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49화 (249/316)

249화 자비

온몸을 찢어발기는 뇌전의 고통에서 겨우 벗어난 검후신제. 그녀의 눈앞에는 황극린이 서 있었다. 조금 전 그녀의 백청검강을 뚫고 들어온 뇌전의 구. 난생처음 보는 기술이었다. 이런 것을 숨기고 혈황마제와 싸웠던 걸까?

대체 이놈은 뭐란 말인가?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단 말인가?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강해질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온갖 의문과 의심이 검후신제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녀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 하나를 뻗는다. 마지막 순간 황극린의 손가락에서 뇌전의 구가 터져 나왔었다. 그 강렬한 기억 때문에 검후신제의 생각은 멈추었다.

“그만… 제발…….”

검후신제는 굴욕적으로 황극린에게 빌 수밖에 없었다.

그만둬 달라고 말이다. 더 이상 그런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의 고통이었다.

“회생비록을 원하는 이유는 네게 걸린 저주 때문인가?”

“나, 나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

의아했다.

회생비록을 차지하기 위해 납치까지 벌였다. 그런데 그녀가 저주에 걸린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황극린이 빤히 바라보자 검후신제는 저도 모르게 술술 털어놓았다.

“아들… 내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아들이라?

검후신제에게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하였다. 뭐, 숨겨 둔 자식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아들이 천형을 타고났단 말인가?

“네 아들을 위해서 우리 문도들을 납치한 건가?”

황극린이 무심하게 말한다.

그런 무심함이 검후신제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죄송… 정말 죄송합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회생비록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회생비록에 대하여 아는 대로 모두 말하도록.”

“회생비록… 회생비록은… 삼황(三皇) 중 한 명이 남겼다고 알려진 고대의 비서(秘書)입니다. 회생비록의 정본에는 타고난 생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비서를 얻는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삼황이라.”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고대의 전설적인 왕들을 삼황이라 칭한다. 그들이 실존했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삼황 중 인황(人皇)이 무공을 인간에게 알려 줬다는 전설은 무림에서도 꽤 믿는 자들이 많았다. 흑살문에서 기초적인 역사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당시 교관은 삼황에 대한 것은 모두 거짓이며 신앙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던 적이 있다.

회생비록이라는 비밀스러운 서책의 전설이 삼황과 얽혀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게 아니었다. 거기다 검후신제가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넌 회생비록을 본 적이 있나?”

“정본은… 없습니다.”

역시 신뢰도가 확 떨어졌다.

이 여인은 회생비록을 보지 못한 게 분명하다. 만약 황극린이 가진 회생비록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했을까?

“볼 기회를 주도록 하지.”

“저, 정말이십니까?”

검후신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황극린은 자신이 보지 못한 걸 검후신제가 알아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검후신제가 광기가 깃든 눈빛으로 황극린이 건넨 회생비록을 읽어 나간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라 금방 다 읽었다.

그리고.

“아니야.”

검후신제가 다시 처음부터 회생비록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회생비록.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회생비록에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 황극린이 가진 회생비록은 단순한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약간의 교훈을 줄 수도 있겠지만… 검후신제가 이것을 원했던 것은 교훈 따위를 얻으려 함이 아니다.

더욱이 황극린이 가진 회생비록은 좌절과 절망의 결말을 담고 있었다. 공령신체를 타고났음에도 비참하게 태양에 최후를 맞이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그는 반로환동의 경지까지 올랐지만, 결국 저주는 해소되지 않았었다.

“어떻게……? 이것을 보고 서문륭이 반로환동의 경지에 도달했을 텐데… 왜 아무것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회생비록의 정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가 보고 있는 회생비록에는 희망이 없다.”

“…….”

아득한 절망이 검후신제의 얼굴에 깃들었다.

그 모습을 본 황극린이 회생비록을 회수한다.

“그래서, 네게 회생비록의 존재를 알려 준 존재가 누구지?”

