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문답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며 황극린은 혈마교주를 응시했다. 절대자의 여유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혈마교도들이 학살당한 현장에서도 분노의 감정 따위는 엿볼 수 없었다.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혈마교도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황극린이 알기로 혈마교는 천화련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된 집단이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혈마교 중에서도 혈교 출신들이 더 극성이다. 그것은 혈족을 해한 천화련에 대한 복수다. 혈마교주 혈황마제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까.
사실 혈마교와 천화련이 충돌했다는 소식은 207호 시절 황극린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천화련주나 혈마교주가 정면으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물론, 그런 소문이 무림맹에 쫓기던 황극린에게 들려오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로군?”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혈황마제가 묻는다.
“천형을 감내하고 있는가?”
“아니.”
“그런데 왜 저주를 해소할 수 있는 영약을 찾는 건가?”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
“으음.”
혈황마제가 턱을 쓰다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온 목적이 뭐지?”
“천화련의 장난질에 잠시 어울려 주러 왔단다.”
장난질이라?
어쩌면 혈마교와 용왕궁이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혈마교주는 천화련의 장난질이라 말했다.
“저주를 해소할 영약을 왜 찾는 거지?”
“그걸 찾는 건 아니다.”
“그런가?”
거짓을 간파하려는 듯이 검붉은 눈동자가 황극린을 훑는다. 물론, 그것만으로 진실을 가려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서로가 거짓을 고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구별할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잠깐의 유흥에 불과할지도.
“당신의 진짜 목적이 뭐지?”
“진짜 목적?”
“무인으로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나?”
“허허허.”
황극린의 질문에 혈황마제가 즐겁다는 듯이 웃는다.
“무인으로서… 그래, 예전에는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마(魔)를 가까이할수록 인간의 감정은 흐려지기 마련이란다.”
황극린은 혈황마제가 답변을 피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히 목적이 있다. 천화련의 장난질에 신강에서 여기까지 달려올 정도로 한가한 인간은 아니리라. 회계산에 무언가를 찾으러 온 것이 분명하다.
‘마경이라는 말에는 혈마교주는 침묵했었지.’
그것과 연관이 있을까?
그는 십만대산의 마경에서 수련을 한다고 했었다.
“이제 내 차례로군. 이곳에서 살아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혈마교주의 목소리엔 어떠한 적의나 경계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보고 장난을 치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질문했을 뿐이다.
“물론이지.”
“후후, 요즘 아이들은 참 겁이 없다니까.”
“천화련이 무슨 장난질을 쳤다는 거지?”
“회계산에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이 있다더군.”
황극린은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혈황마제가 원하는 것이 용왕궁과 같다면.
“회생비록 말인가?”
“마경에서 손에 넣은 것인가.”
“그건 아니고.”
“그렇군. 너도 회생비록을 찾고 있었는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 혈황마제가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납득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것이 도움이 되던가?”
“딱히.”
“그렇군. 곁가지를 가지고 있을 뿐인가?”
그의 말에 황극린은 하나를 알아냈다.
회생비록이라는 건 이미 알려져 있다. 인형혈삼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혈황마제는 딱히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회생비록에 대하여서는 아는 눈치였다. 거기다 곁가지라고 하지 않은가? 황극린이 가진 회생비록은 짧은 설화일 뿐이었다. 비슷한 회생비록이 여럿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내용이 담긴 회생비록엔 무엇이 쓰여 있을까?
혈황마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용왕궁에서도 희생을 감수하고 차지하려 했었다.
“회생비록이 왜 필요한 거지? 천하제일의 무공 구결이라도 쓰여 있나?”
“그럴지도 모르지.”
“모르면서 그걸 찾고 있는 건가?”
“회생비록을 찾는 게 아니다.”
“그럼 뭘 찾는 거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진정한 자유를 찾는 거지.”
진정한 자유?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려 했다. 결국 저주와 관련된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슬슬 그만두도록 하지.”
짧은 문답 시간은 끝이 난 모양이다.
