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59화 (259/316)

259화 색귀

구룡천가의 가주 적괴수(赤拐手) 천륙자.

오로목제를 지배하는 거대 가문 구룡천가의 수장이자 혈마교의 수라천가의 피를 이은 방계 문파였다. 방계라고 해도 오로목제에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방계에 불과하지만 신강성 전체에 뻗은 수라천가의 힘은 막강하다. 특히 천륙자는 마음만 먹는다면 능히 혈마교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순위에 오를 수 있다고도 했다.

천륙자는 실질적인 오로목제의 지배자였다.

사자군림가와 황금세가 그리고 활연의가까지. 그들은 이미 천륙자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지만 말이다.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천륙자는 지배욕이 없었다.

조용히 살아가는 게 그의 꿈이었으며, 자라는 식솔들을 보며 평탄한 말년을 보내고 싶은 야망(?)이 있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분노했다.

힘이 있음에도 전면에 나서 뜻을 펼치지 않은 것은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천륙자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가 아끼는 손주 네 명이 납치됐다. 납치한 놈이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한 상황이다.

천륙자는 정파인들이 보기에 그리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진 않았다.

부인으로 맞이한 여인만 해도 열 명에 달하고, 첩실도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자식들도 많이 낳았지만, 모두 소중한 손주들이며 구룡천가의 자식들이었다.

흡사 사자의 갈퀴를 연상케 하는 갈색 머리를 기르고, 터져 버릴 듯 탄탄한 구릿빛 근육이 꿈틀대며, 붉은 안광이 번뜩이는 천륙자. 그가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귀하가 황극린이오?”

강렬한 인상과는 반대로 대뜸 반말을 찍찍 내뱉진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엔 짐승의 기세가 담겨 있었다. 오로목제의 오롯한 지배자라 불리던 거대 가문의 가주들도 그의 앞에서는 목을 움츠리고 식은땀을 흘렸다.

분명 천륙자는 남을 함부로 해치는 자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곁에 있으면 언제 괴물 같은 팔을 뻗어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자아냈다. 그는 타고나길 포식자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소.”

무심하게 천륙자를 응시하는 황극린.

눈앞에 오로목제의 지배자 천륙자가 있으며, 구룡천가의 정예 천여 명이 장원에 가득했지만,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천륙자는 황극린의 태도에 속으로 적잖이 감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황극린은 소중한 손주들을 납치한 범인일 수도 있었다. 구룡천가의 무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색출하고 있었지만, 찾아내지 못했다. 정파에 이름난 고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귀하가 범인이오?”

“범인이라면 여기에 왔겠소?”

“그럼 다시 묻도록 하겠소.”

천륙자의 두 팔이 더 굵어진 것 같았다. 핏줄이 터져 나올 듯 부풀고 있다. 손가락에선 짐승의 그것처럼 투박하면서도 예리한 손톱이 튀어 올랐다. 거목이라도 단숨에 부술 듯한 기세였다.

“그럼 왜 여기에 찾아온 것이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천륙자의 말에 이미 구룡천가의 무인들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도와주러 왔소.”

천륙자의 얼굴이 묘하게 변한다.

도와주러? 정파에 속한 자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납치범을 잡아 주겠소.”

더 의심이 간다.

그의 손주들이 납치당했다는 건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납치당했다는 건 어찌 알았단 말이오?”

“절강성에서 누군가를 납치하려는 이들을 보았소. 그들이 납치하려는 존재는 ‘저주’를 타고난 존재였지.”

“……!”

황극린의 말에 천륙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룡천가의 누군가는 저주받은 피를 이어받았다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구룡천가. 그들은 피의 혈족이다. 흑룡강성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던 ‘혈교’의 후예들이었다.

그렇기에 황극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히…….”

“아마 당신들의 힘으로는 그를 막지 못할 것이오.”

천륙자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납치범의 정체가 뭐길래 저런 망발을 내뱉는단 말인가?

“납치범의 정체는 흑살문의 살수요.”

“……!”

흑살문.

사흑련 중 하나.

