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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44화 (244/316)

244화 나아가다

적혈강.

피를 이용하는 무공이다. 천화련에선 인간의 피를 이용하여 내공을 쌓는다. 당연히 평범한 무공과는 궤를 달리한다. 위력적인 무공이었고, 황극린과 상성도 꽤 잘 맞을 것 같은 무공이다.

다만, 황극린은 적혈강을 익혀 무위를 높이려는 게 아니다.

물론, 적혈강을 사용한다면 혈마교주와의 싸움에서 약간의 우위를 점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적혈강으로 혈석을 만드는 것이 황극린의 목적이었다.

그의 피는 현재 ‘독’과 같다.

분명한 성장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은 맞지만, 결국 독으로 작용한다. 피를 이용하여 흑주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흑주는 지금도 만뇌문의 핵심 무력 중 하나였다.

황극린의 피를 먹고 더 성장한다면 어떻게 변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계빈과 거래했다.

그의 피를 나눠 주는 대신 적혈강을 익힐 수 있도록 말이다.

“이건 절대 비밀이라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돼.”

“내가 뭘 익혔는지 떠벌리고 다니진 않는다.”

“그래, 자네의 신의를 믿겠네. 그리고 피 말인데…….”

흥정을 시작한다.

결국 계빈도 황극린의 피를 얻기 위해서 거래에 응한 것이다. 아무리 절친한 친우라도 적혈강을 알려 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물론, 황극린을 강제로 사로잡아 피를 추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를 사로잡으려면 천화련주가 직접 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계빈은 아버지에게 황극린의 존재를 알리고픈 마음이 없었다.

왜인지 미래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 통 정도면… 어떻겠나?”

“…….”

계빈이 황극린의 눈초리에 찔끔한다.

특이한 질감의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 저기에 세 번을 채운다면 보통 사람은 쓰러지거나 심할 경우 죽을 거다.

“당연히 당장 뽑아 달라는 게 아니라네. 음, 자네는 경지에 올라 회복력이 좋으니 두 달 정도 같이 있으면서…….”

“그럴 시간은 없다.”

“그렇군. 그럼 한 달 정도면 어떻겠나? 본련의 영약을 복용하면 피가 빠르게 만들어진다네. 그걸…….”

“거래할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 무조건! 무조건 하겠네!”

“한 번으로 하지.”

“한 번?”

“피를 나눠 주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아.”

황극린은 더 이상의 흥정은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각이 지나기도 전, 계빈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알겠네. 자네의 뜻대로 하도록 하지…….”

그렇게 거래가 성립됐다.

* * *

“이건가.”

왜인지 적혈강은 익히기 어렵지 않았다. 물론 계빈이 사용하는 것처럼 핏빛 강기를 뽑아내지는 못하였지만, 그 구조를 익히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황극린이 원하는 것은 피를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적혈강의 구결 속에는 그것이 다 담겨 있었다.

황극린의 피로 만들어진 혈석.

마치 보석과도 같이 은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실험을 해 봐야 하는데.”

적혈강에는 인간의 피를 정화하여 독성을 죽이는 효능도 존재하였다. 그렇기에 수많은 인간의 피를 뽑아 단전으로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피는 같지 않으니까.

황극린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동굴 속에 급조하여 만든 감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조향령.”

“네, 넷……!”

“나와라.”

“네넵!”

쫄래쫄래 나가는 모습에 암천파의 이태경과 지옥진군이 눈을 흘겼지만, 감히 황극린 앞에서 뭐라 말하지는 못했다.

밖으로 나온 조향령이 황극린의 눈치를 살핀다.

그녀의 입장에서 황극린은 악(惡)과 마(魔)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이태경과 지옥진군은 그나마 다행인 것이, 뇌정 폭풍에 있는 무한히 많은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했다. 그냥 칼날 폭풍에 휩쓸려 갔을 뿐이다.

하지만 조향령은 그것을 모두 보았다.

마경에 처음 발을 디딘 황극린조차도 그 폭풍을 마주하고 죽음을 각오했을 정도였으니 조향령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리라.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극복한 것을 보니 그녀도 정신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네게 제안할 게 있다.”