황극린에게 회생비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혈마교주는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마경이 있다? 직접 확인하면 그만이다. 회생비록이 곁가지인가? 그것도 읽어 보면 그만이었다.
“원망하지 말아라. 피식자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건 당연한 일이니.”
혈황마제가 사라졌다.
아니, 순식간에 이동하여 황극린의 앞에 도착했다.
“네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황극린은 혈황마제가 손을 휘두르는 순간, 그의 육신 전체에서 검붉은 핏줄이 꿈틀거리는 걸 보았다.
* * *
“이건 대체…….”
천화련의 소련주.
또래 중에서도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고 알려진 계빈이 얼굴을 굳혔다. 회계산에서 들려오는 굉음은 예사롭지 않았다. 천둥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으며, 무언가 타는 냄새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계빈과 함께 회계산으로 온 천화련의 장로 계우군도 단단히 긴장한 얼굴이었다.
“최소 부교주급입니다.”
“알고 있다네. 가지!”
“예, 따르겠습니다.”
계빈이 앞서 나간다.
어둑해진 밤. 계빈은 어둠 속에서 더 강한 힘을 낼 수가 있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천화련의 무인들이 계빈의 뒤를 따른다.
‘황극린, 너는 내 숙적이니 당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계빈은 황극린을 숙적으로 여겼다.
재미없는 무림에서 황극린이라는 존재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그와의 격차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계빈은 스스로의 재능을 믿었다. 천화련주에게 물려받은 압도적인 재능을 말이다.
그렇게 천화련의 무인들이 도착한 회계산의 중턱.
계빈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쿠릉!
뇌전이 공간을 갈랐다. 그리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정확히는 빛을 빨아들이는 어둠이 뇌전을 삼켰다. 계빈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것을 어찌 모를 수 있으랴?
‘암천성휘(暗天星輝).’
천화련의 련주이자 그의 아버지인 천도옥황(天道玉皇)의 절기 중 하나였다.
그것이 어찌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가?
계빈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놀랐다. 천하제일인, 아니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아버지와 비교해도 이질감이 없었다.
“소련주님, 저것은…….”
장로 계우군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분명하다. 저놈이 혈마교주다.”
“혈마교주라니……. 미끼를 제대로 물었군요. 저런 대어가 낚일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좋아해야 할 상황은 아니다.
천화련과 혈마교는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였다. 만약 황극린이 패배한다면? 혈마교주를 그들끼리 상대할 수 있을까? 계빈과 계우군 그리고 천화련의 최정예들이라면 황극린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출정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황극린은 그 무시무시한 혈마교주와 정면으로 맞붙고 있었다.
쿠르으응!
또다시 뇌전이 공간을 갈랐다. 하지만 암천성휘는 ‘빛’을 발하는 모든 것에 상성으로 작용한다. 검은 먹구름과 같은 강기가 뇌전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도와줘야 한다.”
“예? 누굴 말입니까?”
“황극린.”
아직까진 두 사람의 무위가 비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한들 황극린이 혈마교주를 꺾을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조금 부족한 자의 손을 잡아 주는 게 나으리라.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 조금만 더 지켜보고 나서는 것도…….”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왜인지 계빈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감히 내 친우를!”
“아, 그렇군요. 친우를… 예……?”
그렇게 천화련의 소련주가 앞으로 돌진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직은 안 된단다.”
여우 가면을 쓴 여인.
청색의 무복을 입었으며, 천화련의 무인들 앞에서도 당당히 허리를 펴고 있었다. 그녀에 손에 들린 검에서 새하얀 검강이 일렁이고 있었다.
“혈마교도인가?”
여우 가면은 가만히 계빈을 응시하다가 말한다.
“이이제이(以夷制夷).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지 않겠니?”
“혈마교도는 아닌 모양이로군.”
“두 문파가 몰락하길 바라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래? 그럼 우리의 적이로구나.”
계빈의 당당한 말에 여우 가면이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그런데 너는 황극린과 친우라고 했나? 내가 알기로 천화련과 만뇌문은…….”
