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60화 (260/316)

260화 살수

살수는 보통 살수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살수가 얼마나 성가신 존재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표적을 죽이기 위해서 짧게는 보름에서 극단적으로는 10년까지도 살행을 수행하는, 속된 말로 미친놈들이라 할 수 있었다. 정면으로 맞붙으며 서로의 힘을 과시하는 무림인들과는 다르다.

살수는 은밀한 계책을 세우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책사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싸운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살수는 완성될 수 없다.

살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집요함과 끈기였다.

일다경도 안 되는 시간을 위해 오랜 시간을 바친다. 임무라는 게 목숨보다 소중할 리가 없는데도, 경험이 많은 살수들은 임무에 목숨마저 바치곤 한다. 살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한순간의 살행을 위해서 말이다.

그나마 살수의 실력에 따라 기다림의 시간이 줄어들긴 한다.

흑살문의 특급 살수 색귀는 석 달 동안의 시간을 투자하여 오로목제에서 납치를 계획했다. 보통의 살수라면 5년이 걸렸어도 힘든 과정이었으리라. 그런 만큼 색귀는 뛰어난 살수라 할 수 있었다. 살수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집요함과 끈기가 극한에 이른 자였으며, 무공으로 따져도 중원의 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다.

그런 만큼 색귀의 이번 살행은 성공했어야 했다.

색귀는 흑살문의 특급 살수였으니까. 그들은 이제껏 어떤 임무에서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커억……!”

특급 살수 색귀의 반응은 빨랐다.

가슴을 파고드는 검을 피해 한 치의 차이로 심장이 비껴 갔다.

피 냄새가 진동하자 아무리 독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진 천륙자라도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살수가 오다니?’

두 달은 긴 시간이다.

손주 네 명이 납치된 이후, 납치범은 잠잠했다. 대부분 납치범이 오로목제를 떠났다고 판단했다. 그건 천륙자도 마찬가지였다. 황극린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살수가 나타났다.

천륙자가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알몸 사내.

가슴이 꿰뚫린 상태에서도 재빠르게 지혈하고, 무기를 꺼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놈이 날 죽이려 했던 건가?’

뒤로 물러난 나체의 살수는 마지막 순간 천륙자에게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천륙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황극린이라는 절대고수에게도 패배할지언정 쉽게 죽어 주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고 있을 때 심장이 꿰뚫리면 무슨 소용이랴? 황극린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죽은 목숨이다.

“아이들을 내보내라.”

천륙자가 황극린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다. 천륙자는 황급히 아이들을 깨워 밖으로 내보냈다.

색귀가 말한다.

“쿨럭… 네놈은 살수인가?”

황극린이 천장에서 내려와 색귀를 마주한다.

이렇게 보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매번 알몸으로 나다니며 흑살문 살수들 사이에서도 괴짜로 통했던 특급 살수. 그의 무공 실력은 모르겠지만, 살수로서는 극에 달해 있는 인간이었다.

“아니.”

“네놈이 살수가 아니라고? 그럼 대체…….”

말을 하던 순간이었다.

색귀의 손에서 무언가가 쏘아졌다. 눈으로도 쉬이 분간할 수 없는 바늘 수준의 암기. 끝에는 치명적인 독이 발려 있으리라.

당연히 황극린에게 통하지 않았다.

가볍게 신형을 움직여 암기를 피해 낸다. 그것을 본 색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쾌락을 느끼려는 순간, 방해를 받았다. 거기다 상대는 살수의 냄새가 난다. 저런 살수를 키워 낸 문파가 있다고?

“너한텐 물어볼 게 있다.”

“……!”

그 말에 색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설마……?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걸까?

색귀는 살수로 추정되는 사내, 황극린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는 공격당하는 순간, 본능의 힘으로 일격을 피해 냈다. 상당히 고통스러웠지만,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다. 살수에겐 극한의 상황에서도 전투를 이어 갈 정신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색귀의 정신력도 흔들린다.

물어볼 게 있다고?

그가 살수였다면, 이미 자신이 올 것을 예상했다는 뜻이다. 색귀를 죽일 기회는 천륙자를 노리던 때가 최적의 기회였다. 하지만 색귀는 죽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로 심장이 꿰뚫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무엇인가?

