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혈귀
만뇌문의 뇌옥에 갇힌 검후신제.
그녀는 살기 위해 발악했다. 황극린에게 패배한 직후에는 온몸을 찢어발기는 뇌전에 대한 고통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여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을 되찾은 그녀는 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검후신제는 보타문의 장문인이었지만, 보타문은 장로진이 회의에 회의를 거쳐 봉문을 선언했다. 그녀는 설령 황극린이 풀어 준다고 하더라도 보타문의 힘을 휘두를 수 없었다.
거기다 최근 회생비록을 차지하기 위해서 용왕궁의 궁도들을 많이 희생시켰다.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용왕궁도들은 검후신제의 오른팔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살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들 때문이었다.
검후신제는 그녀가 아는 정보를 모두 털어놓았다. 오래전부터 만뇌문이 영약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타문이 연단한 영약은 함부로 줄 수 없었지만, 용왕궁에는 그녀가 모아 놓은 영약이 있다. 그녀는 아들의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다.
영약도 그중 하나였지만, 당연히 실패했다.
그리고 주산군도의 해저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검후신제는 그녀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렇군.”
“당신이 원하는 게 그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신다면 원하시는 건 모두…….”
황극린이 검후신제를 바라본다.
그녀는 아직 바깥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보타문이 봉문했다는 것만 넌지시 알려 줬을 뿐이다.
“네 아들이 사우비라고 했나.”
“……!”
검후신제가 깜짝 놀란다.
아들의 이름은 이런 순간에도 황극린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솔직히 아들의 이름이 황극린에게 귀중한 정보가 될 것 같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황극린은 아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읽어 보아라. 네 아들이 보낸 서신이다.”
숨이 멎는 듯한 침묵.
검후신제는 불안함과 공포가 깃든 얼굴로 서신을 바라본다. 일각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황극린이 내민 서신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첫 줄을 읽는 순간.
“…안 돼.”
검후신제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안 돼애애애!”
절규가 뇌옥을 가득 울렸다.
거미줄 위에서 동동 떠다니듯 휴식을 취하던 흑주가 못마땅하게 검후신제를 바라본다. 허튼 행동을 하면 바로 제압에 나설 기세였지만, 검후신제는 서신을 겨우 잡고 두 팔을 벌벌 떨 뿐이었다.
서신의 내용은 이러했다.
- 어머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답니다. 서문 대협은 어린 시절 저를 살려 준 은인입니다. 저는 그분께 원수가 되었습니다. 저는 살아도 평범한 인간처럼 살아갈 순 없을 겁니다.
사우비.
전대 용왕궁주의 아들이자 보타문의 장문인 검후신제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를 감시하던 용왕궁도들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용왕궁을 탈출했다. 그가 향한 곳은 서문세가다. 그는 서문세가로 가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 어머니, 다시 만날 때는 당신이 검후가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그러니…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 모자의 연을 이어 나갔으면 합니다. 저는 이번 생을 이어 갈 자신이 없습니다. 최소한 반성하는 기색은 보여 주고 싶습니다. 병들었다고 면죄부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요. 저를 위해 희생된 수많은 용왕궁도와 백성들. 그들을 위해 저는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결국, 검후신제가 정신이 회까닥하여 회생비록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은 모두 사우비가 병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온순했던 아이는 어머니가 지은 죄를 참지 못하였고, 결국 서문세가로 가서 죽음을 택했다. 서문세가의 서문륭도 그 선택을 막지 않았다. 용왕궁으로 희생된 서문세가의 식솔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말도 안 돼. 이건 아니야. 꿈이야.”
미친 듯이 중얼거리던 검후신제.
그녀는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삶의 희망의 빛이 모두 사라졌다. 공허한 눈으로 서신을 바라보던 검후신제는 결국 기절하여 바닥에 쓰러졌다.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녀의 아들은 결국 죽었다.
황극린이 쏘아 낸 뇌탄보다 더 무섭고 지독한 고통이었다. 황극린은 그런 검후신제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어미.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지.’
아들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어미라도.
남의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세상이다.
황극린이 뒤돌아선다.
그녀는 일단 뇌옥에 살려 두기로 했다. 어떤 선택을 내릴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주산군도의 해저에 또 다른 마경이라.’
