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만마앙복
“허어억! 허억……! 우에에엑!”
월영문의 소문주 조향령은 쉴 새 없이 배 속에 든 것을 쏟아 냈다. 더 이상 게워 낼 것이 없지만 토악질을 멈추지 못했다. 손발이 떨리고 제대로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다. 지금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하다.
심연(深淵).
인간은 상상하지 못할 수준의 괴이한 무언가와 마주한 경험은 조향령의 정신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몸에 상처가 없다는 점이랄까. 그녀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황극린의 아주 작은 배려였을 뿐이다.
물론, 그것이 배려가 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말이다.
“우에에엑-!”
진득한 피 냄새가 공간을 물들였다.
툭, 투투툭!
인간의 장기와 거칠게 잘린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가 바닥에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황극린이 서 있었다.
‘확실히 써먹기 좋긴 한데.’
황극린이 인상을 찌푸린다.
뇌정 폭풍은 황극린도 완벽히 다룰 수는 없었다. 그 공간에 대한 이해가 높았지만, 온전히 이해한 건 아니다. 뇌정 폭풍은 인간의 생기를 그대로 삼켜 버렸다. 황극린의 천노뇌정을 바탕으로 성장한 작은 폭풍이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가 되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을 그대로 포식했으니 폭풍의 위력이 더 강해진 것은 당연하다.
애초에 모두 전멸할 생각은 없었기에 황극린은 적당히 출구를 열어 생존자들을 ‘방출’했다.
그 과정에서 꽤 많은 심력이 소모됐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 관자놀이를 두어 번 주무르자 고통이 무뎌진다.
“세 명인가.”
살아남은 인간 수.
월영문의 조향령.
암천파의 이태경.
마지막으로 혈마교의 지옥진군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 육신을 보호하려 했다. 폭풍에 휩쓸린 상황에서 하기 힘든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황극린이 그들을 방출하지 않았다면 모두 죽어 뇌정 폭풍의 멋잇감으로 전락했을 뿐이겠지만 말이다.
“월영문의 조향령, 맞나?”
움찔!
조향령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황극린과 조향령은 먼 과거… 아니, 미래에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황극린이 207호로 활동하던 시절 만난 의뢰인 중 하나였다. 실전에 나서는 살수가 의뢰인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녀는 월영문의 문주를 죽일 살수와 꼭 대화하고 싶다고 흑살문에 의뢰했었다.
딱히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는 여인이다.
단지, 그나마 최근의 살생 의뢰라 기억이 났을 뿐. 만약 그녀가 폭풍에 휩쓸려 갔다면 굳이 구해 줄 필요도 없었다. 마지막 순간 멀쩡한 인간은 있어야겠다고 판단했을 뿐.
“조향령.”
“네, 네에……?”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조향령이 대답한다.
그녀가 보기에 황극린은 그 미친 폭풍을 다루는 괴물이었다. 그것과 다시 마주하지 않으려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두 사람을 데려와서 지혈하도록. 가만히 두면 죽겠군.”
“네, 네… 알겠습니다.”
조향령이 급히 움직였다. 지옥진군과 이태경을 데려와서 지혈한다. 지옥진군은 오른팔이 날아갔으며, 이태경은 찢겨 나간 부위는 없었지만 마치 호랑이의 발톱에 수십 번 베인 듯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끄으윽!”
“커억……!”
황극린이 조향령을 바라본다.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해 보도록.”
“알고 있는 것……. 제가 아는 건… 그게 그러니까…….”
혼란스러운지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아는 게 없나?”
“아, 아닙니다! 혈마교주! 혈마교주가 올 거라는 말을…….”
“혈마교주?”
황극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분명히 신강성에 있었으리라. 그런데 여기까지 황극린을 찾아온다고? 혈혼단을 거의 끝장내고 부교주까지 족쳤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던 놈이다. 그런데 왜 움직였을까?
‘마경 때문인가.’
애초에 회계산에 마경이 있다는 건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배교의 육금연도 회계산에 천하제일의 무공서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며 찾아왔다. 뭐, 아니면 용왕궁의 배후가 혈마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찌 됐든 황극린에게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다.
황극린은 조향령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아쉽게도 그녀가 알고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혈마교의 부름에 답하여 이곳에 당도했을 뿐이었다.
“저는… 저는 꼭 살아서… 부탁드립…….”
더 이상 대답할 게 남아 있지 않은 조향령이 살기 위해 황극린에게 빌었다.
“일단 자고 있어라.”