“제안… 말입니까?”

조향령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간다.

설마 뇌정 폭풍의 먹이로 쓰려는 건 아니겠지? 그것도 아니면…….

“월영문의 문주들이 대대로 저주에 걸린다는 걸 알고 있다.”

“……!”

저주.

체질이라고도 한다.

월영문의 문주는 일정 나이가 되면 기억을 조금씩 잃어 간다. 그리고 몹시 잔인하고 흉포하게 변해 간다. 북해빙궁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처럼 피를 이어받은 모두에게 이어지는 건 아니다.

월영문주의 피를 이어받은 단 한 명만이 그러한 저주를 이어받는다.

황극린이 남궁세가의 창천뇌검 제거의 임무를 받기 전, 거의 마지막 임무가 월영문의 의뢰였으니 기억하고 있다.

당시 문주 대행이었던 소문주 조향령은 직접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고 흑살문에 의뢰를 맡겼었다. 그리고 문주가 될 조향령 또한 그녀의 아버지처럼 기억을 잃고 마인(魔人)의 길로 들어설 운명이라 할 수 있었다.

황극린은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것을 고민했다.

회생비록.

그것이 뜻하는 건 간단했다. 천형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그러한 교훈을 남기는 짧은 설화가 황극린이 가진 회생비록에 담겨 있다.

다만.

황극린이 가진 피는 흑주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었다. 인면지주라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 것이다. 황극린의 피라면 저주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혈석으로 정제된 그의 피라면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네 기억은 어디까지지?”

“거기까지 알고 계시는 것이군요. 제 기억은 열 살 이후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조향령은 마치 신선이라도 보는 듯 존경을 담아 황극린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체질을 모두 물려받았지요. 그것을 극복하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여기까지?”

“예, 혈마교에선 저희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저주를 극복할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했었지요. 월영문이 혈마교를 따르는 건 모두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무공이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무림에선 ‘저주’라고 생각할 만큼 비참한 체질을 타고나는 이들이 많았다. 일례로 절맥증을 앓아 죽을 운명이었던 비청하가 있었다. 물론 그가 앓고 있던 것은 구음절맥과 같은 불치병은 아니었지만, 상단에서 약재를 검수하던 노인의 손자로 태어나서는 절대 극복하지 못할 운명이었다.

만약 그에게 절맥증을 치료할 수 있는 무공을 어릴 때부터 익힐 수 있었던 환경이 존재했다면.

비청하와 황극린의 인연은 만들어지지 않았으리라.

아무튼.

절맥증이나 타고난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많다. 그렇지만 월영문의 문주들이 이어받는 고질병이자 저주는 그들의 재력과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본래 정파 소속이었던 월영문이 혈마교와 손을 잡아야 할 만큼 말이다.

“그러한 저주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저, 정말입니까?”

“하나, 확실하지 않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나는 네게 선의를 베풀려는 게 아니다. 단지 내가 가진 것의 힘을 실험하고 싶을 뿐이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설명해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조향령의 목숨이 황극린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흑살문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혈고독을 강제로 주입하고 절대 문파를 배신할 수 없게끔 했다. 만약 상황이 잘 풀린다면 월영문은 만뇌문의 휘하 문파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만약 그러한 길이 있다면, 목숨을 걸어 보겠습니다. 어차피 그 폭풍에서 저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향령은 진심이었다.

“좋다. 그럼 이걸 먹어 보도록.”

“이건…….”

황극린이 만든 혈석이었다.

물론, 하나를 통째로 주진 않았다. 반의반으로 쪼개어 조향령에게 준다.

“참으로 영롱합니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말입니다.”

“혹시 모르니 영약을 취하는 것처럼 운기행공을 해야 할 것이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조향령은 가부좌를 튼 후, 혈석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동시에 그녀의 육신 전체에서 핏줄이 불쑥 튀어 올라왔다.

“읍……!”

* * *

‘설마 저 귀한 것을……!’

멀찍이 나무 사이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계빈이었다. 적혈강을 알려 준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혈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만든 혈석을 저런 계집에게 선사한다. 애초에 혈석을 취할 수 있는 건, 적혈심법을 익힌 이들일 뿐인데 말이다.

