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43화 (243/316)

243화 친우

혈마교주 혈황마제의 전투.

그가 가진 어둠은 황극린이 가진 뇌전의 빛을 빨아들였다. 황극린이 가진 뇌전은 상성이 거의 없었지만, 혈황마제와의 싸움에서는 약점이 드러났다. 아니, 그것은 혈황마제의 무공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황극린은 떠나가는 혈황마제를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수확이 있군.’

절대고수의 무공을 견식하는 건 쉽지 않았다.

특히 혈황마제가 누군가? 혈마교의 수장이자 천마라고도 불리는 존재. 만약 그와 싸우기 위해서 혈마교로 찾아간다? 그에게 닿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이제껏 마교가 수없이 중원에 혈겁을 일으켰음에도 그들이 무사한 이유가 무엇인가?

십만대산은 천혜의 요새다.

다르게 말하면 마경이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

황극린은 그의 무공을 보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 북해빙궁의 궁주와의 싸움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궁극적으로 무공이란 스스로와의 싸움이 맞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을 배척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가진 내공의 냄새. 잘 기억해 놨다.’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왜인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천화련의 대공자이자 소련주인 계빈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성장한 듯하다. 그리고 그가 용왕궁주로 추정되는 여인과 싸우면서 보여 준 무공은…….

“천화련은 혈마교의 무공을 익힌 건가?”

“아, 이것 말인가?”

마치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미소를 머금은 계빈. 그의 검에서 어둠이 출렁였다.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연료로 삼아 어둠이 더욱 거세게 요동친다.

대단히 효율적인 무공이었다.

“암천성휘라고 한다네.”

“그런 이름이었군.”

“멋지지 않나? 찬란한 빛을 빨아들이는 힘을 가진 강기라네. 소위 무림인들이 만들어 내는 강기와 검강은 모두 암천성휘에게 잡아먹히고 말지. 이것을 유일하게 상대할 수 있는 게 바로…….”

“소련주님?”

평소 과묵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주절주절 떠드는 계빈의 모습에 천화련의 장로 계우군이 제지한다. 황극린이 뭐라고 저렇게 다 알려 주는 건가? 절친한 친우라고 했던가?

‘분명 소련주님을 납치했던 놈인데.’

계빈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계우군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혈황마제와 끝장을 볼 줄 알았는데, 중간에 싸움을 멈추기까지 했다. 어쩌면 만뇌문은 혈마교와 모종의 합의가 된 것이 아닐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우리를 죽였을 것이다. 그럼 무슨 이유로 전투를 멈춘 건가? 혈황마제는 왜 우리를 놓고 여우 가면을 쓴 여인을 데려갔는가?’

계우군이 입을 연다.

“여우 가면의 정체는 뭐지? 혈황마제와 무슨 대화를 했길래…….”

“어허, 칠장로. 내 친우에게 뭣 하는 짓이오?”

계우군이 입을 달싹인다.

- 소련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놈은 적이 아닙니까? 련주님의 명령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 칠장로가 착각하고 있군. 련주님의 명령은 황극린을 잡아 오라는 게 아니었소.

- 예?

천화련주 계양의 말을 돌이켜 본다.

그가 무슨 말을 했었지?

- 회계산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라고 했었소.

소련주의 전음에 계우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황극린을 잡아 오라는 명이 아니었다.

- 알겠습니다. 소련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나, 위험한 놈이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 위험을 감수해야지만 나란히 설 수 있는 자요.

- …….

계빈이 앞으로 나선다.

“잘 지냈는가, 친구?”

“보이는 것처럼.”

황극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주위로 시체가 널려 있었다. 물론 살아 있는 이들은 있었지만,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월영문의 소문주는 무사했지만, 기절한 상태였다.

“대단하군. 어떤 무공을 썼길래 이런 장관을 만들었는가?”

장관이라.

황극린은 계빈의 성격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서는 뭔가 순수한 면모를 보이지만, 그 순수함이 다른 인간이 보기엔 잔인함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어린아이가 웃으면서 곤충의 몸을 뜯어 버리는 장난처럼 말이다. 계빈에겐 널려 있는 시체들이 그런 장난감에 불과하리라.

뭐, 그의 성격 따위는 황극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암천성휘라고 했던가?”

“후후후, 자네도 궁금한 게 있는가 보군. 알고 싶나?”

“그래.”

무심한 황극린의 말투에 약간 실망한 듯 입술을 삐죽인 계빈.

하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좋아. 알려 주지.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나?”

“그러지.”

“저놈들을 감시하라고 할까?”

“괜찮다.”

황극린이 뒤를 돌아본다.

어느샌가 육금연과 제갈소희가 다가와 있었다. 소란이 일어나고 동굴에 숨어 있었지만, 혹여나 황극린을 도울 것이 있을까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저들을 감시해 주시오.”

