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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63화 (263/316)

263화 부인

황극린은 오로목제를 떠나갔다. 솔직히 말해서 혈마교의 소교주가 꼭 마령이 되지 않더라도 그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만약 황극린이 과거 흑살문의 살수 출신이 아니라 혈마교도 출신이었다면 감정을 이입할 수도 있겠지만, 황극린은 혈마교도가 아니었다.

오로목제에서 건진 것은 많았다.

혈마교의 특급 살수였던 색귀를 처단했으며, 혈마교의 동태를 살필 수 있었다. 특히 천의 군세를 이끄는 흑마질풍단. 그들을 보니 왜 혈마교가 단일 문파로서는 최고라고 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거대 문파에서도 한 명이 겨우 있을까 말까 한 화경에 이른 고수도 많았고, 혈마교도 개개인의 실력도 확실히 뛰어나다. 솔직히 만뇌문이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나게 발전하긴 했지만, 혈마교와 비교해서는 몹시 부족하다.

그렇다고 만뇌문을 혈마교처럼 크게 만들고픈 욕심은 없었다.

그런 욕망이 있었다면 황극린은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갔어야 했다. 그리고 꼭 거대 문파를 직접 거느려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황극린은 최근 여러 사건을 겪으며 꽤 많은 휘하 세력을 거두었다.

월영문과 용왕궁. 휘하 세력은 아니지만 서문세가 또한 만뇌문과 동맹을 맺었다. 황극린은 각 문파의 수장들과만 인연을 이어 나가면 된다. 수하를 관리하는 건 각 문파의 수장들의 몫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이 황극린을 여유롭게 했다.

그는 목표인 흑살문만 신경 쓰면 됐다. 특히 색귀라는 특급 살수는 아무리 황극린이라도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쉽게 처리하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오로목제에서 청성산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황극린이 무언가를 보고 경공을 멈췄다.

이제 열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과 소녀가 수십 명의 기마병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지만, 두 사람은 꽤 강했다. 무공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어리숙한 동작이었지만, 마치 본능만으로 싸우는 듯이 예민한 감각으로 기마병들의 공격을 피하고 있다.

심지어 기마병들은 무공을 익힌 듯이 정돈된 공격을 퍼부었지만, 쉽사리 두 사람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기한 모습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고 타고난 것만으로도 저리 뛰어난 힘을 가질 수 있나? 흔치 않은 일이었다. 물론, 기마병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때, 황극린의 후각에 묘한 냄새가 감지되었다.

꽤 익숙한 향이었다.

* * *

“크하하하하! 이노오옴들!”

하종과 율명은 악을 쓰며 어른들을 상대했다. 거대한 말에 올라타서 무식한 크기의 창을 휘두르는 기마병. 기마병 한 명으로도 소년과 소녀를 순식간에 처리할 것 같았지만,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고 있었다.

하종과 율명은 세 명의 어른을 낙마시켰고, 한 명을 죽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기마병들은 미친 듯이 발광하며 웃고 있었다. 타고난 능력으로도 성장의 차이와 쪽수를 당해 내진 못한다.

거기다 백마를 타고 멀찍이 서서 구경만 하는 사내.

그는 무심한 얼굴로 두 소년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나선다면 이미 두 사람은 제압당했으리라.

“명아, 너 혼자서 도망쳐.”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너라도 살아야지. 내가 오라버니니까, 이러면 되는 거야.”

“흥, 개소리! 내가 누님이다!”

율명은 하종의 말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이런 동생이다. 태어난 시간으로 따지면 당연히 하종이 더 빠르다. 고작 일다경 수준의 차이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두 쌍둥이 남매는 서로를 도우며 기마병들 사이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점점 한계가 드러났다.

어떤 무공도 익히지 않았다. 싸우는 법을 모르는데 오로지 본능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감히 우리 광풍사의 말을 훔치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돈은 이미 줬잖아!”

“아니, 그따위 푼돈으로는 안 된다.”

“뭘 원하는데? 엉?”

“멈추거라.”

백마에 탄 사내가 나지막하게 말하니 광란에 젖어 있던 기마병들의 움직임이 뚝 멈춘다. 모두 말을 다루는 실력이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율명이라고 했느냐.”

