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기다림
“너는 조만간 본궁을 물려받을 것이니 들어오너라.”
북해빙궁주 빙백마후.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젊어지는 듯하다. 피부엔 광채가 흐르며, 붉은 입술에는 더욱 생기가 넘친다. 그녀는 평생 북해빙궁을 지배할 수 있을 것처럼 건강했지만, 왜인지 얼른 빙궁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부궁주가 북해빙궁주가 되기로 선언한 후부터, 빙백마후는 부궁주 한소연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번 만남도 가르침 중 하나다.
“인사드립니다. 부궁주 한소연입니다.”
“…….”
눈앞의 사내는 북해빙궁의 부궁주를 보고도 묵례조차 하지 않았다. 한번 흘끔 바라보고는 다시 빙백마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빙백마후도 딱히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흑살문주 암혼마제.
북해빙궁주와 흑살문주는 가끔 자리를 마련하여 대화했다. 명색이 사흑련의 수장들이었기 때문이다. 무림맹 명문거파의 장문인들이 회담을 가지는 것처럼 사흑련의 거대 사파 문파들도 그런 회담을 거친다.
물론, 사흑련 내의 관계는 명문거파처럼 똘똘 뭉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네놈이 있으니 눈이 침침하구나.”
흑살문주 암혼마제.
그의 앞에서 감히 ‘네놈’이라고 칭할 사람은 빙백마후밖에 없으리라. 물론,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흑살문주는 ‘그림자’를 다룬다. 그림자는 빛이 물체를 통과하지 못하여 생기는 음영(陰影). 암혼마제의 곁으로 자연스럽게 주변의 빛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의 주변은 밝아지긴커녕 어두워진다.
“천화련주가 네놈의 무공을 빼앗은 이유가 있구나.”
정확히 말하면 혈교가 가지고 있던 무공을 천화련주가 빼앗은 것이었다. 흑살문은 전설적인 살수 유령(幽靈)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즉, 정확히 따지면 그림자와 어둠을 다루는 무공은 흑살문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지금 와서는 그런 정통성을 따지는 것도 애매한 지경이 되었지만 말이다.
“잡담하러 온 게 아니다.”
“본녀의 발언이 잡담이라는 건가.”
두 사람 눈이 부딪친다.
둘은 약간 달랐지만 궁극적으로 음기(陰氣)를 다룬다는 것은 동일했다. 거대한 대전(大殿)의 모든 것이 얼어 버릴 듯하다. 아니, 움직임이 모두 멈추는 듯했다.
“하나 묻지. 황극린을 왜 탐하는가?”
황극린이라는 말이 나오자 빙궁주의 표정이 변한다. 부궁주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어느샌가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네놈이 왜 우리 사위를 언급하는 것이더냐?”
“그놈은 마경에 들어섰다.”
“…….”
마경이라는 말에 빙궁주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사라진다.
“마경이라?”
“놈은 너와 똑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본녀와 같은 처지?”
솨아아아-!
영롱한 광채가 깃든 얼음 조각들이 흑살문주의 전신을 둘러싼다. 조금이라도 말을 잘못 내뱉는다면, 얼음 조각들이 그의 몸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 것이다.
“말조심해야 할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보통 북해빙궁의 마후 앞에서는 누구나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었지만, 생명을 노리는 얼음 조각에도 태평했다.
“그러니 네가 뜻하는 바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라도 다른 방법을 알아보길 바란다. 너의 삶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빙백마후는 누가 보더라도 찬란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건강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다. 그런데 삶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는 건 무슨 말일까? 빙궁주는 그에 대하여 답하지 않았다.
“흥, 본녀를 움직이고 싶은 모양인데, 네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없단다.”
빙백마후가 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웠다.
그 순간, 암혼마제의 주위에 떠돌던 수만 개의 얼음 조각이 맹렬히 회전하며 암혼마제를 노렸다. 단순히 피부에 달라붙으려는 게 아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 심지어 귀까지. 치명적인 급소가 될 수 있는 부위로 얼음 조각이 비산한다.
그와 동시에 암혼마제의 그림자가 공간 자체를 잠식했다.
