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화산으로
“회생비록이라.”
천화련의 소련주 계빈. 그는 회생비록에 대하여 알고 있는 듯했다.
“으음, 자네도 그런 건가?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자네 정도의 재능이라면 말이야.”
무엇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계빈이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게 있나?”
“그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네. 알고 있어도 남에게 정보를 주진 않겠지.”
“이유가 있는 건가?”
계빈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금세 털어놓았다.
“회생비록의 정수를 얻을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이라 알고 있다네.”
“한 명이라고?”
“그렇다네. 회생비록을 노리는 이들은 모두 경쟁자인 셈이지.”
그런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한 사람일까?
지금도 황극린의 피를 이용하여 한 사람의 저주를 해주하지 않았던가? 물론 아직 완벽하게 해주가 된 것인지는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조향령의 육체 능력이 하락한 것으로 보아서는 저주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인형혈삼.’
황극린의 뇌리에 인형혈삼이 떠오른다.
그게 회생비록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정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가능성은 있었다. 다만, 인형혈삼이 그러한 종류의 영약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당시 인형혈삼의 소문은 알 사람은 다 알 수준이었지. 그런데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영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혈마교주 혈황마제와 북해빙궁의 빙백마후를 보면 알 수 있다.
207호로 불리던 과거의 황극린은 그들과 인형혈삼을 놓고 경쟁했다면 절대 승자가 될 수 없었다.
어째서 황극린이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인형혈삼은 회생비록과는 별개의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정이라도 있었던 걸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모두 다 짐작일 뿐이다.
‘회생비록을 찾을 수 있다면 알 수 있겠지.’
황극린이 말한다.
“천화련에는 회생비록이 있나?”
“있긴 하네. 다만, 그것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군.”
“다른 회생비록에 대한 단서는?”
“잘 모르겠군. 있다면 이미 련주께서 명령을 내리셨겠지.”
의외로 계빈은 많이 아는 것은 없는 듯하다.
그가 말하는 것도 예상이 섞여 있을 뿐이다.
“너는 회생비록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에겐 회생비록을 말할 때 간절함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간절하진 않네.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어둠을 더 선호해. 그렇다고 햇빛을 견디지 못하는 수준도 아니지. 회생비록은 그러한 저주를 풀기 위한 수단일 뿐. 내 무위가 더 올라간다면 굳이 회생비록이 필요하지 않겠지.”
계빈의 말이 정론이었다.
그 또한 자신만의 방법으로 저주를 이겨 내고 있었다.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자네에게도 문제가 있는 건가? 설마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거나 그런 것은…….”
“너무 건강해서 탈이로군.”
“그래? 정말 다행이로군.”
진심으로 기뻐하는 계빈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난 자네의 피가 저주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기도 하다네.”
계빈은 최근 황극린의 피를 이용해서 혈석을 만들었다.
약간 취했지만 햇빛에 대한 내성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부작용은?”
“부작용? 그런 것은 없던 것… 아, 있군.”
“뭐지?”
“자네의 피가 더 많이 필요해. 처음엔 조금만 먹어도 효과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혈석이 필요할 것 같더군. 최소한 열 통은 더 필요…….”
열 통이면 아마 보통 인간이라면 피가 다 빠져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피를 뽑아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다 채우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불가.”
“크음, 언젠가는 자네와 거래할 것을 찾아오도록 하겠네.”
계빈은 그래도 상식이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내어 줘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물론, 힘이 있다면 강제로 빼앗는 것도 권리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계빈은 황극린에게 아직 약자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계빈은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회생비록을 찾는다면 어쩌면 련주님과 싸울 수도 있다네. 그때가 되면 자네와 나는 싸울 수도 있어. 괜찮겠나?”
“…….”
황극린이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계빈이 깊은 한숨을 토해 낸다.
“그래, 자네도 힘들겠지.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아무리 절친한 친우라도 싸울 때가 있는 법이지. 그때가 되어선 자네와 동등한 위치에서 서고 싶군.”
“그러길 바라지.”
이것이 진정한 친우!
언젠가 앞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음에도 황극린은 자신의 성장을 바란다. 참된 우정이 이런 건가? 혼자 감격한 계빈이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혹시 이것이 있을 만한 장소를 알고 있나?”
“듣자 하니 화산파에 있다는 소문이 있긴 하더군.”
