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47화 (247/316)

247화 납치 사건

- 비청하와 구자광이 납치됐다.

전음석에 쓰인 글을 보고 황극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여러 문파와의 신경전을 거치고 안정을 되찾았다. 만뇌문의 문도들이 계속 동굴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들도 밖에서 사람을 만나고, 만뇌문의 사업체도 관리한다.

평생 가상의 적을 걱정하며 전전긍긍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런 선택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의 굳은 얼굴을 본 화염신황이 묻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본문의 문도가 납치됐다고 하오.”

살의가 흘러넘친다. 화염신황은 가만히 황극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저런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황극린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그의 분노를 보고 마주하고 있으니 약조를 어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화염신황도 일어선다.

“나도 감세.”

“괜찮겠소?”

“어차피 만뇌문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저기 밖에 있는 내 제자 놈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네.”

“알겠소. 하지만 당신의 속도에 맞춰 갈 수는 없소.”

“그러시게나.”

화염신황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경공을 펼칠 것은 그가 아니었으니까.

“운아, 나갈 채비를 하거라.”

“…….”

당연한 것처럼 밖에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 * *

운명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믿는 이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 준 운명대로 살 것이라면 왜 모두는 매번 선택하며 살아가는가?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느냐 마느냐조차도 운명의 갈림길이 될 수도 있다.

운명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지독한 현실에 항거하지 못하고, 결국 무릎을 꿇는 이들의 변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여인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만하고 빠지라는 혈마교주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선택하고, 움직였다. 그녀의 선택은 간단했다. 회생비록의 정본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황극린을 협박하는 것.

그를 협박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혈마교주 혈황마제와 잠시나마 동등하게 싸운 황극린이다. 단순한 무력으로 제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여인은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누군가 그녀를 욕한다고 할지라도.

‘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남의 시선이 두렵다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게 무어가 있을까?

가면 속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안광이 번뜩이고 있다. 그리고 사지가 포박되어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는 두 사내가 있었다.

“혈마교는 아닌 것 같은데, 제정신이 아니로군.”

“당신은 후회할 것입니다.”

구자광과 비청하.

두 사람은 만뇌문에서 제조한 환단과 병장기들을 상단에 넘겨주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보름마다 하는 거래였지만 두 사람이 방심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여인의 무공 수위가 너무 높았을 뿐.

구자광은 최근 공야진에게 곤륜파의 절전 무공을 배워 더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이 훨씬 강했다. 최소한 혈마교의 부교주급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우리를 풀어라. 물어 뜯기기 전에 말이야.”

여우 가면을 쓴 여인이 구자광을 바라본다.

광견살검이라는 별호가 어디로 사라지진 않은 모양이다. 납치된 와중에도 저리 으르렁댈 수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같잖은 협박은 여인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이야, 과연 너희 때문에 황극린이 위험을 감수할 것 같으냐?”

“당연히.”

“그렇군.”

여우 가면을 쓴 여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하지만 너는 나를 이용하지 못할 거다. 장로님께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목숨을 끊을 거니까.”

당당한 발언이다.

하지만 여인은 코웃음을 흘렸다.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거기다 두 명이나 납치해 오지 않았던가? 저 유약하게 생긴 아이도 같은 마음일까?

여인의 시선이 비청하에게로 향했다.

“제 목숨은 만뇌문을 위해 쓸 것입니다.”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비청하는 절맥증으로 20살이 되기도 전에 요절할 운명이었다. 그것을 살려 준 게 황극린이다. 평생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고자 했다. 만약 그에게 방해가 된다면 비청하 또한 결단을 내릴 것이다.

두 사내의 결연한 얼굴을 보고 여인은 가면 뒤로 미약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이들이 마음에 든다.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 남에게 선택을 맡기지 않는다. 순간순간 선택의 갈림길에서 편하고 구차한 선택을 하는 이들이 널린 세상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만뇌문은 확실히 묘한 구석이 있는 문파였다.

