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대책
황극린이 회생비록을 바라본다.
어찌 본다면 회생비록에 나오는 소년은 천화련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황극린이 만났던 천화련의 소련주 계빈. 그는 햇빛을 싫어하여 밤에 주로 활동했었다. 회생비록에 의하면 주인공인 소년은 햇빛을 마주하면 피부가 타들어 간다고 했었으니까. 계빈 또한 낮에 활동하지 않았다.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엔 특징이 비슷하여 공교로웠다.
태상가주가 가진 회생비록은 축복이자 저주를 받은 북해빙궁의 이야기도 담고 있었고, 천화련과 햇빛에 관련된 내용도 존재했다.
용왕궁.
어쩌면 그들은 두 문파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력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겠지.’
지금까지 주어진 단서로는 단언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황극린은 분명 미래를 알고 있지만, 무림 전체의 비사를 꿰뚫고 있는 건 아니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흘러 미래를 빠르게 따라잡고 있었다. 그리고 황극린의 존재로 변한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황극린은 회생비록에서 시선을 떼고 태상가주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누굽니까?”
태상가주가 답한다.
“가문을 떠나고 해안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제가 구해 줬었습니다. 처음엔 몰랐지만 그 아이는 물에서 숨을 쉴 수가 있더군요.”
“그 아이에게 회생비록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려줬던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에게 회생비록을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서문륭의 표정이 어두웠다.
만약 회생비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서문세가에 혈겁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도 확실한 건 아니었다.
“얼마나 오래된 일입니까?”
“거의 십 년은 되었지요.”
“그들이 정말 회생비록을 원했다면 왜 그때 노리지 않았을까요?”
“그건…….”
가능성을 열어 둔다.
“회생비록은 언제 얻으신 겁니까?”
“이건 본가의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 서고의 구석에 있던 고서입니다.”
“애초에 회생비록이 서문세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군요.”
“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그때 서문취아가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두 달 전에 가문의 서고가 한바탕 뒤집혔던 적이 있었어요. 도둑이 들었다고 난리가 났는데 살펴보니 도둑맞은 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서고의 경계 인원을 두 배로 늘리기도 했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지 서문취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인다.
서문세가 또한 방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괴한들의 무공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 슬픔에 잠긴 서문취아의 어깨를 서문청이 두드려 준다.
“…어쩌면 이미 그들은 서문세가에 회생비록이 있다는 걸 알았을 수도 있다는 건가.”
태상가주가 중얼거린다.
그러니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왜?
지금 그걸 가져가려는 건가?
만약 회생비록이 정말 그들에게 보물이라면 그 전에 회수해 갔어야 하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힘을 가진 이들이 굳이 이런 방법을 택했어야 하나?
“그들도 최근에 알게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황극린의 말에 모두가 집중한다.
사실 황극린은 그들이 무림에서 활동했던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정사를 가리지 않고 용왕궁과 부딪쳤던 곳들은 대부분 심각한 피해를 입었었다. 그건 당시의 용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원하는 게 정말 회생비록이라면 다시 찾아올 겁니다.”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도 신분을 숨기고 변장하여 침입했었다. 정말 회생비록을 노리고 있었다면 그들은 태상가주가 나타나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으리라.
다음 행동을 하길 기다리면 된다.
처음엔 그들의 해괴한 자살 방법에 대응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어찌어찌 막을 방법을 알 것 같았다. 물론, 시도해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말이다.
“황 공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죄송하지만,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태상가주가 말한다.
황극린은 어차피 서문세가를 도울 생각이었다. 이번 일에는 꽤 많은 것이 엮여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예, 돕겠습니다.”
무심한 듯 단호하게 대답하는 황극린.
태상가주가 깊은 눈으로 그를 응시한다. 황극린이라는 무인이 도와준다면 가문을 습격했던 이들을 함께 제압하는 건 문제가 아닐 것이다. 태상가주가 아무리 반로환동의 경지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혼자서 수많은 고수를 동시에 막을 수는 없었으니 그의 도움은 꼭 필요하다.
