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시험
황극린의 옷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그가 입은 옷이 뇌섬사로 짜인 의복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뇌섬사는 내공을 주입하면 강기로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지고 탄력이 강해진다. 특히 황극린의 뇌기와 조화가 잘 맞아 내력만 많이 주입한다면 검강까지 막아 낼 수준이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부위만 겨우 가린 상태.
황극린은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육금연이나 교특범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쓸 수 없었다.
백색의 의복.
그것이 붉게 물들어 있다.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주군! 괜찮으십니까?”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설마 황 공자님의 피인가요?”
황극린은 가만히 그들을 응시하다가 인상을 찌푸린다.
동시에.
고오오오오-
쿠웅!
“……!”
육금연과 교특범이 깜짝 놀랐다.
어느샌가 진법의 입구가 열려 있다.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아니, 새어 나오는 게 아니라…….
콰아아아아아-!
태풍은 가끔 겪은 적이 있다. 육금연은 아주 어릴 적 태풍이 불어 살던 집이 날아가 버린 적도 있었다. 착실하게 만들어진 집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 경험은 충격적이다. 자연의 위대함. 그것을 절실히 겪고, 그녀가 종국에 배교에 귀의하게 된 사건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더하다.
틈 속에서 빠져나오는 바람. 두 사람 모두 꽤 높은 수준의 무인들이었다. 그런데도 틈에서 터져 나오는 바람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만.”
황극린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다.
마치 혼을 쓰다듬는 듯한 목소리. 그러자 마치 바람이 삐치기라도 한 듯이 사라진다. 정확히는 진법의 입구가 닫혔다.
“대, 대체 무슨? 지금 뭘 한 건가요? 진법을 ‘언어’로 조종한 건가요?”
“주, 주군!”
매사에 냉철함만을 보이는 교특범이 초롱초롱 빛나는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역시 이분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육금연도 마찬가지였다.
진을 조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보통 진과 연결된 보패를 만들어 그것을 열쇠로 이용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도 말로 진법 자체를 조종하는 경우는 보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틈새에서 새어 나온 바람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진법에 의지라도 있는 건가요?”
그런데 황극린의 대답이 의외였다.
“세상에 의지가 없는 건 없다.”
“네?”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황극린는 진득한 피 냄새를 잔뜩 풍기면서도 여유로웠다. 저게 황극린의 피가 아니란 말인가? 진법 안에 누군가 있었던 건가?
“주군, 안에 진법을 만든 자가 있던 겁니까?”
“아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대체 그 피는…….”
“내 피다.”
“……!”
황극린은 온통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해했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설마 조금 전 열린 입구에서 보였던 거대한 폭풍,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그 바람과 마주했기에 이런 상처가 생긴 건가?
“굴복시킨 건가요?”
육금연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황극린은 고개를 저었다. 굴복이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흐름을 탔다고 할 수 있겠지.”
“이제 자유자재로 저 진법에 진입할 수 있는 건가요?”
“그래.”
“……!”
황극린이 사라졌다.
그리고 육금연의 옆으로 나타났다.
“이렇게도 활용할 수 있겠군.”
“헙!”
마치 공간 그 자체를 뛰어넘은 듯하다. 확실히 황극린은 벽면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공간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이 진법을 연구하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난 역사상 최고의 진법을 만들 수도 있어.’
황극린이 말한다.
“밖에서 보도록 하지.”
“네? 밖에서요? 설마 동굴 밖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같이 가고 싶어도 아마 너희는 저 폭풍에 견딜 수 없을 거다. 거의 모든 공간을 메우고 있거든.”
“잠시만요. 설마 동굴 안이 아니라 밖으로도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요?”
“회계산 전체가 진법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어디로든 나갈 수 있지.”
“그, 그런!?”
육금연이 경악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친 진법이었다.
“예, 주군! 밖에서 뵙겠습니다.”
황극린이 무슨 말을 하든 의심하지 않는 교특범이 고개를 숙인다.
왜인지 육금연은 그런 그가 얄미웠다. 황극린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정말 천하제일의 무공서가 존재했는지를 말이다.
