대한 관. 그리고 그 주위로 금은보화와 신병이기라 불릴 법한 병장기들이 가득했다. 아마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묘가 분명해 보였다.
그런 묘에 뼛조각이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
혹시 관 속에 사람이 있나?
황극린이 지체하지 않고 관을 열어 본다. 기관장치 따위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끼이이! 끼이이익!
황극린이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관 뚜껑이 무거웠다. 혹시나 안에 인간이 살아 있다거나 하진 않겠지?
“지독한 냄새군.”
온갖 약물의 냄새. 관 안에는 이미 뼈로 변한 인간 시체가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 손에는 작은 단검을 쥐고 있다. 얼핏 평범해 보였지만, 그것이 운철이라는 걸 깨달았다.
“암기로 쓰기 괜찮겠군.”
묵철 단검도 오랫동안 애용해 왔다. 하지만 하도 많이 사용하다 보니 묵철도 녹이 슬고 있었다. 하도 뇌전을 많이 담았더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뭐, 암기 말고도 운철은 이용할 곳이 많았으니 일단 챙기기로 했다.
황극린은 놀란 기색이 전혀 없긴 했지만, 애초에 운철 자체는 몹시 희귀했다. 그냥 있어서 챙긴다는 황극린의 태도를 보면 중원인 대부분이 경악하리라.
“별것 없군.”
황극린이 관 뚜껑을 닫는다. 약물의 냄새가 거의 만독지체에 가까운 황극린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공동을 둘러보아도 딱히 특이한 점은 없었다.
단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만이 커질 뿐이다.
“으음.”
황극린이 눈을 감고 공동 속의 흐름을 읽었다.
어디로 향해야 할까.
바깥과 통하는 공간은 어딜까?
“여기로군.”
황극린이 하늘을 향해 뛰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공동의 천장이 매우 높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중앙에는 원형의 구멍이 아주 넓게 뚫려 있었다.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 * *
“제기랄! 물러서라! 너무 강하다!”
“이두백호의 발톱을 조심해라! 독이 발려 있다!”
“이무기는? 이무기는 어디냐?”
“놈은 아직 멀찍이 서서 구경만 하고 있다!”
“황랑늑대를 막아라! 단상으로 달려간다!”
콰아아앙-! 콰앙!
마치 벽력탄이라도 터지는 듯한 무식한 굉음. 어르신들이 손을 휘저을 때마다 황랑늑대 열 마리가 사라졌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에 모인 황랑늑대가 천이 넘는다는 거다. 하나하나가 부족원들과 비등한 무력을 자랑한다.
“제기랄!”
“위험하다!”
“하종! 율명! 도망치거라!”
“이놈드으으으을!”
남매의 아버지 둔저가 황급히 뒤쫓는다. 어르신들도 지금 몰려오는 황랑늑대와 백호 떼를 막아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상까지 접근하여 올라간 두 마리 황랑늑대 때문에 지키던 자리를 옮길 수 없었다.
‘근데 이놈들이 왜 단상으로 올라가는 거지?’
둔저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짐승들은 자신들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싸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솔직히 짐승들의 행동 양식을 어찌 다 이해하겠냐마는, 무론 그들이 인간을 먹기 위해서 가끔 선을 툭툭 넘긴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무언가를 노리는 경우는 잘 없었다.
‘무슨 상관이냐! 내가 꼭 구해 주마!’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 나가는 둔저.
그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황랑늑대가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한낱 인간의 다리로는 쫓기가 쉽지 않았다.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
“제기랄!”
그렇게 소리치고 스스로 깜짝 놀란 둔저였다.
왜 그런가 살펴보니 왜인지 아래가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단상에 올라갔다고 모두 싸늘한 눈초리로 둔저를 바라보나?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싸움이 멈췄어?’
황랑늑대 두 마리가 단상에 오른 직후, 짐승들은 왜인지 뒤로 물러섰다. 부족원들도 숨을 고르며 짐승들을 경계하면서도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이 구출되길 기원하고 있다.
생각이라는 걸 집어치웠다.
지금 중요한 건 왜 싸움이 멈췄는지가 아니다. 황랑늑대 두 마리를 족치는 것이다.
“으아아아악!”
하지만 결국 하늘은 둔저를 버렸다.
황랑늑대가 먼저 두 남매의 아비보다 빠르게 도착했으며, 포악한 황랑늑대는 당장이라도 두 아이를 갈기갈기 찢어 낼 것만 같았다.
그때 기적이 벌어졌다.
휘익! 휘익!
“으악! 꺼져!”
“미친 노랭이가!”
“……!”
둔저가 기적을 보았다.
두 아이, 어쩌면 예언에서 말했던 구원자일 수도 있는 아이들이다. 분명 그들은 어르신들의 명령에 무공을 배운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펼치는 건…….
‘최상승의 보법이다!’
둔저 또한 언젠가 어르신의 ‘심장’을 물려받을 수 있으리라 알려진 존재다. 그렇기에 무공의 안목도 상당하다. 두 아이는 배우지도 않은 보법을 펼치며, 무려 황랑늑대 두 마리를 농락하고 있다. 물론, 조금 위태로워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간다!”
조금씩 가까워진다.
조금만 더 가면.
소중한 아이들을 구해 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쾅!
하종이 넘어졌다.
“하종!”
율명이 오라버니가 위험에 처하자 당황하여 발을 헛디딘다. 아무리 최상승의 보법을 익혔다고 하더라도, 실전 경험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아, 안 돼!”
조금만 더 달리면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조금의 차이가 생사를 가르기도 했다.
“안 돼-!”
황랑늑대의 새빨간 발톱이 하종의 가슴팍을 찢어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루으으응! 쾅!
“……!”
단상의 일부분이 폭발하듯 뜯겨 나갔다. 단상을 신물처럼 모시던 어르신들의 눈이 휘둥그레 뜨인다. 단상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고? 황랑늑대가 아이들을 죽이지 못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저건……?”
의문의 사내.
멀리서 보았지만, 그 잘생김이 발하는 광채에 눈이 부실 정도! 율명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음.”
사내가 황랑늑대를 바라본다.
- 크러어엉!
- 크엉!
갑자기 표적을 바꾼 황랑늑대.
다 잡은 율명과 하종을 놓아주고, 황극린에게 달려들었다.
퍽! 퍽!
두 번의 북소리. 아니, 북소리가 아니라…….
펑! 펑!
황랑늑대의 강인한 육신이 터져 나갔다. 주먹도 아니고 손가락에 맞아서 말이다. 물론, 그걸 정확하게 본 것은 가까이에 있는 둔저와 어르신 그리고 부족원들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했다.
“흑철(黑鐵)로 만든 병기를 쓰지 않고 황랑늑대를 제압했다고……?”
부족원들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려군.
그는 아래에서 황극린이 보인 기예에 충격을 받았다. 동산의 상식과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황극린은 두 아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더 먼 곳을 바라본다.
인간 다섯 명쯤은 한입에 삼켜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뱀. 머리 두 개 달린 호랑이. 하얀 갈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원숭이.
‘영물 천국이로군.’
저들은 내단을 가지고 있을까?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는다. 그걸 가까이서 본 둔저는 피부에 소름이 돋아났다.
황극린이 검지를 뻗는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이무기가 있었다.
‘제일 센 놈부터.’
슈웅-!
현무조차 견디지 못했던 뇌탄(雷彈)이 공간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