혈마교와 동등한 수준에 오른 거대 살수 문파. 신강성에서 혈마교가 어떤 위치인지 알고 있다면, 흑살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거기다 황극린은 알고 있었다.

구룡천가는 결국 흑살문을 막지 못하고 천륙자가 가장 아끼던 손주마저 빼앗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극린이 흑살문에 쫓기고 있을 때, 그 소년과 마주한 적이 있었다. 당시 단전이 깨진 상태에서 무림맹의 추격대를 뿌리칠 수 있었던 건 황극린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천패선. 아니, 1,075호.’

그 소년은 열일곱의 나이로 상급 살수가 되었다.

그는 임무를 받아 중원으로 나섰고, 도망치던 황극린을 한번 구해 주게 되었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다. 왜 도와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옛날 생각이 나서라고 했었다.

황극린도 그러하다.

사실 이곳에 온 이유는 흑살문의 계략을 막아 세우기 위함이 컸지만,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만약 본가의 아이들을 노리는 게 흑살문이 맞다고 칩시다. 그러면 대체 왜 우릴 도와준다는 것이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황극린은 적당한 대답을 했다.

“나도 납치당할 뻔한 적이 있소.”

그의 대답에 천륙자의 동공이 커진다.

설마?

“흑살문의 살수였지.”

원한만큼 확실한 동기도 없었다.

* * *

당연히 구룡천가는 황극린의 말을 모두 믿지 않았다.

흑살문이 대체 왜 구룡천가를 건드린단 말인가? 구룡천가는 혈마교와도 긴밀한 연을 맺고 있다. 혈마교와의 전쟁이라도 각오하지 않고서는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있겠는가?

구룡천가의 장로들은 황극린을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만뇌문과 혈마교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는 건 오로목제에도 퍼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천륙자는 황극린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은 믿음이 갔다. 다만, 그가 구룡천가의 장원 최심부에는 발을 들일 수 없도록 했다. 그가 진입할 수 있는 곳은 외성뿐이었다.

“교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맞습니다, 가주님. 흑살문이 진정으로 범인이라면…….”

“수라천가에서 나서 줄 것이라 기대하느냐?”

“예, 당연하지 않습니까? 구룡천가는 수라천가와 피를 나눈…….”

“피를 나눴다고 다 가족은 아니다.”

같은 피의 혈족이지만, 파벌이 달랐다.

혈교 내에선 같이 어울리며 지냈었지만, 지금 혈교는 사라지고 없었다. 수라천가주가 구룡천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망하기를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

야수의 직감.

천륙자는 분명 혈마교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다. 그가 혈마교에 입성했다면, 구룡천가는 마도삼가 수준은 아니더라도 혈마교 내에서도 왕성한 세력을 자랑하는 가문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수라천가는 그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잡스러운 피가 섞인 구룡천가를 수치로 여기고 있었다.

“황극린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나보다 강하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로목제의 지배자.

천륙자가 대뜸 패배를 고백한다. 두 사람이 언제 비무라도 했단 말인가?

“내 직감이다. 그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 젊은 나이에 그 정도라면… 언젠가는 누구도 가지지 못한 고금제일인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도 있겠지.”

“천마께서 계시는데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모르지. 그분과 만나 본 지도 오래됐으니 말이야. 아무튼, 내 생각은 이렇다. 그런 정도의 사내가 하릴없이 이곳까지 찾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힘을 가진 자들의 발걸음은 천산처럼 무거운 법이다.”

“그런…….”

“지켜보자꾸나. 정말 그가 약조대로 행동할지 말이야.”

“만약 그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장로의 걱정은 타당했다.

“그땐 생각해 둔 바가 있다.”

천륙자가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 * *

“후후.”

알몸의 사내가 실눈을 뜨고 저 멀리 웅장하게 자리 잡은 구룡천가의 장원을 바라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통같은 경계가 밤낮을 가리지 않았지만, 요즘은 느슨한 부분이 생겼다.

알몸의 사내는 목적지를 알아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방심할 때까지.

