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임무
천흉은 만뇌문을 떠나갔다.
황극린과 성수신의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게 아니다. 은혜를 갚아야 하기에 그녀는 만뇌문을 떠나야 했다. 황극린이 천흉에게 원했던 건 혈마교로 돌아가 마령이 혈마교의 패권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천흉은 마령의 후견인이 되기로 했다.
마령이 떠나자 뇌불이 황극린에게 물었다.
“넌 사람을 잘 안 믿지 않느냐?”
“맞소.”
“근데 천흉은 왜 믿은 거냐?”
뇌불이 보기에 천흉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될 마인이다. 뇌불 또한 마인으로서 살아갔던 적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뜻을 관철하는 악녀였다. 황극린도 그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딸이 있다고 했소.”
“딸이라…….”
“삶은 얄궂지 않소? 한번 틀어지게 되면 되돌리는 게 쉽지 않으니 말이오.”
맞는 말이다.
뇌불도 많은 좌절을 겪고, 후회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황극린이 그런 말을 하니 약간 어색했다. 뇌불이 보기엔 황극린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으며, 시련이 있었다고 한들 실패는 없었다. 황극린의 삶은 성공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물론, 황극린이 처음 동굴에 찾아온 날을 상기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 지금의 황극린이 눈앞에 있겠지.
“천흉이 배신하지 않을 것 같으냐? 내 보기에 사람을 잡아먹을 관상이었다.”
뇌불은 어느 정도 관상을 믿는다.
생긴 것을 보면 인생을 알 수 있다. 천흉의 얼굴은 여인이 보더라도 빠져들 만큼 뇌쇄적인 미모를 자랑했다. 거기다 그녀가 풍기는 냄새는 인간을 홀리는 그것이었다. 그런 여인에게 의리나 신의가 존재할까?
뇌불 또한 수많은 인간을 겪어 보고 배신을 당했다.
왜인지 천흉은 믿음이 가질 않았다.
“그럴 운명이었지.”
“운명? 너도 그런 것을 믿는단 말이냐?”
사실 운명을 믿는 게 아니다.
황극린은 전생을 믿었다. 과거의 사건은 현재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남궁운혜가 납치되어 험한 꼴을 당했다면… 그리고 천흉이 배교의 본거지에서 그녀와 마주했다면.
“믿지 않소. 하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그곳에서 다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소.”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으리라.
뭐, 어찌 됐든 천흉의 일은 이미 황극린의 손을 떠났다. 그녀가 신의를 지킬지 전전긍긍하는 것은 감정 낭비였다. 믿기로 했다면 믿으면 된다. 배신을 당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된다. 과거와는 달리 황극린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뇌불은 평소처럼 무심한 황극린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나이는 훨씬 어린데도 신뢰가 간다. 그가 있으면 어떤 위기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겠다.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그런데 흑주는 언제 데리러 갈 거냐? 현…….”
“현무.”
“그래, 그런 마물의 사체를 먹다가 흑주도 마물로 변할 수도 있지 않느냐?”
뇌불은 알게 모르게 흑주를 많이 챙기고 있었다.
흑주는 지능이 꽤 높았다. 뇌불이 어떤 인간인지 일찌감치 파악하고, 가끔 그의 곁에 가서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만뇌문도들 앞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었다.
“위험하긴 하오.”
“가 봐야 하지 않겠느냐?”
황극린이 고개를 저었다.
흑주가 먹는 속도를 보았을 때, 최소 1년이다. 계속 마경에 들락날락할 수는 없었다. 천흉도 혈마교로 향했으니 청성산에서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 혈석까지 주고 왔으니 어느 정도 걱정은 덜었다.
“흠, 그래. 네가 아니면 나라도 언제 한번 다녀오도록 하마. 그 마경이라는 게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시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마경이라기보단 도원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용왕궁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정수를 무한히 뿜어내고 있다. 그래도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 뇌불에겐 큰 경험이 될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과 마주하는 경험. 그것은 분명 무공의 견문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수많은 명문가에서 자제들이 나이가 차면 강호행을 보내는 이유가 그것이다. 갇혀 있는 인간들은 성장하지 못하니까.
