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호랑이 굴
“그 유명한 황극린의 멱을 딸 수 있는 건가?”
암천파의 장문인 이태경.
사흑련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광동성의 패자라 불리는 암천파. 구파일련과 육대세가의 수많은 견제에도 꿋꿋이 세력을 확장하여 십대사파라 불리는 문파 중 하나였다. 그들은 사흑련 중에서도 혈마교와 손을 잡았다.
그들과 손을 잡은 이유는 당연하다.
“오늘 멸절마검(滅絶魔劍)을 볼 수 있는 겁니까?”
멸절마검.
혈마교는 따르는 휘하 문파들에게 최상급의 마공을 선물했다. 멸절마검은 마공 중에서도 익히기가 몹시 까다로웠지만, 대성하면 상대의 검기를 그대로 집어삼켜 즉시 활용할 수 있다. 상대가 강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무공이었다.
“크크, 귀영회의 혼세권(魂洗拳)도 기대가 되올시다. 듣기로는 10성의 경지에 올랐다고 들었소만?”
“이 대협께는 비할 바가 안 되지요.”
“겸손 떨기는.”
이태경이 차가운 얼굴로 선 월영문의 조향령에게 시선을 옮겼다.
“강호에 뜻이 없다는 월영문까지 예까지 행차하시고?”
“당신들처럼 주워 먹을 게 없나 찾아온 것이 아니니 안심하시지요.”
“흘흘, 우리가 뭘 주워 먹는다고 그러시나? 다 혈마교주의 은공을 갚고자 찾아온 게지.”
조향령은 깔끔히 무시한 후, 회계산을 바라본다.
기이한 감각이 몸을 휩쓸고 있다.
“저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귀영회주 냉무염이 조향령에게 묻는다.
그의 눈동자엔 음욕이 가득 서려 있었다. 월영문은 남쪽의 북해빙궁이라 불릴 정도로 문도들의 외모가 출중하다. 물론, 그 아름다운 외모 속에 치명적인 독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지만.
은밀하게 다가오는 냉무염의 손길을 쳐 낸 조향령. 냉무염도 더는 그녀에게 허튼짓을 하진 않는다.
“기이한 느낌이 드는군요.”
“두려운 겁니까? 겁이 나시면 제가 옆에서 지켜 드릴 수 있습니다만?”
“파천뇌권에게서 절 지켜 준다고요?”
“못 할 것이 무어가 있겠습니까? 화경의 고수라고 한들 저 혈마교의 정예들이 먼저 상대할 터인데 말입니다. 힘이 빠진 호랑이는 맹수가 아닌 법이죠.”
“…….”
혈마교에서 소집한 정예 부대.
그들의 기세는 각 문파의 수장들이 보기에도 상당히 위험했다. 인간적인 감정을 전혀 내보이지 않는다. 보통 마공을 익히면 성정이 고약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저리 감정을 절제한다는 건.
‘제3공자의 작품.’
소교주 후보들은 각자 특기가 존재했다.
제1공자는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한다고 한다. 제2공자는 독공과 독물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그리고 제3공자.
그는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인간의 혼백을 다루는 귀신. 뭐, 정말 혼백을 다룬다기보단 마인의 폭주하는 감정을 절제할 정도로 숙달된 마인을 키우는 능력이 있다고 할까? 그가 만든 단약 또한 사파에서 꽤 유명하다.
조향령이 혈마교의 정예들을 바라본다.
든든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건 저들이 아니다.
‘교주님을 꼭 뵈어야 해.’
조향령이 작은 미소를 머금는다.
“제가 위험할 때 한 번 도와준다면.”
“도와준다면?”
“원하시는 바를 들어드리죠.”
“허허허, 그것 정말입니까?”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이태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흘흘, 이 늙은이도 끼워 줄 수 있소?”
“당신과는 할 말이 없군요.”
이태경이 인상을 찌푸리고 냉무염이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태경은 온갖 잡스러운 방법으로 작은 문파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마 월영문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리라. 그래도 귀영회주는 상도를 지키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
“쯔쯔, 한가로이 잡담이나 나눌 시간이 있소? 이제 곧 작전을 시행하는 듯하오만.”
이태경이 말을 돌린다.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어디, 황극린이라는 놈의 실력이나 한번 볼까?”
“흘흘, 뭐 얼마나 대단하겠소이까?”
혈마교도들과 사파인들이 포위망을 단단히 구축하여 일사불란하게 좁혀 나간다. 지원이 더 오지 않아도 황극린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불안함을 느끼고 있던 조향령마저도 위엄 넘치는 혈마교도를 보고 있자니 금방 황극린을 사로잡을 것 같았다.
그렇게 첫 번째 연합이 회계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 * *
지옥참마대.
단(團)에 속하지 않은 독립부대로서 혈마교에서도 손꼽히는 전투부대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그 힘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건 지옥참마대를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수백 가지의 합격진을 익혔고, 다수가 소수를 상대하는 것에도 능하다.