그녀는 회생비록의 정본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과도한 믿음으로 이런 짓까지 벌였으면 그에 상응하는 근거가 있으리라. 희망을 잃어버린 검후신제가 멍한 얼굴로 대답한다.

“제 부군이었습니다……. 그는 용왕궁의 궁주로서… 저와 혼인하지 않겠다고… 후회할 것이라 했습니다…….”

“부군? 이름이 뭐지?”

“무림에서는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산군도(舟山群島) 해저에 살아가는…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만약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회생비록을 찾으라 했습니다. 그것을 얻는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검후신제의 감정이 격해졌다.

씩씩거리며 회생비록을 노려보는 표독스러운 시선. 황극린이 가진 회생비록만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희망이 없었다. 회생비록의 단서는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존재하는지도 의심되는 정본이었다.

“대체 왜? 나는 모든 것을 걸고 살아왔는데… 왜……!”

“검후신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저는 다른 회생비록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시는 만뇌문에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제 아들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부디…….”

“네 아들은 어떤 저주를 가지고 있지?”

“바다의 정수를 취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정수는 모두 썩어 버렸습니다. 바다를 헤집어 찾아보아도… 그 어떤 정수도 없습니다. 제 아들은 더 많은 힘을 타고났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용왕궁도들보다 더 많은 정수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회생비록이… 회생비록이 필요합니다.”

용왕궁이 살아남으려면 바다의 정수라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썩었다.

그걸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으니 그녀의 아들은 죽는다. 저주를 해소하려면 회생비록이 필요하다. 그렇게 정리할 수 있다.

“혈황마제와는 무슨 이야기를 했지?”

“그 미친 인간은 제게 경고했습니다. 진정한 의미로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은 한 명뿐이라 단언했습니다. 제 아들이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저주했습니다!”

진정한 의미로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다.

황극린의 입장에선 의아했다. 최근 월영문 소문주의 저주도 황극린의 피로 해소되었지 않은가? 물론, 완벽하게 저주가 해소되었는지는 아직 더 지켜보아야 할 테지만 말이다.

“그게 끝인가?”

“예……?”

“네가 아는 건 그게 끝인가?”

“그건…….”

“당장 죽이지는 않으마.”

황극린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했다.

월영문의 소문주를 구해 준 것처럼 그녀의 아들을 저주에서 벗어나게 시도해 볼 수도 있었다. 만약 황극린의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보타문과 용왕궁은 황극린의 휘하에 들어올 수 있다.

최근 만뇌문은 급속도로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서문세가와 월영문이 만뇌문의 휘하로 들어왔다.

보타문과 용왕궁이라면 그들보다 훨씬 더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더더욱.

“제발……!”

황극린은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했다.

용왕궁과 보타문을 품는다는 생각 자체가 욕심이었다. 만뇌문도들을 위해서라도 검후신제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황극린이 손가락을 펼쳤다.

화들짝 놀란 검후신제가 발악했지만, 뇌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다. 그녀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때, 황극린의 뒤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화염신황이었다.

“거창하게도 싸웠구만그래?”

무너져 가는 전각. 황극린과 검후신제의 싸움에 불타오르고, 잘리고, 부서졌다.

화염신황이 쓰러진 검후신제를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설마 검후가 배후였다니. 죽일 생각인가?”

“그렇소.”

“한바탕 무림이 난리가 나겠군. 잡음이 생긴다면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고맙소.”

“고맙긴. 자네가 해 준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네.”

화염신황은 독기가 제거된 것만으로 꽤 회복이 되었는지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문도들은 어디에 있소?”

“저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네.”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기절한 검후신제를 둘러메고 전각을 나선다. 구자광은 황극린이 직접 구했지만, 비청하는 화염신황이 구했다. 두 사람이 무사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화염신황이 떠나가는 황극린을 바라본다.

‘검후신제와 싸웠는데도 전혀 숨이 흐트러지지 않았군. 전각이 무너진 것에 비해 상처도 하나도 없어. 금성지체… 정말 대단하군.’

