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바다의 마경
황극린은 용왕궁도들이 숨어든 곳을 방문하였다.
흑살문은 어린아이들을 납치하여 살수로 키웠던 것처럼 용왕궁의 아이들을 납치하려 했다. 물론, 바다에서 나온다는 ‘정수’가 거의 사라졌기에 아이들의 숫자는 적긴 했지만 말이다. 흑살문은 그들의 체질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는 말일까?
어쩌면 쓰고 버릴 소모품으로 사용하려 했을 수도 있었다.
검후신제가 용왕궁도들을 이용하여 음지에서 영향력을 강화했었지만, 용왕궁도들이 생활하는 축축한 동굴의 분위기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마 강한 이들은 대부분 검후신제가 끌고 갔을 것이다.
“흑살문은 또 당신들을 노릴 것이오.”
이미 황극린은 문도들에 대한 복수를 마쳤다.
검후신제는 아들의 죽음에 절망에 빠졌다. 그것으로 족하다. 모든 용왕궁도를 적이라 판단하지 않았다.
“흐, 흑살문이 왜…….”
“확신할 수 없소.”
“하아… 감사합니다. 대협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자신을 해촌(海村)의 장로라고 소개한 노인이 감사 인사를 했다. 황극린은 노인의 안내를 받아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이 살 곳이 되지 못한다. 동굴 전체에 생선 비린내가 가득했다.
노인이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허허, 저희가 왜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지 의문이시지요?”
“알고 있소.”
“예?”
“이곳이 용왕궁의 본거지가 아니오?”
“그, 그걸 어찌…….”
“난 황극린이오.”
“……!”
해촌의 장로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운다.
뭐, 그가 욕을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무림에서 은원 관계를 맺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검후신제가 먼저 잘못을 했든 간에 그들에겐 황극린은 원수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
“우리 아이들이 밖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 말은 안 하지만 알고 있지요. 그런데도 저희는 살아남기 위해서 궁주님의 행동에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궁주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방관했을 뿐입니다. 결국, 그 죄는 소궁주가 모두 짊어졌지요.”
참으로 슬픈 얼굴이었다.
황극린은 가만히 노인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용왕궁도들은 바다에서 나오는 정수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고 들었소.”
“예, 맞습니다.”
“갑자기 그게 사라진 것이오?”
“그렇습니다……. 삼십 년쯤 되었을까요. 깊은 바다의 대지에선 영롱한 빛의 정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정수는 굳어서 해초처럼 흔들렸었지요. 하나, 지금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걸 취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들었소만.”
해촌에 남은 용왕궁도들의 수만 해도 백을 넘어간다.
거기다 검후신제가 이끌었던 이들까지 합친다면 상당한 숫자다. 이미 삼십 년 전에 정수의 공급이 끊겼다고 했는데,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래도 미약하게 바닷물에는 정수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먹고 자란 해초나 물고기를 먹으면 살 수 있었지요. 물론, 소궁주는 전대 궁주의 피를 더 이어받아 더 많은 정수가 필요했었지요.”
노인은 참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소궁주는 아마 남은 이들을 위해서 떠났을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었나 보오.”
“하하, 착한 분이셨지요.”
“그렇군.”
동굴 깊숙한 곳.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장식물들이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가져가십시오. 저희는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괜찮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부탁할 게 있어서요.”
“예, 뭐든 말씀하십시오.”
황극린이 말한다.
“정수가 흘러나온 장소가 총 몇 군데나 되었소?”
“제가 알기로 열 군데는 넘었습니다.”
“그곳을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하오.”
“그곳에선 치명적인 독기(毒氣)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옵니다. 용왕궁주께서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던…….”
그때였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구석에 위치한 작은 구멍. 사람 한 명이 통과할 법한 구멍에서 이십 대 중반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사내의 눈동자는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황극린은 왜인지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소, 소, 소, 소, 소……!”
“이별이 조금 미뤄졌습니다, 장로 어르신.”