그건 구유혈랑대나 비영추혼대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회계산 정복 작전의 총책임자인 지옥참마대주 지옥진군(地獄眞君)은 세 개의 대대를 이끌고 회계산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 보이는 족족 죽여 버리고 전진하고 있다.
“보고드립니다.”
“뭐지?”
“최소 300장이 넘는 거리에서 황극린이 암기를 출수하여 조원 중 한 명을 납치했습니다.”
“300장?”
역시 화경의 고수라는 말인가.
지옥진군은 손가락 세 개를 치켜세웠다.
“더 빠르게 전진한다. 그 먼 거리에서 암기를 던질 수 있다면 병력의 손실이 불가피하다.”
“존명!”
지옥진군의 명령은 세 사파인에게도 전해졌다. 포위망은 더 빠르게 회계산을 좁혀 갔다. 그리고 그들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황극린의 암기는 그 이후로 날아오지 않았다.
“산을 오른 흔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살냄새가 납니다.”
“여인의 분 냄새가 남아 있습니다.”
탐색술을 극성으로 익힌 조원들이 흔적과 냄새를 찾아 보고했다.
“함정은 없습니다.”
“전진.”
그렇게 한 시진이 흘렀다.
회계산의 중턱에 오를 때까지 전투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
“정지.”
황극린이 도망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중턱에 있는 작은 동굴을 발견하고 지옥진군은 정지를 명령했다. 그곳엔 황극린이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말이다.
“구마철혈진(九魔鐵血陣).”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세 개의 대대가 한 몸이라도 된 듯이 움직여 동굴을 에워쌌다. 암기를 든 자도 있었으며, 활을 든 자도 있었다. 무림인이 활을 잘 사용하지 않는 점을 상기한다면 약간 특이한 조합이긴 했다.
“대기.”
지옥진군이 앞으로 나선다.
“투항한다면 살려 주겠다.”
“투항?”
어이없다는 목소리.
“혈마교와의 일은 해결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나?”
“협조한다면 공격하지 않는다.”
“너희가 원하는 게 여기에 있다는 건가?”
“네게 질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웃기는군.”
황극린은 무방비의 자세로 팔짱을 꼈다. 최소 백오십 명에 달하는 혈마교의 정예들. 그리고 그 뒤를 받쳐 주는 특이한 복색의 무림인들. 아마 혈마교에 충성하는 사파 문파이리라.
“부교주급은 한 명도 없군.”
“우리는 화경에 이른 고수를 사냥했었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혈마교의 혈혼단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제2공자와 부교주 백골마존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합공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다. 각자의 장기만 발휘하는 데 급급하달까?
하지만 지금 포위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확실히 다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단순히 상대도 없이 합격진을 펼친 놈들은 아니었다. 믿기지 않지만, 저들이 화경의 고수를 사냥한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희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소모품인가?”
황극린은 도발로 상대를 흔드는 걸 즐긴다.
살수란 그런 존재다. 압도적인 무력이 있더라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최대한 힘을 아낀다. 무공을 펼침에 있어서 흥분은 최악의 약점이 되곤 한다.
하지만.
소모품이라는 말에도 혈마교도들은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반응한 것은 뒤편에서 멀찍이 구경만 하던 암천파의 이태경이었다. 그는 혈마교도들을 이끄는 놈에게 허락을 맡고 앞으로 나섰다.
“하하, 안녕하시오까? 이 몸은 암천파라는 문파를 이끄는 이태경이라 하오!”
이태경.
황극린도 들어 본 적이 있다.
십대마군(十大魔君) 중 하나.
사흑련의 사대마제나 정파의 천하칠대고수에 미치진 못한다고 하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특히 이태경은 십대마군 중에서도 악랄함이 정평이 난 대마두였다.
“흘흘흘, 듣자 하니 말이 너무 심하시구려? 최근 명성을 좀 떨쳤다고는 하나 너무 경거망동하는 게 아니오까? 그렇게 덧없이 간 후배들을 참으로 많이 보았소이다.”
“그럼 먼저 올 텐가?”
“클클클, 본인은 이분들의 명을 받드는 입장이라 나중에 나설 생각이외다.”
그러니까 혈마교도를 쳐부숴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저 냉무염도 있습니다. 유명하신 파천뇌권께서도 구혼사존(勾魂邪尊)이라는 별호를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으시겠지요.”
냉무염.
그 또한 십대마군에 속해 있는 고수였다. 혈마교가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다. 아마 중원에서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이들을 전부 불러온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황극린은 보라색 의복을 입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월영문인가.’
혈마교도를 뚫어도 세 문파의 수장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문제는 이들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이 용왕궁이 꾸민 계책일 수도 있었다. 이들을 다 해치우고 나면 용왕궁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었고.
“투항할 생각이 없는 건가?”
지옥진군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묻는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얌전히 투항한다면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다. 솔직히 피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진심이다.
싸움이 시작되면 모두 죽는다.
“어쩔 수 없군.”
“클클, 크하하하하! 듣던 대로 생각이 짧구려! 명을 재촉하는 선택을 하다니!”
“정파인들은 보통 저렇지요. 힘을 과신하다가 결국 쓰러지기 마련이니.”