암혼마제와 빙백마후의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지는 않을 거다. 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부궁주 한소연은 그런 두 사람의 전투를 심각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 * *
“이것 참, 대접이 융숭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앗, 죄송해요. 문주께서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
천흉은 손님으로 왔지만, 만뇌문의 진법 내로 들이진 않았다. 지금 그녀는 진법 밖에 간이로 만든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위험한 상대였으니 함부로 진법 내로 들일 수는 없었다. 최근 납치 사건도 있었으니 만뇌문은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럼 네가 문주께 잘 말해 줄 수 없겠니?”
여인이 가진 최고의 무기, 미모로 백온후를 유혹하려 했지만,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애초에 황극린의 얼굴에 적응되었으니 아무리 잘생기고 아름다워도 감흥이 없는 거다.
“그게… 죄송해요.”
그녀는 더 끈적하게 시도해 보고 싶었지만, 뒤에서 노괴가 지켜보고 있다. 뇌불이라 불렸던 사내. 전성기 시절에는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 하품도 하지 못했다고 하는 대마두였다. 백온후는 차를 건네주고는 진법 안으로 돌아갔다.
천흉이 뒤를 돌아본다.
뇌불이 참으로 삐딱한 자세로 앉아 천흉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실종되고 난 뒤, 다시 등장했을 때는 전성기의 강인한 육체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아마 웬만한 천하칠대고수와 싸워도 다 패배할 수준으로 전락했을 터인데, 현재 천흉을 감시하는 뇌불은 오히려 전성기보다 더 강한 느낌이다.
‘뇌불과 황극린만 해도 이미 만뇌문은 구파일련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의 무력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문도들의 수준도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군.’
천흉은 알고 있었다.
이런 인재들을 키우는 것도 어렵지만, 이런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찾는 건 더 어렵다고.
흑살문이 왜 중원 전역을 떠돌며 재능 있는 아이들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까? 작은 지방에서 난다 긴다 하는 놈들도 결국 중원급으로 규모가 커지면 ‘평범한’ 수준으로 전락한다. 재능이 있는 이들을 키우는 게 문파의 숙명이었다.
화산파나 무당파와 같은 중원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문파들은 각 지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것에 반해, 사파 문파들은 문도를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뇌불의 능력인가. 아니면…….’
천흉을 보길 원했다는 황극린의 재주일까.
뇌불의 성격은 알고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혼자 힘으로 무림에 혈겁을 일으킬 능력은 있었지만, 수하들을 이끌 재목은 아니었다.
‘탐나는걸.’
천흉이 야릇한 미소로 주변을 둘러본다. 만약 황극린을 유혹할 수 있다면? 만뇌문은 그녀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그녀 또한 상당한 재능을 가진 수하들을 데리고 있었다. 혈귀비나 지흉으로 불렸던 놈들. 그들은 ‘성장기’였기 때문에 중원으로 내보내 경험을 쌓게끔 했다.
그런데 정체도 알 수 없는 놈에게 당해 버렸다.
‘혈귀’라고 하던가? 흑살문에서도 놈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니 평범한 놈은 아니겠지만… 아쉽긴 했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천흉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났다. 언젠가는 배교에서 독립하여 그녀만의 세력을 일구겠다는 꿈이 최소한 15년은 후퇴했다.
그렇기에 만뇌문을 더욱 가지고 싶었다.
“허튼 생각 하지 마라.”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다 눈에 보인다. 네년의 추악한 생각이 말이야. 네년의 보잘것없는 외모로 극린이를 유혹해 보겠다는 뭐 그딴 썩어 빠진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음, 아닌데?”
정곡을 찔린 천흉이 차를 들이마신다. 제법 눈치가 빠른데? 뭐, 상관없는 일이다. 천흉이 작정하고 유혹하지 못할 남자는 없다. 그녀가 익힌 무공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게 달린 사내는 다 똑같다.
‘황극린이 잘생겼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녀는 파란만장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그녀가 유혹했던 여러 사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장 생각나는 것은 당연히 그였지만, 굳이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난 황극린이 불러서 온 것이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참 불경하군.”
“흥, 나한테 뭔가 대접을 받을 생각이라면 집어치워라.”
“그럴 생각도 없다.”
천흉 또한 신경 끄기로 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황극린이다. 그가 만뇌문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라는 건 파악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위하여 자신을 만나고자 한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근데 황극린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지?”
천흉이 만뇌문에 도착한 지도 칠 주야가 지났다.