“서문세가는 황 공자의… 아니, 만뇌문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결의하듯 말하는 태상가주에게 황극린이 고개를 젓는다.
“그런 말은 모든 일이 해결된 이후에 듣겠습니다.”
세 사람의 눈동자가 감격한 듯이 떨리고 있었다.
* * *
“천산어옹(天山漁翁)이 당했다고 합니다.”
“으음, 예상보다 서문세가 태상가주의 무위는 그리 대단치 않다지 하지 않았던가?”
“예, 맞습니다. 하온데…….”
황극린의 이름이 나오자 여인의 눈썹이 꿈틀한다.
“그놈이 왜 서문세가에 있는 거지?”
“확실하진 않지만, 과거 서문세가와 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장례에 참석한 것이겠지요.”
“운이 나빴구나.”
“예…….”
부복한 사내가 슬그머니 여인의 눈치를 살폈다. 말투는 차가웠지만 얼굴은 태평했다. 사내의 얼굴이 순간 굳었지만,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여인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확실히 문제긴 하군.”
여인은 고민한다.
황극린이 계속 서문세가에 머무른다? 만약 그렇다면 작전 수행에 큰 차질이 생긴다. 아무런 소득도 없는 희생은 여인이 바라는 게 아니다. 이익과 명분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현령을 이용해라.”
“관아를 끌어들이란 말씀입니까?”
“그래, 아무리 놈이라도 황실과 엮여 있다면 나서지 못하겠지. 정식 절차를 거쳐서 그걸 회수한다.”
“황극린은 용성에 소속된…….”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진행하도록 하라.”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에 토를 달았지만 왜인지 사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것을 본 여인이 혀를 찬다.
“쯔쯔. 정말 어리석구나. 작은 희생의 가치를 저리도 모르니 말이야. 나표, 게 있느냐.”
“예.”
어둠속에서 사내가 나타난다.
왜인지 방 내에 짠 냄새가 흐른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도록 하라. 모두가 죽더라도 그것만 회수하면 된다. 현령이 서문세가를 들쑤시면 그때 개시하도록”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표는 먼저 나간 사내와는 다르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나표의 염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나표가 나가자마자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직 할 일이 많구나.”
* * *
항주 현령 최검추.
그가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은밀한 후원자 덕분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어떤 청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밀한 후원자는 오늘 처음으로 최검추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예? 관군을 이끌고 무림 세가를 압박하란 말입니까? 그것도 서문세가를?”
“그렇소.”
죽립을 푹 눌러쓴 중년 사내.
매번 두둑하게 현령의 뒷주머니를 채워 준 고마운 은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요구를 할 줄이야. 서문세가가 어떤 가문인가? 항주에서도 백성들의 신임을 받는 명문가였다. 관아가 명분도 없이 그들을 겁박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관아와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물론, 행패를 부리는 마두들은 관아와 무림 문파가 합심하여 사로잡기도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다.
“서문세가에서 혈겁이 벌어진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예, 그러니까 더 문제라는 겁니다. 백성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관아에서 나서야지요. 서문세가의 장례식에서 무고한 백성들이 도륙당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예?”
“그중엔 무림인이 아닌 자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 그런?”
“폐하의 백성이 당했습니다. 관아가 나설 명분 중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말을 이어 나가려면 최검추가 흠칫한다.
죽립 사내의 사나운 눈초리와 마주한다. 밤중에 호랑이와 눈을 마주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목이 물어뜯길 것 같은 긴장감. 등골에 땀이 흐른다.
사내가 죽립을 다시 내리고 달래듯 말을 이어 나간다.
“하나만 회수해 오면 됩니다. 굳이 서문세가와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설마 서문세가의 무공 비급 따위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전쟁을 벌이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무림인들이 무공 비급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서책입니다.”