그는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위해 서문세가로 떠났던 사우비.
그가 살아서 돌아왔다.
‘서문세가에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인사드립니다. 사우비라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인사를 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 * *
서문륭은 어릴 적 자결하려는 사우비를 구해 준 적이 있었다. 그를 구해 주고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문륭과 사우비는 한 달을 같이 지냈었는데, 그 과정에서 회생비록의 존재를 사우비가 알게 되었었다.
사우비는 우연히 그 이야기를 어머니 검후신제에게 하게 되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했던 검후신제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아들이 알지 못하게 은밀히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용성에 들어가려 했던 것은 황실의 힘을 휘두르기 위해서였으며.
서문세가에서 회생비록을 회수하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했다.
당연히 결과는 황극린의 존재로 인해서 대실패로 끝이 났다.
그런데 왜, 어떻게 사우비가 살아 있는 건가?
“서문세가의 태상가주께서 절 보내 주셨습니다.”
서문륭.
그가 왜?
“죽기 전, 해촌과 제가 타고난 저주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으시곤 손목을 그으려던 저를 막으시더군요.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지 말고 살아남아서 식솔들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혼자만 떠나는 건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라더군요.”
“…….”
사우비가 슬픈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하… 죽으려고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어렵더군요. 서문륭 대협께서 해 주신 말에… 희망이 생기더군요. 저는… 살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참으로 간악하지요. 모든 죄를 홀로 짊어진다고 선언해 놓고 이렇게 살아 돌아오다니 말입니다. 죽을 용기도 없는 놈이었습니다.”
사우비는 무언가 결연한 다짐을 했는지 황극린을 보며 말한다.
그의 찬란한 금빛의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다.
“당사자이신 황 대협께서 직접 찾아오셨으니 이번엔 결단을 내리려 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니, 독기가 가득한 곳까지 직접 안내할 필요는 없소.”
“예?”
“근처까지만 안내해 주면 되오.”
“저는…….”
“그럴 필요 없소. 서문 대협과 약조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지 않소?”
“…알고 계셨군요.”
아마 지금쯤 만뇌문에도 서신이 도착했을 것이다. 단순히 사우비가 가련하다고 용서할 만큼 서문세가는 착하기만 한 문파는 아니다. 실리적인 이유도 있으리라. 용왕궁이 가진 자산이나 인력들 말이다. 거기까진 묻지 않았다. 서문세가가 알아서 할 일이었으니까.
“당신 하나 죽는다고 과거가 달라지는 건 아니오. 오히려 살아서 갚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 말에 사우비가 슬픈 눈동자를 했다.
“어차피 전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죽을 운명입니다.”
“그 일 년이라도 한번 최선을 다해 보시오.”
사우비는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맞는지 모르겠다. 죽음을 각오했지만, 서문륭의 자비로 살아남았다. 어머니를 막은 황극린. 그는 인정사정없는 인간이다. 그의 앞에 선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도 죽으리라 판단했다. 그런데 황극린도 살라고 한다.
물론, 사우비가 예뻐서 살라고 하는 건 아닐 테다.
살아서 은혜를 갚으라는 뜻을 모르지 않는다.
황극린은 굳은 얼굴의 사우비를 보며 위로 따위는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용왕궁도들이 살아갈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도 말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괜한 기대감을 심어 줄 필요는 없었다.
“갑시다.”
황극린이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이곳엔 마경이 있을 것이다.
* * *
마경이 무엇인가?
황극린은 회계산에서 고민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마경일까? 이게 우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과율(因果律).
결과가 있다면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나 단순한 우연은 아니리라. 그리고 회생비록을 쓴 저자와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용왕궁도들이 타고난 저주. 그리고 그 저주를 극복하기 위한 정수. 이게 다 우연일까?
보골보골보골!
어쩔 줄 모르는 사우비를 두고 황극린이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간다. 그의 육신은 대부분 독에 면역이 되어 있으나 바다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독엔 황극린의 피부도 따끔거렸다.