툭.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던 조향령의 표정이 평온으로 물들었다. 인간에게 잠이란 만병통치약이라고 하지 않던가? 한숨 자고 일어나면 정신을 차릴 수 있으리라.
그는 지옥진군과 이태경의 앞으로 갔다.
지옥진군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었지만 황극린에게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뇌정 폭풍과 마주했으면서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썩 대단하긴 했다. 혁시 혈마교의 정예라 할 수 있다.
황극린은 먼저 이태경의 옆에 섰다.
그는 죽은 듯이 축 늘어져 있었지만, 조향령과 대화하는 중 그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바뀐 것을 알아차렸다.
“기절한 척은 그만두지.”
“…….”
황극린이 바로 옆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태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태경도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다.
뚜두둑!
황극린이 그의 손가락을 밟았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태경은 참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끄아아악! 그만! 그마아안!”
“이제 정신을 차렸나?”
“내게 뭘 원하는 건가? 나는 혈마교의 부름에 답했을 뿐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살려 다오. 살려 준다면 암천파의 보물을…….”
“암천파의 보물 따위는 관심 없다.”
“그럼 뭘 원하는 거지?”
“네가 아는 것 전부.”
“그건…….”
슬쩍 지옥진군의 눈치를 보던 이태경이었지만, 다음 손가락을 밟으려고 기다리는 황극린의 발을 보고 바로 판단을 내렸다.
“혈마교의 교주께서 곧 당도하실 거라는 것은 사실이다. 지옥진군이 거짓을 고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천화련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지옥진군은 천화련보다 먼저 이곳을 점령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태경은 그나마 조향령보다 상태가 나았다.
“이태경… 그만 닥…….”
겨우 입을 연 지옥진군이었다. 그는 여태 내상을 회복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을 털어놓은 이태경을 보고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태경은 잠깐 당황했지만, 변명하듯 말을 이어 나간다.
“네가 살려 줄 것은 아니지 않나? 너는 분명히 황극린을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게 뭐지? 암천파의 정예들은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전멸했다. 나라도 살려면 모든 것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닥…….”
“뭐가 더 궁금한가? 내가 익힌 무공까지 말해 줄까? 그러면 살려 줄 수 있겠나?”
“용왕궁과 혈마교가 관련이 있나?”
“용왕궁? 그게 뭐지? 그건 모른다.”
이태경은 당당하게 말했다.
“혈마교가 회계산에서 원하는 게 뭐였지? 점령한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건가?”
“모른다. 회계산에 무슨 보물이 있다고…….”
지옥진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동시에 하나만 남은 오른팔이 움직였다. 작은 돌멩이였지만, 속도가 붙으면 사람을 죽일 정도의 살상력을 갖춘다. 하지만 황극린의 발에 가로막혔다.
“이런 개자식! 방금 날 죽이려 했어? 혈마교를 도와 여기까지 온 나를?”
“네놈이… 감히…….”
이태경이 분노한다.
오히려 그에게 상처를 입힌 황극린보다 혈마교도가 자신에게 살수를 뻗었다는 게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황극린에겐 화를 낼 수조차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말이다.
“혈마교는 사파 전체를 흡수하려 하고 있다! 만독문도 꾀어내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흑살문과 최근 손을 잡았다고……!”
그 순간.
공간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서걱.
“…….”
황극린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공간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무공. 평소처럼 몸으로 막으려 했다면 황극린도 위험했을 것이다. 어둠의 강기로 갈라진 이태강의 육신은 마치 나무 장작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점점 크기를 키워 이태강의 육신 전체를 잠식했다.
잔뜩 분노한 채 성을 내던 이태강은 죽었다.
황극린이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천마강림(天魔降臨) 만마앙복(萬魔仰伏)……!”
피를 토하면서까지 외치는 지옥진군.
그 단어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 아해야.
하늘을 밟고 오연히 선 존재.
그의 주위로 어둠이 일렁였다.
- 이것도 막아 보아라.
쿠쿵.
천마(天魔)가 한 발을 내디뎠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만마를 앙복시킨다는 절대의 무공이 하늘에서 펼쳐졌다.
* * *
- 대단하구나.
콰지지지직-! 콰지지직!
황극린의 몸에서 수천 가닥의 뇌전이 일렁이고 있었다. 천마군림보는 단순한 보법이 아니었다. 공간을 밟는다. 그 행위 자체로도 절대 수준에 오른 고수의 위용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밟음과 동시에 어둠이 공간 속으로 터져 나간다. 그러한 어둠이 황극린에게 쇄도했다.