소녀 율명이 악을 쓰며 대답한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물론, 소녀의 피도 있었지만 광풍사 병사들의 피가 더 많았다. 피를 흥건하게 하고 눈을 빛내며 대답하는 모습은 광풍사의 은갑대(銀甲隊主)의 눈에 찬란하게 빛이 났다.

“너를 열네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도록 하지.”

“뭐……?”

율명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하종이 욕설을 내뱉는다.

“이런 미친 새끼들! 첫 번째 부인도 아니고 열네 번째 부인이라고? 정신이 나갔어!?”

“순서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떠돌이인 너희를 거둬 주마. 율명, 너는 장차 광풍사의 주인을 잉태할 수도 있다. 대막의 누구나 원하는 자리이기도 하지.”

“허, 미친.”

“율명, 네가 받아들인다면 네 옆에 있는 소년도 살려 주도록 하겠다.”

그 순간, 소년, 소녀를 둘러싸고 있던 기마병들의 기세가 돌변했다. 은갑대주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목을 칠 기세였다. 사실 알고 있었다. 두 소년, 소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들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다. 일부러 광풍사의 기마병들이 힘을 조절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뭐야? 왜 나를 부인으로 맞이한다는 거야?”

“대막에서부터 쭉 지켜보았다. 최하위에 이른 병사들을 제압하는 어린 소녀.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땐,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

은갑대주가 말을 이어 나간다.

“하나, 네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너는 최고의 광풍사주에 이를 재목을 낳을 수 있는 여인이다. 그리고 너 또한 지금부터라도 은갑대의 무공을 익힌다면… 나처럼 강해질 수도 있겠지.”

“…….”

“선택하거라. 죽음을 택할 것인지, 찬란한 미래와 손을 맞잡을 것인지를.”

율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하종이 발악하며 외친다.

“미친년아! 진짜 저 늙다리의 부인이 되겠다는 거야? 너 미쳤어?”

“닥쳐 봐! 이 병신아!”

두 남매의 험악한 말다툼에 광풍사의 병사들이 폭소를 터트린다. 저런 성격만 봐도 광풍사와 딱 맞지 않은가?

“정말 하려고?”

“미쳤냐? 어차피 우리가 사라진 걸 어르신들이 알 것 아냐? 언젠간 구하러 올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러다 저놈의 아이를 가질 수도 있잖아.”

“뭐, 상관없지.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길이잖아.”

“…만약 어르신들이 구하러 오지 않으면?”

“무공도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냐? 몇 년만 지나도 저런 놈들은 다 우리 손으로 죽일 수도 있어.”

하종이 부르르 떤다.

오라버니가 되어서 동생이 희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위기를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제기랄, 왜 어르신들은 우리한테만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해서!’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사는 게 맞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되어서 그런 선택을 대체 어떻게…….

“좋아. 네 부인이 될게.”

“율명!”

율명의 선택에 은갑대주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선택했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군.”

“근데 정말 살려 주는 거지?”

“그래, 하지만 아이를 낳을 때까지 네 오라버니는 볼 수 없을 거다.”

“뭐……?”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으냐. 무공의 극의에 이른 자 앞에서 아무리 소곤소곤 이야기한다고 해도 들리지 않는 게 아니지.”

“그, 그런…….”

“발칙한 생각을 했지만 용서하지. 아이를 낳아 다섯 살까지 기른다면 약조대로 보내 주도록 하마.”

그 약속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은갑대주는 알고 있었다. 그런 세월이 지나고 나면 결국 율명이라는 아이는 광풍사에 적응할 것임을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은갑대주는 열 명이 넘는 부인을 두었다.

“광풍사의 은갑대주는 약조를 지킨다. 내 명예를 걸고 약조하지. 대막에서 우리가 발언을 어기는 것을 보았는가.”

“…알겠어.”

“야! 율명!”

“닥쳐! 죽는 것보단 낫잖아!”

하종이 어깨를 늘어뜨린다.

‘내가 강했다면… 저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힘을 익혔더라면… 그런 무공을 익힐 수 있었더라면…….’

소년의 얼굴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소년을 본 은갑대주가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고작해야 울고불고 소리치는 것일 뿐.

“하종이라는 아이를 포박해라. 그리고 율명은 내 뒤에 타도록.”