개파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런 문도들을 거느리고 있는 걸까? 만뇌문의 수장인 뇌불이 수하를 잘 거느리는 성격인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두 사내가 저리 말을 했다면, 여우 가면도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굳이 너희를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될 뿐이지.”

“그렇다면 우리를 풀어 다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여우 가면이 부드럽게 걸음을 옮겼다. 이미 내공의 사용을 제약당한 두 사람은 여인의 움직임을 좇지 못했다. 여우 가면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두 사람을 기절시켰다.

“너희 두 사람은 떨어져 있는 게 낫겠군.”

두 사람을 같이 데리고 있다간 황극린에게 허를 찔릴 가능성도 있었다. 한 명을 다른 곳에 가두어 두는 것이 좋으리라.

여인은 또다시 선택했다.

이것이 옳은 선택일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 * *

황극린은 화산에서 청성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만뇌문에 도착하니 뇌불과 공야진을 제외한 다른 문도들은 동굴 안에 있었다. 그들이 구자광과 비청하를 찾아 수색하다가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었으니까. 옳은 결정이었다.

물론, 남아 있는 문도들은 지독한 자괴감에 휩싸였다.

“죄송합니다. 저희의 실력이 부족했습니다.”

“죄송해요…….”

“장로님,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백건악과 백온후 그리고 제갈수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구자광과 비청하는 그들과 피를 나누진 않았더라도 형제라 할 수 있었다. 납치를 당했는데도 그들은 어떠한 대응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만뇌문의 진법을 방패 삼아 숨어 있을 뿐.

그들의 기분이 어떨까?

황극린은 항거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과거를 기억한다. 흑살문에 거역하면 혈고독은 그의 심장을 파먹었을 거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시키는 일만 해 왔을 뿐이었다. 그때의 더러운 기분이 떠오른다.

“괜찮다고 말하진 않겠다. 하나, 그렇다고 자학하진 말아라. 실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더 수련하면 된다. 너희에겐 나와 뇌불 그리고 구 교관이 있지 않나?”

“……!”

구자광은 납치됐다.

하지만 황극린은 구자광이 곧 돌아온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문도들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황극린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문도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한 후 설명을 요구했다.

“구 교관님과 청하는 유화상단과 거래를 하러 나갔습니다.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는데, 입구에 이런 서신이 있었습니다.”

백건악이 서신을 내민다.

- 회생비록을 내놓아라. 그럼 문도들을 살려 주도록 하마.

짧은 내용이었다.

“서신을 받자마자 문주님과 공 대협께서는 문파를 나서서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흑주는?”

“흑 사형은…….”

백건악이 당황하고 있을 때, 백온후가 입을 연다.

“흑 사형도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러고 보니 매번 저희가 상단과 거래를 할 때 흑 사형도 같이 문파를 나가셨던 것 같은데, 설마!”

백온후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듯이 흥분한다.

그가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흑주가 그들을 뒤쫓았나 보군.”

“……!”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흑주를 또 어디에서 찾는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너희는 답답하더라도 잠시 안에 있도록 해라. 금방 다녀오도록 하마.”

금방 다녀온다는 황극린의 말이 왜 이리도 든든할까?

그들 또한 납치된 구자광과 비청하를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황극린은 그들을 무사히 데려올 것이다.

* * *

황극린이 움직인다.

그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유화상단 중강지부였다.

‘녀석은 분명 흔적을 남겨 뒀을 거다.’

서신으로 납치범이 누군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아마 용왕궁의 궁주일 가능성이 컸다. 혈마교주가 데려갔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바로 만뇌문을 공략할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황극린은 심히 분노한 상태였다.

그들이 회생비록을 원하는 것도 안다.