혈마교주. 천마라 불리는 존재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지축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혈황마제(血皇魔帝)이자 천마라 불리는 상대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어둠을 어느 정도 간파하기까지 했다. 그의 어둠은 단순함 어둠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흑염(黑炎)이라고 할까? 검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그것은 수분이 가득한 인간의 몸을 기름도 없이 태워 버렸다.
닿으면 무엇이든 태워 버리는 내력. 막는 것도 애매하고 피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황극린의 뇌전은 그의 어둠을 찢어 버렸다.
사방에서 쇄도하던 어둠은 결국 황극린에게 닿지 못하였다. 오연하게 서 있던 교주의 얼굴에 이채가 서린다.
“소문은 듣긴 했지만 대단하구나.”
공간을 밟고 내려온 교주.
이제는 전음으로 의사를 전달하지 않는다. 전음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포근했으며 부드러웠다. 외모도 절대고수처럼 보이지 않는다. 왠지 위험해 보이는 은은하게 보라색이 비치는 머리카락. 젊은 외견. 그는 반로환동의 경지에 닿은 듯했다.
207호라는 살수로서 살아오기도 했던 황극린이지만 혈황마제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는 혈교와 마교의 교주 두 사람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무인, 아니 마인(魔人)이었다.
“예상보다는 별것 아니로군.”
황극린의 도발.
그 말에도 혈황마제는 오히려 미소를 머금을 뿐이다. 오히려 흥분했다면 혈마교주의 약점을 찾은 셈이겠지만, 그는 역시나 여유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마치 황극린은 언제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빙궁주에게 듣긴 했지만, 보통이 아니로군. 그래서 그녀가 널 가지고 싶어 하는 건가?”
“그걸 빌미로 만뇌문에 협박하지 않았나?”
“아, 그거.”
혈황마제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간다.
“장난이었단다.”
과연 정말 장난이었을까? 듣기로 혈마교주는 북해빙궁주를 많이 신경 쓴다고 한다. 북해빙궁에서 봉황의 패를 줄 정도로 혈마교주가 큰 은혜를 내렸다는 건데, 그런 것을 보면 정말 빙궁주를 신경 쓰지 않는다기보다 지금 거짓말을 한다는 것에 무게가 쏠린다.
아무튼.
북해빙궁주는 딱히 상관없었다. 지금 혈마교주는 이 자리에 있으며.
황극린은 혈황마제를 상대로 전력을 다해야 승리할 수 있었다.
마인 중의 마인.
만마를 굴복시키는 천마라는 존재는 황극린이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리 황극린이 과거를 알고 미래를 대비하여 이 자리까지 왔다고 해도 그는 중원 전체를 수렁과 혼란에 빠트리던 문파의 수장이었다.
“교주시여…….”
지옥진군을 본 혈황마제가 혀를 찬다.
“실패는 곧 죽음이지만 이 아이를 보니 그것이 이해가 되는구나. 그러니 용서해 주겠다.”
“가, 감사…….”
교주는 다시금 황극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그의 눈빛은 처음보다 많이 진중해져 있었다. 황극린. 소문은 들었다. 보고도 들었다. 부교주 한 명이 당했다. 뭐, 그런 소식에 솔직히 가소롭게 여겼다.
부교주?
화경이라는 경지는 헤아릴 수 없이 넓다. 백골마존을 겨우 쓰러트렸다는 황극린은 크게 신경 쓸 일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손짓 한 번, 발짓 한 번에 쓰러질 애송이였다.
하지만 실제로 본 황극린은 무언가 달랐다. 혈황마제가 회계산을 돌아본다.
“이곳에서 뭘 얻었지?”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
그가 회계산에서 뭘 얻었는가?
“내가 답한다면 너도 답을 하는 건가?”
“허허, 참 당돌한 아이로구나. 뭐, 좋다. 하나씩 궁금한 걸 답하도록 하자꾸나.”
“마경이 있었다.”
“…….”
혈마교주가 침묵한다.
마경이라.
그것이 사실일까? 황극린은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평온했으며,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거짓이 없었다. 믿고 말고는 교주의 선택이다.
‘그럴듯하군. 시체를 보았을 때, 황극린의 무공과는 거리가 있어. 회계산 따위에 마경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긴 하군.’
일단 교주는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황극린이 교주를 바라본다.
“인형혈삼의 존재를 알고 있나?”
“인형혈삼?”
“타고난 저주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영약.”
“…….”
황극린이 교주의 눈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의 눈빛에 검붉은 기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존재한단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