“화산파?”
“확실한 정보는 아니라네.”
“고맙군.”
“별게 다 고맙군. 어차피 확실한 것도 아니니 없어도 내 탓은 하지 말게나.”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회계산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
육금연이나 제갈소희는 아마 반년 이상은 마경의 연구에 매달려야 할 거라고 했다. 황극린이 없다면 마경에 들어서지도 못할 테지만, 입구를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진법의 틀을 바꿀 수 있다나 뭐라나?
마경을 연구하고 얻은 심득과 정보는 황극린과 공유하기로 했으니 잠시 떠나 있어도 될 것이다. 회계산에서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 * *
“감히…….”
여인이 검을 휘두르자 바위가 깔끔하게 잘려 나간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른다. 감히 그딴 망발을 내뱉어? 운명을 극복하지 못한다고? 애초에 운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 그녀는 부모에게 버려졌으며 길가에서 객사할 뻔했으나, 스스로 두 다리로 일어서서 나아갔다.
운명을 믿는 이라면 이미 길바닥에서 죽었어야 했다.
자신의 팔자가 고작 이따위 것이라며 좌절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사라졌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혈황마제가 했던 말에 분노가 치민다. 그놈이 뭐라고? 혈마교의 교주면 운명을 관장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녀는 백색의 검강이 맺힌 검을 수백 번 휘둘렀다.
나무며 바위며 모두 잘려 나갔다. 그녀의 검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죽은 날짐승들도 있었다.
“…회생비록을 강탈해야 한다.”
황극린이 가진 회생비록은 정본이 분명했다.
그것에 적힌 구결이 있으면 그녀의 아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정면 대결만이 능사는 아니지.”
여인이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소중한 아이를 위해서라면 말이다.
절대 그녀를 버리고 떠난 책임감 없는 부모처럼은 행동하지 않으리라. 무슨 수를 써서든. 세상의 질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극복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내 운명이다.’
여인이 검을 거두고 자리를 떠났다.
* * *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도복에 수놓인 매화. 그것으로 정체를 가늠할 수 있다.
열 명의 매화검수(梅花劍手)가 황극린을 가로막는다.
매화검수들의 살기가 황극린을 압박한다. 당장이라도 검격을 내지를 기세였다. 황극린은 의아함을 느꼈다. 화산의 초입에서 매화검수가 경계를 서고 있다니? 매화검수는 화산파가 자랑하는 최정예였다. 고작 초입의 경계를 설 수준이 아니다.
“만뇌문의 황극린이오.”
“황극린?”
“파천뇌권!”
매화검수의 살기가 잠시 옅어졌지만, 이내 다시 살기가 휘감겨 왔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무공이라도 펼쳐야 하오?”
사실 증명할 방법은 없다. 뇌전을 다루는 무공을 익힌 건 황극린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매화검수는 애초에 출입을 허가할 생각이 없었다. 제아무리 황극린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정말 파천뇌권 대협이시라면 죄송합니다. 현재 화산에 사정이 있어 객을 받지 말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으음.”
난감했다. 기껏 화산까지 달려왔다. 황극린의 경공으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황극린에게도 시간은 소중하다. 언제 화산이 정상화가 될지도 모르는데 다시 찾아오는 건 낭비였다.
“장문인을 뵙고 싶습니다만, 방법이 없겠습니까?”
매화검수들은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거절했다.
화산에 심각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긴 했다.
‘무슨 일이지.’
황극린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정말 왔군.”
“장로님을 뵙습니다!”
짙은 눈썹의 민머리와 굳게 다물어진 입술, 서슬 퍼런 눈동자가 그의 성격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화염신황과 견줄 만큼 거대한 검을 등에 메고 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화산의 장로 학청(鶴淸)이라 합니다. 황 대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학청 장로의 말에 매화검수가 당황한다.
그들에겐 그런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로 학청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다.
“으음, 화염신황께서?”
“예, 안내하겠습니다.”
매화검수들은 왠지 불안한 듯 보였지만, 결국 길을 터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황극린을 흘끗 바라본 학청이 폐부로부터 흘러나오는 깊은 숨을 토해 냈다. 그것만으로 그의 심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살수가 습격했습니다.”
“살수 말입니까?”
“예.”
“…….”
오악 중 서악이라 불리는 화산.