색귀가 잘나서 일격을 피한 게 아니다.

눈앞의 사내가 ‘일부러’ 심장을 노리지 않은 것이다.

‘위험한 놈이다!’

판단은 끝났다.

색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황극린은 그런 색귀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미 전각 내부엔 황극린이 설치해 놓은 ‘함정’이 존재했다.

콰지지지직-!

“으아아악!”

뇌섬사의 덫에 걸린 색귀가 고통 섞인 비명을 터트렸다.

“네놈은… 네놈은 대체 누구냐!”

색귀가 참지 못하고 묻는다.

살수가 올 것도 예상하고 있었고, 색귀가 가장 취약할 때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거기다 색귀가 죽지 않은 것은 사내가 의도한 바였으며, 그가 도망칠 것도 예상하고 함정을 파 놓았다.

저런 미친놈이 어딨는가?

색귀가 봐도 의아하다. 그의 무공 실력은 색귀도 파악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저런 무위를 가졌다면 최소한 방심이라도 해야 하지 않은가? 어떻게 저런 함정까지 파 놓는단 말인가?

뇌섬사의 덫에 걸려 행동이 제약된 색귀.

그의 곁으로 황극린이 다가갔다.

“너희는 날 혈귀라 부르더군.”

“……!”

믿을 수 없다는 듯 색귀의 동공이 떨린다.

“조용한 곳에서 대화나 하지.”

그 순간.

색귀의 머릿속이 검게 물들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아무리 심장을 비껴 갔다고 해도 가슴이 꿰뚫렸다. 거기다 뇌섬사에 담긴 황극린의 뇌전에까지 당했다. 정신 줄을 잡는 게 더 이상하다.

아이들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 천륙자가 도착했다.

황극린이 말한다.

“이놈과 단둘이 대화하고 싶은데, 조용한 장소가 있소?”

이곳은 구룡천가의 최심부.

그곳에 침범한 살수를 심문하는 건 가주의 권한이다. 하지만 그를 구해 준 게 황극린이다. 어찌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촤아아악-!

찬물을 끼얹자 색귀가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는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깨어나지 않은 척 실눈으로 주위를 살핀다.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빠져나갈…….

‘제기랄, 이 실은 대체 뭐지? 얇은데 왜 이렇게 질긴 거지?’

그러나 색귀의 발목과 팔목이 꽁꽁 묶여 있었다. 그리도 쉽게 제압했다면 조금이라도 방심을 해야 정상 아닌가? 저런 무력을 가지고도 왜 이렇게 성실한 건가? 색귀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깨어난 걸 알고 있다.”

“…혈귀라 했나?”

색귀가 눈을 뜨고 사내를 마주한다. 어두운 방. 퀴퀴한 냄새를 보아하니 지하가 분명하다. 구룡천가의 뇌옥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그래.”

“왜 나를 방해한 거냐? 그리고…….”

색귀는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저런 살수를 키워 낸 문파는 대체 어디인가?

“비요둔 출신인가?”

“아니.”

“그럼 대체…….”

“질문은 내가 한다.”

황극린의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가 색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눈을 깔지 않은 무인은 중원을 통틀어서도 드물었다.

“유령의 무영심결을 얻었나?”

“……!”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저놈은 대체 저걸 어떻게 아는 거지? 색귀는 최대한 감정을 숨기려 했지만, 찰나의 순간 숨 쉬는 걸 멈추었다. 황극린은 그 반응으로 진실을 파악했다.

“그렇군. 이건 바뀌지 않았어.”

“뭐가 바뀌지 않았다는 거지? 네놈은 대체 누구냐?”

“혈귀라고 했지 않았나?”

“혈귀라고? 그건 그냥 우리가 붙인 별호일 뿐이다. 진짜 네가 누군지 말해라. 어차피 넌 나를 이렇게 사로잡았지 않나? 네가 대답을 해 준다면 나도 성실하게 대답할 용의가 있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 내는 색귀.

황극린이 피식 웃는다.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군. 내 정보를 최대한 알아내려 하는 걸 보니 말이야.”

“…….”