혈마교도들이 준비한다.
십대마군 세 명도 전투를 준비했다. 여차하면 바로 끼어들 생각이리라.
“개진.”
지옥진군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수십 개의 암기와 화살이 공간을 갈랐다.
그리고.
찌지이이이익-
공간이 찢어졌다.
촤아아아아아-!
모두가 황급히 눈을 막는다. 어찌나 바람이 강한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거센 바람에 의복이 날아갈 듯이 흩날리고 있었다.
“혈마교도의 합격진은 이런 것도 가능한 것이외까?”
“허으, 정말 혈마교의 무공은 하늘에 닿아 있군요.”
“여긴 대체…….”
세 명의 십대마군이 감탄하며 중얼거리고 있다.
그리고.
“도주…….”
떨리는 지옥진군의 목소리가 들린다. 겨우 그것을 들은 암천파의 장문인 이태경이 말한다.
“뭐라고 했소이까? 도사?”
“모두 일월신단(一月神丹)을 복용해라!”
일월신단이라는 말에 혈마교도들이 움찔 떨었다.
그렇지만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들은 일월신단을 복용했다. 혈마교도들은 그들보다 강한 상대를 상대할 때를 대비하여 신체의 잠재력을 모두 격발시키는 단약을 항시 구비한다. 일월신단은 그중 하나로, 고통을 아예 느끼지 못하게 하고 반사 신경을 극도로 올려 준다. 그리고 내력의 효율이 두 배 가까이 상승한다.
사기적인 능력이다.
그리고 일월신단을 복용하면 이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모두 죽는다.
일월신단의 정체를 알고 있던 월영문의 조향령.
그녀는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월영문도들 모두 진형을 갖추어라! 뒤로 물러선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감히 눈을 뜰 수 없도록 몰아치고 있었다. 모두 다 수준급에 이른 무인들임에도 조금만 방심하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저게 뭐야…….”
냉무염은 눈을 때리는 강풍에도 불구하고 손을 치우고 안력을 돋우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것을 보게 되었다.
“산……?”
황토색의 무언가. 거대한 절벽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그 크기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쿠르으응-!
벼락이 쳤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맑은 하늘이었을 텐데, 어디서 벼락이 친다는 말인가?
쿠으응!
“커지고 있어……?”
냉무염이 중얼거린다.
이상하게도 황토색의 산이 점점 커지고 있다.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간격이 짧아지고 있었다.
촤라아아아악-!
쿠르으응!
경지가 낮은 무인들은 심지어 바람에 넘어지기까지 했다.
“포, 폭풍이다…….”
그때서야 그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건 돌산 따위가 아니었다.
“폭풍?”
“대체 뭐야? 회계산에서 무슨 폭풍이!”
“아니, 여기는 회계산이 아니야!”
지옥진군이 외친다.
“진법이다! 모두 대열을 정비하고 폭풍에 맞선다!”
그는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각자 흩어져서 폭풍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전열을 유지하여 폭풍을 견디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거기다 일월신단을 복용했기에 혈마교도들의 무력은 더 강해진 상태.
“저 안에 황극린이 있을 거다. 놈을 노린다.”
혈마교도들을 본 암천파의 이태경과 귀영회의 냉무염도 합류한다.
“우리도 돕겠소이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틈이 보이면 앞으로 가시오. 황극린이 보이면 모든 힘을 담아 공격하시오.”
하지만 조향령은 가까이 오지 않고 있었다. 이태경이 그녀를 부른다.
“뭐 하십니까? 따로 있으면 저 폭풍에 휘말려서 죽을 뿐입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태경은 그녀와 한 약조를 기억하고 있었다. 저 폭풍은 눈속임일 뿐이다. 한데 뭉쳐서 대항하면 못 막을 것도 없다. 이곳에 모인 무인들의 수준은 대문파와도 격전을 벌일 만큼 수준이 높았으니까.
“어떻게…….”
조향령도 고민했다.
지옥진군의 판단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폭풍으로 정면 돌파를 하는 게 옳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할까?
“가짜일 뿐이다!”
“환상진이다! 눈과 귀를 속여 겁먹게 하려는 수작이다! 황극린의 공격을 대비하라!”
“암습이 있을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다.
이미 폭풍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모두가 힘을 합쳐 폭풍에 휩쓸리지 않게 무게를 늘렸다.
‘합류해야 해. 지옥진군이 잘못된 판단을 할 리가…….’
그렇게 생각한 조향령이 그들에게 합류하려는 순간이었다.
“으……!”
“아……!”
“악……!”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의 비명이 끊겨서 들려온다. 조향령은 멍하게 입을 벌렸다. 자신의 몸도 조금씩 떠오르는 게 느껴진다. 눈앞의 폭풍은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아니, 벌써 삼켜 버렸다.
화경의 고수를 잡았다던 혈마교도들.
암천파와 귀영회의 정예들.
모두가 휩쓸렸다.
순간 폭풍 속에서 혈흔이 흩날리는 것도 보았다.
그들의 피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죽어……?’
이제야 조향령은 폭풍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수백, 수천, 수만…….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