곧 돌아온다는 대답만 했던 뇌불이 말한다.
“조금 시간이 걸린다는군.”
“전서구라도 보냈나 보지?”
“그래.”
정확히는 전서구가 아니라 전음석이다.
황극린은 이미 바다의 마경에 도착하여 흑주에게 현무의 살점을 먹이고 있었다.
‘뭐, 할 일도 없고, 기다려야지.’
천흉은 은근히 속살을 내비치며 누웠지만, 뇌불은 천흉의 살결이 불결하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곰방대를 물고 연기를 피워 올렸다. 배교도가 있음에도 은근히 평화로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한편, 마경에 도착한 황극린.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경이라고 모두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회계산의 마경은 주변의 기운을 모두 빨아들이고, 생명체가 자라날 수 없도록 했다. 회계산에 약초꾼이 거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바다의 마경은 다르다.
마경 내에서 무한히 솟구치는 정수는 하늘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마경을 빠져나가 해저의 대지에서 솟구친다. 그것은 바다를 가득 메웠던 독을 정화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수 그 자체로 영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마경에 가득한 기운이 특정한 작용을 거쳐 정수로 ‘변환’되는 것이다. 물론, 무진장 많이 마시면 어느 정도 내공 증진의 효과가 있긴 한데, 정기가 맑은 장소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라 할 수 있었다.
회계산의 마경이 그 자체의 불완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주변의 기운을 흡수했다면.
바다의 마경은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것들을 채워 주기 위해 기운을 흩뿌리고 있다.
‘신기하군.’
이곳을 마경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물론, 현무라는 존재가 있었으니 얼마 전까지는 마경이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마경이라기보다는 신선들이 노닌다는 도원향(桃源鄕)을 떠올리게 했다.
청아한 기운이 사방에서 솟구치는 바다의 마경.
황극린이 흑주를 바라본다.
녀석은 열심히 현무를 포식하고 있었지만, 아직 한참 남았다. 솔직히 다 먹으려면 몇 달은 걸릴 것 같았다.
- 끼잉.
허겁지겁 먹던 흑주가 배가 부른지 벌러덩 누워 버린다.
황극린이 말한다.
“바로 누우면 소화가 안 된다. 잠시 걷도록.”
- 낑낑.
흑주가 황극린의 명령으로 움직인다.
흡족하게 그것을 지켜보던 황극린은 넓디넓은 마경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그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흑주가 현무를 포식할 때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지켜본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초감각을 이용하여 마경을 수색하던 황극린.
그의 발치에 무언가가 걸린다.
‘음.’
미세하게 튀어나와 있었지만, 황극린의 감각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바닥에 묻힌 무언가를 파냈다. 금으로 만들어진 금함(金函)이었다. 이 정도 무게라면 가격이 꽤 나가겠지만, 이미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인 황극린은 그것에 관심이 없다. 금함에 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
‘…….’
금함을 연 황극린의 눈빛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금함에 든 것은 바로.
‘회생비록이 여기에 있다?’
마경에서는 인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현무가 있을 때도 그러했으며, 그가 마경을 빠져나갈 때도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건 뭘까?
현무는 마경의 구멍을 열어 바닷물을 집어삼키곤 했다. 그때 휩쓸려 들어온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마경에 누군가 두고 갔던 걸까.’
후자라면 신경 쓰인다.
회생비록의 저자는 마경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설마 그가 마경을 만든 걸까? 아니면 마경을 파악하고 회생비록을 넣어 둔 걸까?
일단 회생비록을 읽어 보는 게 좋으리라.
흑주가 열심히 수영하는 것을 흘끔 바라본 뒤, 회생비록을 펼친다.
그리고.
첫 구절을 읽는다.
“영원이란 무엇?”
한 사람의 일생이 담긴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무언가를 연구하여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해 낸 이론서에 가까웠다. 누구인지 모를 저자는 영생과 영원에 대하여 서술했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 여럿 담겨 있었기에 꽤 유익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것이 왜 회생비록이라는 말인가?
‘어쩌면 회생비록의 저자는 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글씨체도 다르다. 더군다나 서책의 질감도 달랐다.
다른 짐승의 가죽을 이용한 것 같달까?
황극린이 흘끔 현무의 사체를 바라본다.
왜인지 놈의 가죽과 비슷한 질감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