“알겠어요.”

제갈소희가 빠르게 움직인다. 주변의 참상을 보고도 눈 하나 끔뻑하지 않는 모습이다. 육금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계빈을 보고 조금 긴장한 듯하다.

“으음, 여인들을 거느리고 다니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

천화련에서도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 온 계빈이었다.

“무(武)를 수행함에 있어서 여인이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네. 자네는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고 있지 않나?”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군.”

“…….”

굳이 마경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할 필요는 없었다. 황극린이 두 여인에게 부탁한 후, 몸을 돌린다.

“안 갈 건가?”

계빈이 후다닥 황극린을 뒤따라갔다.

* * *

“이런 이야기는 아무한테나 하는 게 아닌 걸 알아주게.”

“그래.”

애초에 계빈이 하는 말을 전부 믿을 것도 아니었다.

“암혼성휘는 혈마교의 무공이 맞다. 정확히는 마교의 무공이었지.”

“그런가.”

“본련의 개파조사께서 그들에게서 약탈한 거지.”

딱히 비난할 생각도 없었다. 원류의 무공이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정파에서는 그런 것을 많이 따지는 편이다. 만약 들통난다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만큼 말이다.

“애초에 자네의 무공으로 그것을 상대했다는 게 놀랍더군. 빛을 발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어둠을 다루는 무공이라네. 구결을 자네에게 전부 알려 줄 수는 없지만…….”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계빈이다.

“암천성휘를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은 적혈강인가?”

계빈은 딱히 놀라워하지 않았다. 친우라면 당연히 예측하리라 생각했다. 그런 게 친우 사이의 신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네.”

“그건 혈교의 무공이 아닌가?”

“비슷하긴 하지. 피를 다루는 무공이야 솔직히 중원에도 꽤 있으니까. 다만, 본련의 적혈강은 다르다네. 어둠에 집어삼켜지지 않는 특성이 있지. 후후.”

황극린은 혈마교와 천화련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관련이 깊다는 걸 알아차렸다. 현시대가 아닌 과거의 악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떻게 암천성휘를 상대했는가? 보통 인간도 아니고 혈황마제라니.”

계빈도 숨김없이 말해 주는 것 같으니 황극린도 적당히 어울려 줄 필요는 있었다. 그에게 궁금한 것은 암천성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뇌전이라도 같은 뇌전이 아니다.”

“음?”

“같은 색, 같은 모양을 가졌더라도 속은 다를 수가 있지. 굳이 비교하자면… 네 쌍둥이 여동생과 너는 똑같은 무공을 익혔지만 다르지 않은가?”

계빈은 심오한 표정으로 황극린의 말을 곱씹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네의 뇌전은 특별하단 말이군.”

“더 특별해질 수도 있겠지.”

황극린도 계빈과의 대화를 통해 오늘 전투를 상기한다.

그가 보여 준 것 중에서 가장 특별했던 것은 흑염(黑炎)이었다. 보통 불꽃은 붉거나 노랗다. 연기가 검을 때는 있지만, 불 자체가 검은 경우는 없었다.

상식(常識)과는 어울리지 않은 현상이다.

내공이라는 것은 자연 그 자체를 담으며, 자연을 흉내 낸다. 뇌불이 혈풍뇌전신공을 창안한 이유는 대반야금강공을 보며 깨달은 심득 때문도 있었지만, 하늘을 가르고 거목(巨木)을 박살 내는 벼락을 보고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너희는 왜 회계산으로 왔지?”

황극린의 날카로운 시선에 계빈이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자네와 싸울 생각은 아니었다네.”

“여기에 얻을 것이 있어서인가?”

“아니. 련주께서는 그런 말씀은 없으셨다네. 단지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라고만 하셨지.”

“련주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이로군.”

“흔치 않은 일인데 말이야.”

“그래서 이제 돌아갈 건가?”

“지금? 아니지. 혹시 또 모르지 않나? 혈황마제가 다시 찾아올 수도 있고. 내가 있는 게 자네에게도 좋지 않나?”

“…….”

친분을 쌓으면 얼마나 쌓았다고 저리 말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딱히.”

“…….”

계빈 또한 저리 매몰차게 말하는 황극린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친우로 생각하지 않는 건가? 내 실력이 모자라서? 아니면 천화련의 소련주라는 신분 때문에?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 황극린이 물었다.

“흑주에게 무슨 일이 생겼었지?”

“응?”

“뇌옥에서 본 인면지주.”

“아! 그놈!”

계빈이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네가 뭘 했구나.”

“아니! 아니라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놈이 내게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

“아, 그게 말일세…….”

계빈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 나간다.

“피로 혈석(血石)을 만들었다네. 신선한 피를 공급 받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고안한 방법이지.”