색귀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살심’이 일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내를 죽여 버리고 있다. 독심술이라도 있는 건가? 어떻게 마음을 저리도 정확히 읽는단 말인가?

“내가 도망치려 해도 이미 구룡천가의 무인들이 이곳을 둘러싸고 있을 텐데? 난 살아 갈 수 없다.”

“뭐, 그렇다고 치고.”

까득.

색귀의 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황극린이 물었다.

“북경에 비밀 지부를 짓는 것은 어떻게 되고 있나?”

분노마저 할 수 없다. 그건 특급 살수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암귀가 비밀리에 진행하는 작전이다. 황실을 손에 넣기 위한 흑살문의 계략 중 하나. 혈귀가 어찌 그걸 안단 말인가?

이번에도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는 듯이.

“바뀌지 않았군.”

“대체 뭐가 바뀌지 않았다는 거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색귀.”

“…….”

“이제 됐다.”

“뭐……?”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마치 색귀에게 물어볼 것은 다 물어봤다는 듯. 색귀는 당황했다. 최소한 심문은 몇 달은 지속될 것이리라, 색귀는 만약 단전이 파하더라도 시간만 있으면 탈출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어떤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 말이다.

그런데 뭐지?

색귀에게 물어볼 게 많은 듯이 이런 장소에 데려와 놓고는 고작 두 개만 묻는다고? 이제 됐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설마 죽인다는 건가?

그냥 장난치는 것이었나?

“감히 나 색귀를 기만한 것인가!”

혈귀의 반응을 끌어내고자 색귀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네놈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을 알면 암혼마제께서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그는 방향을 틀었다.

불길한 예감에 암혼마제까지 언급하며 황극린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저런 미친놈이라면 정말 이대로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최대한 그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본문의 살수들이 너 하나를 찾지 못할 것 같나? 살고 싶다면 여기서 멈춰라. 그래야 네가 살 것이다. 그러니…….”

“아니. 멈추면 죽더군.”

“뭐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암혼마제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그분은 최고의 살수다. 네놈 따위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기지 못하는 존재라고!”

황극린은 이미 색귀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훗날 흑살문이 뭘 할지 다 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색귀와 따로 비밀리에 자리를 잡은 건, 그의 반응을 보고 미래가 바뀌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색귀는 닳고 닳은 살수다. 황극린이 모르는 정보를 그가 알 수도 있겠지만, 묘하게 비틀어서 진실 아닌 진실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 매번 기회를 엿보며 살아 나갈 궁리를 하겠지.

색귀는 그런 존재다. 황극린은 특급 살수가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살려 둘 생각이 없다. 이대로 구룡천가에 그를 두고 간다면 어떻게든 탈출할 것이다.

아무튼.

멈추면 죽는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황극린은 마지막 순간 포기했고, 결국 남궁운혜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렇기에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암혼마제가 무서웠다면 색귀를 잡지도 않았으리라.

색귀가 주절주절 떠드는 사이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묵철 단검이 들려 있었다. 색귀가 파들파들 떨며 묻는다.

“이것 하나만 말해 다오! 네놈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냐! 마지막 순간에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

“황극린.”

“황극… 린?”

색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역시 암귀의 예상이 맞았…….”

흑살문의 특급 살수 색귀가 죽었다.

* * *

구룡천가.

잔치가 벌어졌다. 오랫동안 침울했던 오로목제에 활기가 생겨났다. 구룡천가의 눈치를 보던 무인들이 밖으로 나와 잔치를 즐겼다. 마음이 풀어진 탓인지 평소와는 달리 시비가 붙어 전투를 벌이는 무인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오로목제의 활기찬 분위기가 흐트러지진 않았다.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누리던 오로목제의 무인들.

하지만 그들의 잔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두둥-! 두둥-! 두둥-!

북이 울린다. 최소한으로 오로목제의 드높은 성벽에서 경계를 서던 사자군림가와 구룡천가의 무인들이 기겁하며 전령을 보냈다.

갑주를 입은 흑마에 올라탄 천의 군세.

사이사이 깃발을 든 자들이 있었다.

하늘이 부서지는 듯한 괴이한 문양.

파천(破天)의 상징이었다.

“소교주 후보들께서 오로목제에 방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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