화염신황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 * *

보타문의 장문인 검후신제.

그녀가 만뇌문의 황극린에게 패배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보타문은 허위 사실이라며 부정했지만, 화염신황이 만뇌문을 두둔하고 나서니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보타문은 3천 명의 문도를 거느린 명문거파였다. 하지만 그런 힘이 있더라도 만뇌문과의 싸움에선 승리할 수 없었다.

결국, 보타문은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의 의미로 백 년의 봉문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만뇌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대룡상단과 다툼이 있었을 때만 해도 만뇌문이 조만간 사라질 문파라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만뇌문은 언제나 승리했다. 대룡상단과 소림사 그리고 보타문까지 말이다.

거기다 화산파까지 만뇌문을 옹호하고 나섰으니 정파 문파 중에서는 감히 만뇌문에 반기를 들 문파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 무림맹에서 만뇌문을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알게 모르게 손발이 잘려 나가 결국 자리에서 밀려나기까지 했다.

당장 만뇌문의 체급은 구파일련과 동등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황극린의 순위를 재조정했습니다.”

흑살문에서도 황극린에게 관심을 보였다. 과거엔 무림 전체에서 50위의 순위를 매겼다. 하지만 현재 흑살문 내에서 황극린에 대한 평가는 대단했다. 최소 무림 전체로 따져도 10위권 이내였다. 현재 활동하지 않는 은둔 고수들까지 포함한 순위이다 보니 10위권 이내라는 건 대단한 업적이었다. 거기다 최소 순위가 10위 이내였다. 특급 살수 세 명의 인가를 받으면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황극린을 제거해 달라는 의뢰가 두 건 있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흑살문의 특급 살수 중 한 명인 독귀(毒鬼)가 눈을 빛냈다.

“어디지?”

“혈마교와 용왕궁입니다.”

“용왕궁은 그렇다고 치고… 혈마교라. 흥, 손 안 대고 코를 풀겠다는 거군.”

당연히 의뢰는 다 거절이었다.

애초에 황극린의 의뢰를 받지 말라는 문주의 명령이 있었다. 그는 황극린이 무림을 혼란에 빠트릴 존재라 했었다.

“알겠다. 가 보아라.”

“예.”

독귀가 자리를 옮긴다.

그가 향한 곳은 흑살문주 암혼마제가 있는 곳이다. 그는 드높은 성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사막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암혼마제에게 보고한다. 암혼마제는 감정이 깃들지 않은 얼굴로 독귀를 마주했다.

“용왕궁도 쓰임이 있을 터인데.”

“예, 검후가 당했으니 그들을 흡수할 생각입니다.”

용왕궁도들은 확실한 재능을 타고난다. 물론 제약이 많은 놈들이지만, 활용하기에 따라서 꽤 괜찮은 소모품이 될 수도 있었다.

“황극린과 화염신황이 같이 있었다고 했던가.”

“예, 명화대(明火隊)의 정보로는 화염신황은 별 어려움 없이 운신했다고 합니다.”

“묘하군. 황극린에게 무엇이 있지?”

“놈과 만독문이 연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흡!”

독귀가 암혼마제의 출렁이는 그림자에 흠칫한다.

“죄, 죄송합니다. 만독문 따위가 문주님의 ‘독’을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암혼마제가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그의 그림자는 마치 고정된 것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독귀는 암혼마제가 보여 주는 신기와 같은 기예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특급 살수에 도달하고는 천하를 가진 기분이었지만, 흑살문주를 모시며 그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북해에 다녀오지.”

“예, 문주님.”

암혼마제가 떠나간다.

독귀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출렁이는 그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후우, 매번 있는 일인데도 문주님 앞에만 서면… 다리가 후들거리는군.”

성채를 내려간 독귀.

그의 앞에 방금 보고를 마쳤던 수하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뭐냐?”

“그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용왕궁을 포섭하러 갔던 최상급 살수 열 명이 모두 당했습니다.”

“뭐……?”

독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