계빈이 콧김을 내뿜으며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 가라.

황극린의 전음이 들려왔다.

잘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발각된 모양이었다.

- 나도 하나 줄 수 있나?

- 네 것이 있을 텐데?

- 그건 나중에 아껴 먹으려고…….

- 가라.

매몰찬 황극린의 전음에 계빈은 결국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황극린이 준 물주머니를 끌어안은 채로 말이다.

* * *

한 달이 지났다.

황극린은 회계산의 비동에 머물며 많은 것을 실험했다.

마경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을 만뇌문의 진에 적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제갈소희와 육금연이 합동으로 연구하였기에 꽤 성과가 나왔다. 두 사람은 진법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걸 알아냈다.

“기억이… 기억이 돌아왔습니다.”

황극린의 피로 만든 혈석.

네 조각 중 하나를 취한 조향령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일정 나이가 되면 주화입마에 걸린 마인으로 돌변한다. 과거부터 기억이 점점 사라져 종국에 월영문의 문주는 자신조차 잊게 된다.

그러한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말이었다.

“다른 이상은 없는가?”

“그게…….”

조향령이 묘한 얼굴을 했다.

“왜인지 몸이 무거워진 것 같습니다.”

“무거워졌다고?”

“예.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감각이 둔화된 것 같다고 할까요? 황 대협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우습게 보이시겠지만… 월영문에선 천재라고 불렸었습니다. 그만큼 또래보다 훨씬 뛰어난 육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최소한 삼 할 정도는 떨어진 것 같습니다. 내력을 다루는 것도 예전 같지 않고요.”

황극린이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품속에서 회생비록이 느껴진다. 황극린이 가진 회생비록에서는 태양을 마주하면 피부가 타들어 가는 소년이 공령신체를 타고나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무재를 자랑했었다고 했다. 물론, 이야기의 끝에선 허무하게 태양의 빛에 타 죽고 말았지만 말이다.

‘제약이라.’

평범한 인간 중에서도 제약으로 무언가를 얻는 일들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맹인 악사가 있다. 눈을 파내면 청각이 발달하여 일부러 부모가 자식의 눈을 파내는 경우가 있었다. 명망 높은 악사로 키우려는 지독한 부모들은 무림에 퍽 많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위대한 악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눈이 있는 것보다는 평균적으로 악사로서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어떠한 저주가 있다면, 반대급부로 다른 재능이 개화한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저주가 그러한 것이 아닐까?

황극린이 조향령을 바라본다.

“혈석을 취한 것을 후회하는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좋습니다. 무위가 약해졌지만… 역대 문주께서 밟았던 길을 밟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리고 무위가 떨어졌다면 그만큼 더 노력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긍정적인 발언이다.

넉넉잡아서 삼 할 정도 육체 능력이 하락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꽤 체감되는 것일 텐데도, 조향령은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변화가 느껴진다면 만뇌문에 서신을 보내도록 해라.”

“예, 그러하겠습니다.”

황극린은 조향령과 조금 더 대화한 후 밖으로 나섰다.

만월이 대지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은은한 흙의 내음이 황극린의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내게도 저주가 있을까.’

그의 삶은 전생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영약을 취하여 체질이 바뀌는 것부터 시작하여 전생에 없던 재능을 개화했다. 화경의 경지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일찍 무공을 익혔다면 겨우 말년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경지를 말이다.

하늘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다.

최근 저주라는 것에 걸려 허우적대는 인간들을 보고 있으니 불안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저주에 걸리면 반대급부로 압도적인 재능을 얻는 이들이 있다.

북해빙궁의 궁주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하늘의 축복을 받은 황극린은 과연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황극린은 고민하지 않고 회생비록을 꺼냈다.

“어쩌면 이걸 쓴 놈은 뭔가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다른 회생비록을 더 찾아봐야겠어.”

황극린은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돌파한다.

그는 단전이 깨진 채 무림맹의 척살대에 쫓기면서도.

희망을 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떠한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왔을 뿐이다.

현재에 이르러서 그러한 신념이 달라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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