“진정한 우정에 소속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 주마.”
계빈이 앞으로 돌진한다.
평소 여유롭고 근엄한 계빈의 모습과 달리 잔뜩 흥분한 소련주를 보며 계우군이 당황했지만,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죽여라.”
여우 가면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천화련과 의문의 세력이 맞붙는 순간, 계빈과 여우 가면도 충돌했다.
카아앙!
“이게 적혈강(赤血?)인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아니. 적혈강이 아니다.”
“……!”
계빈의 검에서 일렁이던 붉은 강기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암천성휘지.”
“……!”
혈마교주가 사용하는 빛을 빨아들이는 강기. 여우 가면이 쥔 검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백색의 검강이 순간 빛을 잃었다. 균형이 깨어진 것이다. 단전에서 내력이 빠져나가는 것에 놀란 여우 가면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구나.”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몸을 가로막은 대가는 죽음뿐이다.”
계빈의 살심이 폭주했다.
‘얼른 이 여자를 족치고 구해 주마!’
계빈은 필승의 각오를 다지고, 이제껏 폐관으로 얻었던 모든 것을 펼치기 시작했다.
* * *
“제법이로구나.”
혈마교주는 오연하게 서서 황극린을 바라본다.
그의 몸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어둠. 황극린의 뇌전은 그것을 완전히 뚫어 낼 수 없었다.
‘상성이라.’
그렇다고 해도 저 어둠을 뚫어 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긴 했지만, 황극린은 굳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건 혈마교주도 마찬가지였다.
“천화련의 아이가 재밌는 소리를 하더구나. 저 아이와 친우더냐?”
친우?
납치했다가 풀어 준 게 친우가 될 수가 있나? 황극린은 혈마교주와 거의 똑같은 것을 펼치며 싸우는 계빈과 여우 가면을 바라보았다.
“친우가 아니다.”
“후후후, 그래. 그렇게 말하는 게 진짜 친우지.”
“…….”
혈마교주는 무엇이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진짜 즐거움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할까?”
“괜찮은가?”
“뭐가 말이더냐?”
“내가 혈마교도를 죽였는데?”
“피식자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건 자연의 섭리지. 그것을 가지고 분노한다면 세상 전체를 파멸할 때까지 분노를 표출해야 하지 않겠는가?”
퍽 철학적인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황극린은 그리 공감하지 못하는 발언이었다. 만약 만뇌문도가 당했다면 황극린은 분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천화련주가 원하는 대로 어울릴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지.”
혈마교주가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천화련의 수작질 때문이었다.
“회생비록에 대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겠느냐?”
황극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혈마교주에게 대충 내용을 요약해서 들려준다. 혈마교주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듣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역시 곁가지였군.”
“곁가지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하지?”
“너라면 읽자마자 알 수 있을 거다.”
혈마교주가 뒷짐을 지고 신형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계빈과 여우 가면이 한창 싸우는 곳이었다. 비등비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계빈은 객잔에서 싸웠을 때보다 훨씬 더 성장해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놀라운 발전이다.
‘그러고 보니 놈에게 물어볼 게 있었지.’
놈을 뇌옥에서 내보내고 흑주가 급격히 성장했었다.
자신의 피 때문이라는 것을 대충 알게 되었지만, 그의 피는 약이 아니라 결국 독으로 작용한다. 계빈에게 확실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황극린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려고 할 때였다.
“한 명씩 데리고 가자꾸나.”
“무슨 의미지?”
“가면을 쓴 아이는 오늘 죽지 않아야 하니까.”
“…용왕궁과 관련이 있나?”
“작은 인연이 있긴 하지.”
용왕궁은 언젠간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계빈과 용왕궁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전자였다. 그에게 얻어 낼 것이 더 많을 것 같았다.
“…….”
어느 순간부터 전투를 멈춘 계빈과 여우 가면.
그들도 황극린과 혈마교주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음번엔 더 날카로운 뇌전을 벼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잡아먹힐 것이니.”
스치듯 조언하며 혈마교주가 여우 가면에게로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