황극린은 마치 원래부터 이 공간에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육 소저, 가시지요.”
교특범은 망설이지 않고 좁은 동굴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 * *
“아마 그건 불가능할 거예요.”
육금연도 오랜 고민을 했다.
황극린이 질문한 것은 하나였다. 진법과 진법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 수 있는가? 황극린은 회계산 어디든지 진법 내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었다. 즉, 회계산에선 황극린은 거의 공간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실시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도 하고 심력도 꽤 소비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거리를 뛰어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황극린도 감으로 예상하곤 있긴 했다. 회계산의 동굴에 설치된 진법은 산의 정기를 모두 빨아들여 유지하는 것이다. 회계산에서 청성산까지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기가 필요하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는 말.
“그렇군.”
“하지만 회계산의 진법만 연구해도 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연구하게 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간절한 육금연.
“내 앞에 서 봐라.”
“네?”
육금연이 엉거주춤하게 황극린 앞에 섰다.
“단단히 준비해라.”
황극린이 두 손을 뻗는다.
그리고.
콰아아아-!
쿠릉!
“꺄아아악!”
천재지변.
뇌우를 몰고 다니는 폭풍우가 좁은 공간을 휩쓸었다. 육금연은 저 멀리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잠시 뒤 등을 두드리며 다가온 육금연에게 황극린이 말한다.
“백분지 일.”
“네?”
“진을 통과하려면 이걸 극복해야 한다.”
“잠시만요. 백 배라고요? 그 정도면 사람이 찢겨 나갈 것이 분명…….”
육금연의 입술이 떨린다.
설마 황극린은 그 바람을 뚫고 진법 내에서 움직이는 건가? 그래서 그가 피범벅이 되었던 건가?
“요령을 깨우치면 상처를 입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회계산과 통하는 출구로 가려면 폭풍의 중심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 과정이 험난하겠지.”
“제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군요.”
“최소한 화경의 경지에는 올라야 한다.”
불가능하다.
화경이 개나 소나 오를 수 있는 경지도 아니었다. 그리고 황극린은 ‘최소한’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사실 황극린도 사기적인 회복 능력이 없었다면 폭풍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마경.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 황극린은 마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주군, 제갈 소저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황극린은 돌아오자마자 오지 말라는 서신을 보냈지만, 제갈소희는 서신을 받자마자 홀로 달려온 듯했다.
“제가 괜한 행동을 하여…….”
“아니다.”
제갈소희가 인사한다.
“황 공자님, 오랜만에 뵈어요. 급한 일이라길래 왔는데… 멀쩡하시군요.”
“미안하오.”
“아니에요. 무사하면 됐죠.”
제갈소희는 생긋 미소를 머금는다.
그녀는 계산적인 여인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황극린에게 협력한다. 이렇게 달려온 것만으로도 언젠가 황극린에게 많은 것을 받을 수 있으리라.
물론,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다.
제갈소희가 슬쩍 고개를 돌린다.
“이분은?”
“…….”
육금연과 제갈소희의 시선이 충돌한다.
뇌전이 이는 듯 조용하면서도 살벌하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걸까?
“마침 잘됐군. 두 사람은 진법에 관심이 많지 않소?”
육금연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갈소희와 함께 청성산의 진을 연구한다면 활용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가령 회계산의 진을 청성산에 적용해 특정인만 바로 진의 입구에서 만뇌문의 본거지로 진입하게 할 수도 있으리라.
“같이 한번 연구해 보시오.”
제갈세가와 배교.
예로부터 앙숙이었던 가문과 문파였다.
“제 수준에 맞출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제갈세가는 요즘 진법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소문이 있던데.”
“잘 모르시네요.”
촤라락.
부채가 펼쳐진다. 그리고 육금연은 부채에 담긴 기이한 힘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의 소형화(小形化).”
육금연이 반박한다.
“결국 운철의 힘을 빌린 거네요. 그것보다는…….”
두 사람이 자신의 장기를 자랑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꽤 수준이 높았기에 교특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일각 정도가 지나자 서로의 신경전이 멎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황극린을 바라본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회계산에 있는 진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대체 그 진법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가? 대체 누가 만든 건가? 그 안에 보관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의문이 가득했다. 황극린이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회계산에 있는 진법의 정체가 뭐였죠? 그 안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폭풍만 있었던 걸까.