이곳은 청성파가 위치한 청성산보다 더 청명하면서도 웅장한 세를 품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화산을 올라가는 와중에도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다. 수많은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다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상당한 실력자들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초입의 매화검수들보다 훨씬 뛰어난 무인들이었다.
“후후, 황당하시지요?”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대체 어떤 살수가 화산을 침범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략 반 시진을 산을 타고 올라갔다.
두 사람이 상승의 경공을 펼쳐 도착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
“이곳은 세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험지입니다. 생문을 알려 드릴 터이니…….”
진법.
회계산의 마경과 제갈소희와 제갈창해가 만든 만뇌문의 진법도 홀로 통과한 마당에 화산의 진법이야 그냥 통과할 수 있겠지만, 황극린은 학청의 말을 들었다.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는 능력이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진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뭐, 황 대협의 실력이시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예, 주의하겠습니다.”
황극린이 진법 안으로 진입했다.
회계산의 마경을 겪어서인지 소꿉놀이 장난 같은 느낌이었다. 대충 진법을 돌파한다.
“…….”
평야 위에 우뚝 선 오두막.
평상에선 호리호리한 뱀눈의 사내가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명만 들어갈 수 있다더니, 저 사내가 있었기 때문이군.’
그런데 뱀눈의 사내는 말이 없었다.
- 들어오게.
오두막 안에서 전음이 들린다.
황극린은 사내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 또한 묵례로 화답했다.
안으로 들어간 황극린.
“…….”
화염신황과는 딱히 큰 인연은 없었다.
병색이 만연한 얼굴로 누워 있는 천하칠대고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왜인지 느낌이 묘했다. 그를 보고 있으니 창천뇌검이 떠올랐다.
아니, 화염신황은 창천뇌검보다 몇 수 위의 고수다.
그런 화염신황이 어찌?
‘내가 알던 미래에 없던 일이다.’
천하의 화염신황이 살수에게 당했다.
대체 어떤 살수에게?
비요둔, 밀은영 그리고 흑살문.
세 살수 문파가 떠오른다. 당연히 화염신황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살수 문파는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흑살문이다.
“암혼마제가 왔던 것이오?”
“그렇다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할 이야기가 많으니 앉으시게나.”
황극린이 화염신황의 옆에 앉았다. 그는 부들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화염신황은 정파의 고수 중에서도 가장 강한 무인으로 꼽히고 있었다. 거기다 황극린은 화염신황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역시 암혼마제는…….’
화염신황과 비슷한 수준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산파에 숨어들어 화염신황을 습격했다면 암혼마제의 무위를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 황극린은 암혼마제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자네가 정말 올 줄은 몰랐다네.”
“확신은 없었던 것이군요.”
“그렇다네. 자네가 회계산으로 향했다는 소식은 들었다네. 그렇기에 이곳으로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회계산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셨던 것이오?”
“모르지. 다만… 내가 가지고 있던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네.”
화염신황이 가진 것?
계빈이 말해 줬었다. 화염신황이 어쩌면 회생비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곳에 회생비록이라는 서책이 있던가?”
황극린이 고개를 저었다.
“없었소.”
그러자 화염신황이 의아한 표정으로 황극린을 마주한다. 회계산에 천화련의 무인들이 몰려갔다는 것은 들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회생비록이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런데 아니라니?
“회생비록은 서문세가에서 얻었소.”
“그렇게 된 일이었군.”
“그래서 회생비록은 어떻게 됐소?”
황극린은 회생비록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설마 빼앗겼을까? 화염신황의 상태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가 가져갔다네.”
역시.
“하나, 그 내용은 내가 수백 번도 넘게 읽었었지. 그 내용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네.”
화염신황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황극린을 기다린 것이다.
그래도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굳이 왜 자신에게?
그런 황극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화염신황이 옅은 미소를 띤 채 말한다.
“이미 알고 있네. 영약을 취하면 취할수록 강도가 상승하는 체질. 그러면서도 유연성도 겸비할 수 있는 체질이라지. 난 모두 알고 있다네. 자네가… 금성지체(金星之體)를 타고난 것을 말일세.”
“…….”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의 말을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왜인지…….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다네. 들어준다고 약조한다면 금령신단(金靈神丹)을 내어 주도록 하지.”
이럴 것 같은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