두 사람은 오랜만에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 * *
“다녀오겠다는 말이더냐?”
“네.”
“흠.”
남궁운혜는 오랜만에 외출을 선언했다. 평소 같았다면 아버지인 창천뇌검이 함께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강소성에 터를 잡은 사파 문파들이 연일 회동을 이어 가고 있다고 했다. 언제 안휘성으로 쳐들어올지 모른다.
육대세가에 속한 남궁세가의 힘은 강하지만, 이런 상황에 가주가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꼭 가야 하겠느냐?”
“네.”
똥고집도 이런 똥고집이 없었다.
이런 대화를 나눈 것도 벌써 나흘째였다. 남궁운혜는 아버지의 의견을 무시하진 않았지만, 굽히지 않고 외출을 선언했다.
“좋다. 하나, 위험할 것 같으면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괜히 나서지 말고.”
명문가의 가주가 자식에게 하는 말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보통은 협의를 지키라 조언하지만, 창천뇌검은 전형적인 딸 바보였다.
“알겠어요.”
“모르는 사람이 당과를 사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돼.”
“…….”
남궁운혜의 시선에 헛기침한 창천뇌검은 결국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나 그녀를 품에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슬슬 그녀도 그녀만의 삶을 꾸려 가야 하지 않겠는가?
‘뭐, 황 장로… 아니, 황극린이라면 그래도 믿을 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두 손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던 창천뇌검이 화들짝 놀라 앞을 본다. 남궁운혜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문을 떠나갔다. 어릴 땐, 제발 밖에 좀 나가자고 해도 나가지 않았던 딸아이였다.
언제부터 이 아이는 어른이 되었던 걸까.
“그래, 너도 이제 다 컸구나…….”
무덤덤하게 딸아이를 보내 주는 것도 아비의 마음이리라. 딸의 성장을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일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뇌운검대주, 게 있는가!”
결국, 호위 부대를 하나 더 붙이고 말았다.
* * *
독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암혼마제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 실패란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특급 살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두려운 것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직접 나서려고 했지만, 암혼마제가 언제 돌아올지 몰랐기에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그날이 도래했다.
암혼마제가 나타나면 주변의 빛이 흔들린다. 그의 주위로 빛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갖는 특성 중 하나였다.
“문주님, 죄송합니다.”
어쭙잖은 변명은 흑살문주에게 통하지 않는다. 사실 그대로를 보고하고 다음 명을 기다려야 한다. 그가 특급 살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할지라도.
“그런가.”
보고를 들은 암혼마제는 분노를 내비치지 않았다.
평온한 얼굴로 독귀를 마주했을 뿐이다.
“되었다. 어차피 놈들은 얼마 쓰지도 못했을 것이니.”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줄 몰랐던 독귀.
특급 살수가 떠올릴 만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인간은 역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큰 깨달음을 얻어 기쁨의 눈물을 머금었다.
“받아라.”
“이게 무엇입니까?”
“유령께서 남긴 비급이다.”
“유, 유령께서 말입니까?”
그걸 왜 자신에게 준단 말인가?
벌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팔이 하나 잘리거나 눈이 뽑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유령께서 남기신 비급이라니? 그건 흑살문주만 익힐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번에 발견한 것이다.”
“……!”
유령이 누군가.
중원 역사상 최악의 살수라 불렸다. 당시 구파일방이었던 장문인들이 모두 모여 그를 잡으려 했지만, 반절 이상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유령은 그 누구도 잡지 못한 전설적인 살수.
“무, 무영심결(無影心訣)……!?”
“이건 해석본이다.”
무공 비급에 해석본?
얼마나 지고한 깨달음을 담았기에 해석본도 있다는 말인가? 아니, 흑살문주께서 직접 집필하신 건가?
“문도 모두가 익힐 수 있도록 하라. 단, 진본은 이해하기도 힘들 것이니 특급에 이른 자들만 볼 수 있게 하도록 하라.”