그건 아니리라.
“무언가를 만들려고 했소.”
처음 중심부에 도달한 순간 황극린은 깨달았다.
어쩌면 회계산에 만들어진 진법은 ‘인형혈삼’이 만들어지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설마?”
황극린의 말을 이해한 교특범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실패한 것 같더군.”
거대한 힘.
성 따위는 종잇장처럼 날려 버릴 힘을 지니고도 부족했다. 아니, 영약의 형태로 그 기운이 자리를 잡으려면 폭풍 따위는 불지 않았어야 정상이었다. 진 내에서는 쉴 새 없이 내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마치 바닥이 뚫린 항아리에 물을 채워 넣듯이 말이다.
황극린이 교특범을 마주한다.
“교특범, 다른 임무를 주겠다.”
그러자 교특범이 환한 미소를 머금는다.
이제까지 그는 황극린의 수하가 되기 위한 시험을 완수하는 중이었다. 인형혈삼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 그것이 바로 황극린이 내린 시험이었다.
다른 임무를 내린다는 말은.
이제 교특범을 진짜 수하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다.
* * *
“황극린이 회계산에 있다는 말이더냐?”
회계산이라는 말에 여인의 표정이 굳는다.
“예, 최근 제갈세가의 제갈소희도 회계산으로 향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회계산이라……. 예전에 들른 적이 있었지. 분명 높은 토양에는 거대한 힘이 깃들진대… 오히려 평지보다 못한 지맥을 품고 있었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회생비록이 가리키는 곳은 그곳이 분명하다. 그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하라.”
“예, 알겠습니다.”
회생비록.
그것을 찾는 것은 용왕궁의 궁주뿐만이 아니었다.
‘네놈이 날 이용하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회생비록이라는 것의 비밀을 알려 준 것이 바로 그였다. 어쩌면 저주를 극복할 방법이 있다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하지만 여인은 사내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중원 무림의 문파들이 그들을 추앙하지만.
그들의 뒷모습에 어떤 악의가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선조들이 남긴 교훈은 이럴 때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인은 왜인지 초조해하면서도 기쁜 미소를 피워 올렸다.
* * *
땡- 땡- 땡-
성내에서 거대한 종이 세 번 울렸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성의 주인이 간부들을 소집했다는 뜻이다. 어둠 속에 파묻힌 거대한 공동. 그곳에 수십 명의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절을 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 앉은 사내가 입을 연다.
끼이이익-
철판을 긁는 듯한 소음이 동시에 들려온다. 그의 목소리는 인위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담백하게 인간이 아닌 것이 말을 하는 것 같달까.
“들어라.”
“예, 련주님.”
모두가 같은 대답을 한다.
“회계산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라.”
누군가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듯하다.
그리고 일어서지 못한 나머지는 작게 움찔했다.
“소인이 나서겠습니다.”
“회계산에 있는 건 파천뇌권 황극린.”
“황극린?”
명백한 의문형. 련주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딱 한 사람이 있다. 련주의 자리를 물려받을 한 사람.
끼기긱- 끼기긱-
련주의 웃음소리.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사람의 웃음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련주님, 제가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제가 햇볕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습니다. 정보를 취합하는 데 있어서 유리할 겁니다. 황극린과는 인연도 있으니까요.”
“그러도록.”
“감사합니다.”
나머지 수하들은 이번 일에 나서지 못한 것이 아쉬운지 한숨을 내쉰다.
임무에 성공한다면 달콤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 꽤 먹음직스러운 놈이 들어왔다고 들었으니까. 종이 세 번 쳤으니 그만한 수준을 갖추고 있으리라.
“나가 보도록.”
수하들이 모두 빠져나간다.
어둠 속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묻는다.
“혈마교의 동태는?”
“여전히 저희를 노리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군. 놈들에게도 알리도록. 원하는 것일 터이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일영(一影)이시여.”
끼긱.
현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이라 불리고 있는 천화련주 계양.
그는 일영이라고도 불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