그렇게 상황이 끝난 듯한 순간이었다.

“꽤 재밌는 이야기를 하던데.”

“뭐냐!”

“누구냐!”

모두가 감지도 하지 못했다. 자연에서 살아가며 바람의 냄새마저 맡는 야성적인 광풍사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마치 공간을 찢고 나타난 듯한 사내의 기척을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은갑대주마저 말이다.

은갑대주가 외친다.

“공격하라!”

“무공의 극의에 이르렀다고 했나?”

황극린은 당연히 광풍사를 알고 있었다.

대막에서 가장 유명한 문파를 꼽으라면 흑살문과 광풍사였으니까. 사실 광풍사는 무림 문파라기보단 작은 규모의 ‘국가’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그리 두려운 문파는 아니었다.

결국 광풍사는 흑살문의 하위 세력에 불과했으니까. 현 광풍사주가 흑살문에서 키운 ‘살수’였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으리라.

황극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쿠릉!

지축이 울리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수천 가닥의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눈이 멀 것만 같은 찬란한 광채. 그 어떤 어둠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그 뇌전을 바라보며 소년이 눈물을 흘렸다.

사내의 손짓 한 번에 기마병들이 죽음을 맞이한다.

소년은 겨우 기마병의 공격을 피해 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기마병들은 소년을 가지고 놀았다. 거기다 백마를 탄 은갑대주는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을까?

또다시 광채가 일어났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이 아니다. 대지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뇌전은 어떤 생명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게걸스럽게 광풍사 기마병들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몇 번의 광채가 더 터져 나오고, 결국 은갑대주를 제외한 모든 광풍사의 무인들은 숯처럼 변하여 바닥에 쓰러졌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는…….”

“광풍사의 은갑대주. 요희루에서 들은 적이 있었지. 감숙성은 물론이고 섬서성까지 넘어가서 부녀자들을 납치했다던가.”

“쿠, 쿨럭! 서, 섬서라니요? 그, 그런 적은 없습…….”

아, 지금은 아니다.

황극린이 살수인 시절 돈황의 정보 단체 요희루에서 들은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콰직!

황극린의 손가락에서 뇌전의 줄기가 쏘아졌다. 뱀처럼 움직이며 날아가는 뇌전. 당연히 은갑대주는 피하지 못했다. 그는 짧은 신음을 터트리더니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하종과 율명이 멍한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이대로 간다면 꼼짝없이 광풍사로 끌려가서 노예가 됐어야 한다. 물론, 그들이 믿는 구석도 있긴 했지만… 불안한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게 진짜 무림인…….’

신앙심마저 엿보이는 하종의 얼굴. 그가 바라 마지않던 힘을 가진 사내였다. 무공을 익히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무공을 알려 주는 이들은 없었다. 저 사내에게 배울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저런 무공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소녀 율명도 멍한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 미친!’

동산에서 보던 사내들과는 전혀 다르다. 까무잡잡하고 우락부락한 사내들만 모인 곳이 바로 동산이었다. 처음 보는 절대자의 얼굴은 까칠한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에도 충분했다. 설화 속에서만 보던 황태자와 같은 모습이 아닌가?

소년과 소녀는 제각기 반한 부분이 달랐지만, 일단 중요한 건 하나다.

절대고수가 그들을 구해 줬다는 것.

두 사람이 황급히 황극린의 앞으로 가서 인사한다.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님!”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게요! 아니, 지금부터 갚도록 할게요! 시키는 대로 뭐든 할게요!”

황극린이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본다.

본 적은 없었지만, 왜인지 두 사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광풍사의 두 살귀.’

사실 광풍사는 혈마교가 관리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황극린이 남궁세가에 살행을 받아 잠입해 있던 시절, 광풍사의 병사 천 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했었다. 젊은 사내와 여인이라 했던가. 두 사람은 그런 살행을 버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다음부터는 황극린은 단전이 깨지고 쫓기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의 소식까지는 알지 못했다. 흑살문이 추격했으니 아마 죽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

그런 것들은 모두 황극린의 짐작에 불과했다.

거기다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황극린이 묻는다.

“너희는 마경에서 살았던 것이냐?”

두 사람에게선 ‘현무’에게서 맡을 수 있었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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