이건 사실 검후신제의 추측에 불과하다.
회계산에서 삽시간에 죽어 버린 수많은 무인을 보았고, 혈황마제와 대화한 그녀가 내린 결론이다. 주산군도는 마치 회계산처럼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여 그곳에 터를 잡아 살아가던 생명의 보금자리를 부숴 버렸다.
주산군도의 해저 깊숙한 곳에는 마경이 존재할 수도 있다.
황극린은 주산군도로 향하기로 했다.
만약 그곳에 존재한다면 두 번째 마경이었다.
* * *
강철 같은 다리!
황극린은 금령신단을 취한 후, 육신이 확실히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더 몸이 튼튼해진 느낌이랄까? 그 ‘조금’이라는 느낌 자체가 황극린 수준의 고수에겐 상당한 수준의 발전이라는 뜻이었다.
뇌탄과 같은 일견 무식한 기예를 펼치고도, 세맥과 혈맥이 무사한 것은 금령신단의 효용이라 할 수 있었다. 과거엔 영약을 취하기만 하면 단전으로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세맥에 흡수되었기에 불편함이 컸지만, 지금은 오히려 단전이 아니라 육신 자체에 흡수되는 게 더 효용이 좋았다.
물론, 황극린은 객관적으로 보면 절대고수라 불리는 이들에 비하여 내력의 양이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맞다. 다만, 그걸 상쇄할 압도적인 육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그의 장점이었다.
‘아직 체질이 바뀔 여지가 있다는 뜻.’
말 그대로 아직 한계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황극린은 솔직히 자신의 몸에 감탄했다. 207호로 살아가던 때에 이런 재능이 발현되었다면, 혈고독에 휘둘리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는 강철 같은 다리를 앞세워 더 빠른 경공을 펼쳐 절강성으로 돌아왔다.
그의 목적지는 주산군도의 해저.
용왕궁의 본거지였다.
서문세가에 들를까도 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여긴가.”
저 멀리 주산군도가 보인다.
수많은 섬들의 집합. 그것이 주산군도다.
황극린은 고민하다가 바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오히려 시간 낭비다. 황극린의 경공은 극성에 달했다. 아직 혈마교의 교주 혈황마제처럼 공중을 여유롭게 밟아 나아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물 위를 달리는 것 정도는 가능한 수준의 절대고수였다.
타다다닷!
작은 배를 타고 열심히 노를 저어 바다로 나아가던 어부가 있었다. 자신의 배가 은근히 빠르다고 자부한 그의 옆으로 무언가가 홱 지나간다.
“으악! 저, 저게 뭐야!”
마치 맨땅을 달리는 것처럼 바다를 달려가는 사내.
“뭐지……?”
긴가민가한 얼굴로 굽이치는 파도를 바라보던 사내가 바다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결국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뭐야!”
이미 황극린은 어부의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게 작아진 시점이었다.
* * *
황극린은 바다를 수색했다.
수영은 따로 배운 적이 없었지만, 황극린은 금방 물속에서 적응했다. 물론, 물 아래에선 제아무리 황극린이라도 숨을 쉴 수가 없었기에 자주 물 밖으로 나와야 했지만 말이다.
‘수련이 되는군.’
숨을 참고 움직인다.
물의 저항을 뚫고 나아간다. 아무런 제약이 없는 대지 위와는 전혀 다르다. 황극린은 미소를 머금었다.
‘잔잔한 호수도 아니고, 바닷속에서 격하게 움직이니 수련이 확실히 되는 것 같구나. 나중에 문도들과 함께 와야겠어.’
그렇게 마경을 찾아 헤매던 황극린이 보타산 아래의 해저에 도착했을 때였다. 단순히 혼자 수색한다고 해서 금방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남은 용왕궁도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판단한 황극린이 마경이 아닌 인간의 흔적을 찾고 있을 때였다.
‘저건?’
육지로 올라간 황극린의 감각에 미묘한 것이 걸려들었다. 음산하면서도 은밀한 기운. 범인들은 느끼지 못할 특유의 살의가 공간에 머물고 있었다.
‘기회로군.’
황극린은 슬슬 흑살문과의 악연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처음 이곳에 올 때, 황극린은 생존이 더 중요했다. 힘이 있어야지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이제 황극린은 움직일 때였다. 이리저리 재다 보면 결국 상황에 끌려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타닷.