천화련에선 인간의 피로 내공을 쌓는다고 했던가.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피를 마시기도 한다. 내공을 위한 게 아니라, 인간들이 먹는 음식처럼 말이다. 다만, 계빈의 여동생 계지향은 인간의 피가 아니라 동물의 피를 마셨었다.

“누구의 피지?”

“그건.”

“내 피로군.”

“그렇다네.”

황극린이 생각한다.

그의 피가 변화한 것은 어쩌면 성수신의가 만든 영약 취수혈정(聚髓血精)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취하고 회복 능력이 극대화됐으니 그의 피에도 그런 힘이 깃들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계빈의 말을 들어 보니 아닌 듯하다.

궁극적으로 황극린의 피는 모종의 ‘힘’이 깃들어 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이 말이다.

“그래서 자네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네.”

한껏 무게를 잡은 계빈.

무슨 말을 할지는 얼굴에 다 쓰여 있었다.

“피를 나눠 달라는 건가?”

“오, 가능한가?”

“아니.”

당연히 허락할 수 없었다.

만약 황극린의 피가 ‘영약’처럼 힘이 깃들어 있다면.

황극린의 내공을 나눠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최근 마경에서 뇌정 폭풍에 많은 피를 흘리고 느꼈다. 회복 능력은 무한하지 않았고, 그의 피에 깃든 힘도 과하게 소모하면 위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계빈으로선 당시 황극린이 흘린 피로 만든 혈석을 영물 따위에게 빼앗긴 것이 참으로 원통했다. 그렇다고 친우의 피를 강제로 강탈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그의 힘으로는 강제로 황극린의 피를 가져갈 수도 없겠지만.

“거래라면 가능하다. 물론, 많은 양은 안 된다.”

“거래?”

“그래.”

황극린이 계빈에게 원하는 것.

뭐 단순한 정보라면 계빈이 술술 털어놓겠지만, 그로서도 쉽게 내어 주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내 피를 혈석으로 만들 수 있었던 무공.”

“……!”

“그게 적혈강이겠지?”

“그건 불가능하다.”

다 퍼 줄 것 같던 계빈이었지만, 천화련의 절기를 알려 줄 수는 없었다.

“알겠다.”

“그러니까… 응?”

구구절절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려던 계빈이었다. 하지만 황극린이 대수롭지 않게 수긍하자 몹시 당황스러웠다. 뭐지? 적혈강을 크게 원하지 않는 건가? 그냥 물어본 건가?

“그럼 일어나도록 하지.”

“뭐? 벌써?”

황극린과 할 이야기가 많았다.

폐관수련을 하며 깨달았던 것이나 현 무림의 정세 그리고 훗날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대화하려 했다. 그런데 황극린은 그런 미련도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보게! 잠시만 멈춰 보게!”

계빈이 떠나가는 황극린의 뒤를 허겁지겁 쫓았다.

* * *

“검후가 그런 깜찍한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것을 알면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구나.”

“…왜 황극린을 놓아준 거지?”

여인이 여우 가면을 벗었다.

검후라 불린 여인.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지만 그녀의 실제 나이는 보이는 것보다 배 이상은 많았다. 혈황마제의 입장에선 딱히 감흥도 없었다. 반로환동이야 아주 오래전에 이룬 작은 성과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

“놓아줬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니라는 건가?”

여인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남 좋은 일은 하기가 싫어지거든.”

“네놈도 많이 달라졌군.”

“인간은 원래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혈황마제의 눈에서 검붉은 안광이 번뜩인다.

“그런데 장난이 심하더구나.”

검후라 불린 여인이 움찔한다. 당당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항시 혈황마제의 손과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든 그가 공격하면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장난이라고?”

“정본(定本)이라 듣고 왔는데 말이야.”

“난 네놈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정본이 맞다. 중요 구절이 담겼을 것이다. 서문세가의 서문륭이 그것의 도움을 받아서 반로환동의 경지에…….”

“그건 정본이 아니다. 서문륭이 어떤 아해인지 모르겠지만, 황극린이 가진 것을 보고 반로환동을 했다면 지나가는 새를 보고서도 반로환동에 이르렀을 것이다.”

“개소리도 정도껏…….”

뚜벅.

“……!”

여인의 얼굴이 굳는다.

일순 세상이 휘어지는 듯하다. 아니, 혈황마제의 주위로 어둠이 일렁거려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황극린은 이런 혈황마제와 잠시나마 대등하게 겨뤘다는 건가?

아니, 황극린이 그러한 경지에 올랐을 리 없다. 혈황마제가 적당히 해 준 탓이 분명하다.

여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발버둥 쳐도 네 아들은 운명을 극복하지 못할 거다. 진정한 의미로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니.”

혈황마제는 그게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진정한 기세를 마주한 여인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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