아마 용왕궁에도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하지만 그게 만뇌문을 건드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황극린은 초감각을 이용하여 흑주가 남겨 놓은 흔적을 수색했다. 경지에 이른 용왕궁주도 모르게 흔적을 남겨 둬야 했을 터이니 뇌불과 공야진도 찾지 못하는 단서일 것이다.

‘여기다.’

황극린은 은은한 독의 향기를 감지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바위 부근에 한 방울의 독이 떨어져 있었다.

황극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흑주가 이곳에 독액을 떨어트린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을 이어 가던 황극린.

‘그렇구나.’

황극린이 품속을 뒤진다.

뇌섬사가 주르륵 딸려 나온다. 여러 가닥이 뭉치면 그나마 육안으로 분간이 가능했지만, 한 가닥은 눈앞에 있어도 쉬이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이런 뇌섬사가 바닥에 깔려 있다면?

그걸 찾을 방법이 있다.

황극린이 한 손을 바닥에 댄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뇌광이 폭사되었다.

콰지지직-!

눈으로 찾을 수 없다면, 뇌전을 퍼트리면 된다. 뇌섬사는 뇌전에 반응하니까.

부우우우웅-!

황극린의 한쪽 입꼬리가 꿈틀했다. 바닥에 떨어진 한 가닥의 뇌섬사. 흑주가 머리를 쓴 것인지 평소보다 훨씬 얇았다. 녀석은 뽑아내는 거미줄의 굵기도 조절할 수 있었다.

“녀석.”

참으로 든든했다.

흑주가 있었기에 황극린은 청성산을 떠나 회계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부웅-! 부우웅!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황극린이 손에 쥔 뇌섬사는 흑주와 연결되어 있었다. 뇌전을 느낀 것인지 뇌섬사가 팽팽해지며 반응이 왔다.

“곧 가마.”

황극린이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

얼마나 숨이 찼는지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오른 사내. 화염신황의 제자라는 놈이다. 알고 보니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얼굴로 거의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황당한 눈으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의 경공이 어찌 저리도 빠른가?

같이 출발했음에도 황극린은 벌써 사천성에 도착했다. 화염신황을 업고 있었기에 무리가 갈 수도 있었지만, 애초에 화염신황은 내력을 이용하여 제자에게 무게가 거의 전가되지 않도록 했기에 홀로 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황극린이 이미 청성산에 다녀왔다는 것까지 말하면 더 놀랄 테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따라오시오.”

“…….”

눈빛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의 체력 회복 따위가 아니었다. 가면서 체력을 회복하면 그만이다.

“흔적을 발견한 것인가?”

“그렇소.”

“그래. 운아, 조금만 더 고생하자꾸나.”

“…….”

화염신황의 제자 청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승부욕이 가득했다.

“그럼 따라오시오.”

타닷!

황극린이 다시금 경공을 펼쳤다. 청운은 죽기 살기로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 * *

용왕궁의 궁주는 황극린이 청성산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서신을 만뇌문에 전해 주고 오너라. 인질과 회생비록을 교환할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그 회생비록만 얻는다면 미래로 향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운명을 스스로 바꿀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혈마교주는 포기하라 일렀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그녀는 용왕궁에 있을 아이를 떠올렸다.

저주받은 피를 타고났다. 분명 장점도 있었지만 잃는 것이 더 많았다. 그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회생비록을 찾아가다 보면 하늘의 저주를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여기에 숨어 있었군.”

“……!”

용왕궁주는 이미 검을 들었다. 그녀의 검에서 백색의 검광이 흩날린다.

“어떻게 여길 찾았지? 흔적은 다 지웠을 텐데.”

황극린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지금 용왕궁주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여인도 여기까지 와서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놀랍군. 용왕궁주의 정체가 너였다니.”

여인이 어깨를 으쓱한다.

“네놈은 그걸 세상에 알리지 못할 것이다. 네 문도들을 죽게 할 셈인가?”

“아직 보고를 받지 못했나 보군.”

무슨 보고? 하고 되묻기도 전에

“이미 구출했다.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