황극린이 움직인다.
흑살문의 최상급 살수들이.
전생의 최상급 살수 207호와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황극린이 실로 오랜만에 묵철검을 빼 들었다.
* * *
공포의 순간.
살수들은 언제나 타인에게 ‘공포’로 군림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상대를 죽이는 게 바로 살수였다. 살수는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살수의 존재만으로 상대는 잔뜩 겁을 집어먹기 마련이었다.
흑살문의 최상급 살수들은 그런 공포가 어떤 것인지 깨닫고 있었다.
분명 주산군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열 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65호와 나뿐인가.”
사내는 자조적인 어조로 말했다. 누군가를 사냥해 본 경험만 있었다. 57호. 최상급 살수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급에 이를 정도의 재능은 아니었지만, 두 자리의 숫자인 만큼 강호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살수였다.
그런데 그는 궁지에 몰렸다.
마치 토끼처럼 말이다.
사내는 욕설을 내뱉을 힘도 없었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살의에 점점 삶을 포기하게 된다. 언젠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오늘이 될 줄은 몰랐다. 그의 곁에는 열 명의 최상급 살수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65호도 죽었다.’
주변을 둘러본다.
흔한 날벌레 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를 노리는 포식자는 분명하게 살수였다. 그것도…….
“…당신이 ‘색귀’입니까?”
색귀는 특급 살수 중에서도 가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흑살문주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말이 나돌 수준이었다.
그가 나설 때는 대부분 하나의 이유였다.
흑살문의 배신자 처단.
물론, 흑살문은 ‘혈고독’이라는 무기가 있다. 그것을 심장에 박아 넣고 언제든 휘하의 살수들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배신자를 잘 처단하진 않는다. 특급 살수 색귀는 그러한 방식을 즐기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렇기에 57호는 상대가 색귀라고 판단했다.
최상급 살수를 어린아이 가지고 놀듯이 학살할 수 있는 살수는 당연히 그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아니.”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57호가 당황한다. 아무리 봐도 그는 ‘색귀’가 아니었다. 색귀는 백발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거기다 너무 젊지 않은가?
“네놈은 누구지? 설마 비요둔의 둔주인가?”
“그것도 아니다.”
순간 57호가 전율한다.
무언가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설마… 네놈이 혈귀인가?”
“혈귀?”
“87호를 죽인 놈. 네놈이 흑살문 출신이라는 소문도 있었지.”
과거 사천성에서 활동했던 87호, 통칭 그림자라 불렸던 최상급 살수. 누구나 그가 특급 살수가 될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는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혈귀’라 불리는 존재에게 말이다.
흑살문에선 그를 추적했지만 찾지 못했다. 심증은 확실했다. 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어느샌가 그 의심은 거두어졌다. 다른 것에 집중하라는 흑살문주의 명령이 있었기도 했었다.
“묘하군.”
공교롭게도 207호였던 황극린이 전생에서 불린 별호 또한 ‘혈귀’였다.
왜인지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너는 과거의 혈귀처럼 죽을 운명이라고 세상이 소리치는 듯하다.
“맞다. 나는 혈귀다.”
“역시… 그랬군. 네놈은 큰 실수를 하는 거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배경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은 언젠가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네놈이 강하다고 생각하나? 아니. 네놈은 진짜 흑살문의 힘을 모른다.”
57호는 잘난 듯이 지껄이고 있었다.
“암혼마제께서 곧 움직이신다. 그분은 하늘이다. 천을 헤아리는 흑살문의 살수가 네놈의 심장을 노릴 것이다. 그분은 그림자에 녹아들어 네놈이 예상하지 못할 때 어둠의 칼날을 휘두를 것이다.”
하지만 황극린은 공포에 떨기는커녕,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지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 생의 혈귀는 다를 거다.”
“이번 생? 무슨 개소리를…….”
“그때의 혈귀와 나는 다르거든.”
혈귀라 불리는 사내의 몸에서 수백 갈래의 뇌전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57호는 그 뇌전이 무엇을 뜻하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광채가 터져 나오는 순간, 그의 목숨은 끊어졌으니까.
“혈귀라.”
황극린은 무심하게 흑살문의 최상급 살수들의 시신을 지나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