‘조금 더 빨리 움직인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

붉은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진짜 힘이란 무엇인가? 무턱대고 돌격하여 막는 것을 모두 부수는 게 힘인가? 아니다. 그건 힘이 아니라 미련한 행동이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선의 길을 걷는다.

천하제일의 고수라도 자는 순간에는 호신강기로 육신이 보호되지 않는다. 검강으로도 쉬이 뚫어 낼 수 없는 고수들이 대장간에 굴러다니는 단검으로도 심장이 꿰뚫린다. 그게 바로 살수의 세계였다.

색귀는 그런 살수 중에서도 최정상에 이른 몸.

그는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달콤한 과실이 주어진다는 걸 알았다. 살수는 어떠한 경우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후무객잔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했었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가 나타나서 구룡천가의 고수를 제압했다는 소문은 당연히 색귀의 귀에도 들어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색귀는 움직이지 않았다. 벌써 두 달 전의 일이었다.

두 달이라는 시일은 색귀에게 납치된 아이들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었겠지만, 그에겐 하나의 유희일 뿐이다. 적은 힘을 들여 구룡천가를 희롱한다. 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흐흐… 흐흐흐…….”

그는 여색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색을 밝히지도 않았다.

그가 색귀(色鬼)라 불리는 이유는 살수 중에서도 특별한 취향과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살수들은 살인을 즐기지 않았지만, 그는 인간을 죽이고 희롱하며 쾌락을 느낀다. 그런 모습이 흑살문의 살수들에게도 공포로 자리매김했다. 어떤 부분에선 흑살문주 암혼마제보다 더 무서운 구석이 있다.

그런 색귀가 이제 움직일 때라고 판단했다.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구룡천가라는 거대 가문을 희롱한다. 내일이면 구룡천가는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색귀가 앞으로 나아간다.

당연하다는 듯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 * *

잠에 빠진 한 마리의 야수와 작은 아이들.

구룡천가의 가주 천륙자는 일찍이 소가주 후보로 점찍은 천패선과 그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잠을 청하고 있다. 흑살문의 살수가 아이들을 노린다고? 경계를 늘릴 바에 같이 취침하는 걸 택했다. 감히 누가 구룡천가의 가주의 침실에 침입하여 아이들을 납치할 수 있겠는가?

축시(丑時). 달이 조금씩 기울어 가며 대부분 인간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서늘한 밤공기가 공간을 잠식하고 있다.

“그르어어엉-! 그르어어엉-!”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지만, 아이들은 적응이 됐는지 순진무구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찰나의 순간.

달빛이 창살을 비추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잠깐 흔들렸다. 서늘한 밤공기는 그대로였으며, 가주의 우렁찬 코 고는 소리도 그대로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그 어떤 냄새도, 소리도 내지 않는 누군가가 넓은 가주의 방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경계가 옅어졌다고는 하나 이곳은 구룡천가의 최심부.

거기다 바깥에서는 교대로 경계를 서는 무인들도 떡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알몸의 사내는 그들을 비웃듯 침실에 도착했다.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사내가 앞으로 나아간다.

그가 기다린 건 경계가 옅어질 때만이 아니다. 살수란 존재는 언제나 허를 찔러야 한다.

그는 피의 혈족을 납치하라는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구룡천가에 초를 납품하는 상단에 잠입했다. 가주에게 진상하는 초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소량의 독을 풀었다. 아니, 독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초에 넣은 것은 잠을 더 깊게 잘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재였다. 강력한 미혼약을 초에 녹여 냈다면, 금방 들켰을 것이다.

구룡천가의 가주 천륙자는 평소보다 더 잘 자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승부는 결정됐다.

색귀는 싱긋 웃으며 검을 빼 들었다.

혹시 모르는 위협 요소를 제거하는 것도 살수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구룡천가의 가주가 죽는다면 오히려 혈마교의 수라천가는 남은 구룡천가의 무인들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흑살문으로선 혈마교의 혼란이 더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그림자가 흔들린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색귀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컥……?”

항시 묘한 미소를 머금고 상대를 내려다보던 색귀.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살… 수……?”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색귀의 얼굴이 의아함과 혼란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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