황극린은 용왕궁도들과 달리 물에서 숨을 쉴 수 없다.
그렇기에 마경이 있을 법한 곳을 적당히 수색하다가 다시 물 위로 올라가야 한다. 황극린이 발을 휘젓자 순식간에 깊은 곳으로 쭈욱 나아갔다.
황극린은 정수가 터져 나오던 장소로 가지 않았다. 그가 향한 곳은 그 정수가 흐르던 여러 장소의 중심부. 회계산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곳이 바로 마경의 입구이리라.
‘여기.’
어떤 해초와 물고기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독기. 해류의 기묘한 흐름이 독기가 더 먼 곳까지 나아가지 못하도록 잡아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특정한 장소에서만 독기가 더욱 강해졌다.
위치를 알았으니 다시 올라갈 차례였다.
마경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으니 위로 올라가서 숨을 어느 정도 고르고 내려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쿠응!
지축이 울린다. 해류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독기가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건?’
바닥에서 구멍이 뚫렸다.
칠흑 같은 어둠. 꽤 깊은 곳이라곤 하지만 미약한 빛이라도 대지에 닿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검은 구멍에선 그 어떠한 빛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혈마교주가 사용하던 암천성휘(暗天星輝)가 떠올랐다.
솨아아아아아-!
구멍 속으로 바닷물과 독기가 빨려 들어간다.
바닷속에 회오리가 생겨났다.
황극린이 고민한다.
아직 조금은 더 숨을 참을 수 있다. 저 구멍은 마경의 입구이리라. 회계산의 마경과는 달리 직접 열리는 입구였다.
저곳은 물로 가득한 공간일까?
‘빠져나가려면 지금뿐인가.’
하지만 황극린은 회오리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살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들어가느냐 마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
황극린이 검지를 펼쳤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회계산에서의 뇌정 폭풍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힘을 사용했다간 오히려 그것이 매개가 되어 무언가의 힘을 더 강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한 번에 쏘아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담아서.
뇌탄을 쏜다.
통!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뇌탄이 검은 구멍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극린은 들을 수 있었다.
- 그어어어어어어어어-!
무언가의 처절한 괴성을 말이다.
* * *
눈을 뜬다.
무언가의 괴성이 들려오는 동시에 구멍이 빠르게 닫혔다. 황극린은 그대로 발을 박차 그곳으로 끼어들었다. 황극린조차 긴장하게 하는 거대한 괴성. 지축을 울리는 그 굉음을 듣고도 황극린은 구멍 속으로 들어왔다.
다행히도 바닷속의 마경은 물로 가득 차지 않았다.
대략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상태였다.
마치 반딧불과 같은 것들이 공중에 떠올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만져 보니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물방울과 같았지만, 스스로 빛을 발하는 물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이 찾던 정수인가.”
마경은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스스로의 크기를 키운다.
회계산의 경우만 보자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마경이 그러할까?
만약 그렇다면 회계산의 이상 징후를 알아챈 누군가가 그곳에 마경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마경의 특징은 모두 같지 않다.
마치 수많은 인간이 고통을 겪고 있는 ‘저주’가 모두 같지 않듯 말이다.
뭐, 그것만으로 결론을 낼 수는 없었다.
황극린은 앞으로 나아간다.
끝을 알 수 없는 지평선 중앙에 거대한 산이 있다.
아니, 그것은 산이 아니었다.
- 구어어어어어……!
구슬프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소리만으로 인간을 움츠리게 하는 맹수의 포효와 비슷하다. 진동으로 전달되는 소리에 황극린의 솜털이 섰다. 동시에.
“…….”
산과 같은 무언가가 발하는 살의가 황극린에게 쏘아졌다.
살기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이 정도쯤 되어야 할까? 심약한 자들은 그 살의와 마주하는 순간 이미 심장이 멈췄을 것이다.
살의만으로는 침입자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까?
놈이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