반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유령의 비급을 최하급 살수들에게까지 익힐 수 있게 하라는 거냐는 물음은 흑살문주의 뜻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독귀가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암귀는 문주가 내린 지엄한 명령을 수행하고자 바로 방을 나섰다. 흑살문주가 그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터를 만드는 무공이라. 유령이 남긴 무공치고는 별나군.”
흑살문주는 이미 무영심결이라는 희대의 무공을 모두 해석했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의 흑살문주에게 필요한 무공은 아니다. 아직 해석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 판단했다.
본래 이것은 특급 살수들에게만 알려 주려 했었지만, 북해빙궁주와의 만남을 상기하며 생각을 바꾸었다. 바로 문도 모두가 익힐 기회를 주기로 했다.
흑살문주가 허공을 바라본다.
“색귀.”
“예.”
어둠 속에서 나체의 호리호리한 사내가 나타났다.
옷을 입으면 진정한 살행을 할 수 없다며 특급의 살수가 되고부터 쭉 저렇게 행동하고 있다. 흑살문주는 색귀의 그런 모습에도 무심하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임무다.”
“받들겠습니다.”
“피의 혈족 중 하나를 납치해 오도록. 열 살을 넘지 않게. 다섯 정도면 적당하겠군.”
“예.”
색귀의 기척이 사라지고.
암혼마제는 평소처럼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 * *
천흉이 떠나고 한 달이 지났다.
황극린은 무공 수련과 더불어 문도들의 무공을 봐주고 무림의 정세를 파악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 수련을 마친 황극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황극린의 무력은 현재 천하제일인이라 꼽히는 무인들과 비견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나서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다. 최상급의 살수 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황극린이었지만, 당대 천하칠대고수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 따라서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는 상황에 따라 바뀐다.
상성이라는 게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난 완벽하지 않다.’
황극린은 스스로가 완벽한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또한 실수를 한다. 실수를 줄이고,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황극린은 장점이 있었다.
바로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로 미래는 이미 크게 뒤틀렸다. 제갈창해는 구파일련에 도전하지 않았으며, 제갈소희는 북해빙궁과 연을 맺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흉이 사망교도 만들지 않았지.’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맘때였던가.”
흑살문은 매년 납치하는 것보다 열 배는 많은 수의 사람을 납치했다. 대대적으로 전력을 키우겠다는 흑살문주의 의도가 엿보였다. 당시 흑살문의 살수들은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흑살문주가 모두를 죽이고 새로운 살수들을 현장에 투입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207호였던 황극린도 그런 걱정을 했다.
흑살문은 살수를 도구처럼 사용했다. 더 좋은 도구가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낡은 것은 버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때쯤 무영심결이 발견됐다.’
흑살문주는 무언가를 실험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 실험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흑살문에는 상당한 수의 살수가 생겨났다. 그것도 전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살수들이 말이다.
납치한 아이와 청년의 수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던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성장은 무영심결 ‘해석본’의 영향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해석본은 쓰레기였지.’
황극린은 잘 알고 있었다.
해석본도 분명 뛰어나다. 그러한 수준의 심결은 명문거파의 직전제자들이라도, 아니 대제자급이라고 해도 감탄할 수준이다. 하지만 진본과 비교하면 해석본은 면이 없는 소면이요, 닭이 없는 봉봉계다.
‘당시 교육생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건 역시 신강성 출신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강성 출신의 교육생들은 무언가 달랐던 것 같았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것은 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207호가 알던 것과 황극린이 아는 것은 다르다. 같은 정보라도 황극린이 이용할 수 있는 게 훨씬 많았다.
신강성.
피의 혈족이라 불리는 이들을 납치하기 위해선 혈마교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때문에 손해를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선 신강성에 파견하는 살수의 수준이 높아야 한다. 어쩌면 특급에 가까운 살수들이 대거 출격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중원에서 암약하는 특수 임무대가 나섰을 수도 있다.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안 그래도 혈마교에 받아 낼 것이 있었다. 도중에 흑살문의 계획도 망칠 수 있다면 극한의 효율을 챙길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