“서, 설마 무공 비급입니까?”
“아닙니다.”
“대체 그걸 왜…….”
“거기까진 알 필요는 없습니다. 현령께서는 ‘우리’가 지원해 준 것을 갚을 뿐이지요.”
“…….”
스스로의 힘으로 현령이라는 자리에 오르는 이가 얼마나 될까? 학문을 익힌 선비들에게 정치라는 것은 붓과 입으로 하는 전쟁이었다. 최검추는 이미 저들에게 빚을 졌다. 그것을 갚지 못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리라.
목을 쓰다듬은 최검추가 억지로 말을 쥐어짜 낸다.
“일단… 먼저 서문세가에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다짜고짜 관군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진 않습니까?”
“예, 현령님의 방식까지 통제하진 않겠습니다.”
최검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항주 현령에게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황실을 능멸하는 내용의 서적을 가지고 있다면…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서문청의 말에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관아와도 연이 닿아 있다는 건가.’
생각보다 용왕궁의 저력이 대단한 것 같았다. 그렇기에 미래의 무림에서도 온갖 적들과 충돌하고 살아남았겠지.
“그렇소?”
“대체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대체 그 책이 뭐라고…….”
“그러게 말이오.”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졌다. 그들은 저 회생비록을 원한다. 사실 이전까지는 그게 확실하지 않았기에 행동의 제약이 있었다.
“태상가주님께 갑시다.”
두 사람이 태상가주에게 향한다.
서문세가의 장로들과 원로들이 벌써 모여 있었다. 황극린을 발견한 16살의 외관을 가진 할아버지가 순식간에 달려왔다. 최상승의 경공에 장로들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오셨습니까, 황 공자.”
“예, 태상가주님.”
“들으셨겠지만 저들은 황실을 동원했습니다. 본가에도 나랏일에 뜻이 있어 중앙에 진출한 이들이 몇 있으니 그들을 통해…….”
“아마 늦겠지요.”
황극린의 말이 맞았다. 관아에 이번 일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다가 관군들이 서문세가를 둘러싼다면? 만약 적들의 배후에 서문세가의 힘이 통하지 않는 위치에 오른 자가 있다면?
“서신에서는 불응할 시 관군을 투입하겠다고 하더군요.”
태상가주의 말에 원로 서문호가 얼굴을 굳힌다.
이곳에는 만뇌문의 장로가 있다. 만뇌문은 용성 소속이었다. 용성은 황실이 만든 무림 단체로 현령이라도 감히 건들기 힘든 위치라 할 수 있었다.
서문세가가 닿은 중앙의 연보다 적들의 힘이 더 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림맹의 힘을 빌려야 할 것…….”
“늦을 겁니다.”
황극린이 단언했다.
저들의 행동은 예상보다 빠를 것이다. 고작 하루 만에 현령이 대응했다. 이미 적들의 시선이 서문세가를 집중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었다.
적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이상 간단한 해결법이 있었다.
* * *
“미쳐 버리겠군.”
항주 현령이 상시 동원할 수 있는 관군의 수는 천 명.
당연히 일대일로 무림인들과 붙으면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관군들의 힘은 개개인의 무력에서 오는 게 아니다.
대열을 이루고 사거리가 긴 무기로 적을 견제한다.
멀리서 활을 쏘고, 검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창을 휘두른다. 천 명에 달하는 관군들이 활을 쏘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지 않은 무림인들은 벌집이 되고 말리라.
그렇다고 해도 현령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서문세가와 전쟁을 벌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만약 절대고수라 불리는 황극린이 현령만 노린다면?
적의 장수를 베는 것.
전쟁의 기본이다. 지금 이곳의 우두머리는 현령이었다.
‘제기랄! 제기랄! 그놈들의 돈을 받아 처먹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우, 아니다. 어차피 나는 책만 받으면 그만이다. 황극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야.’
최검추가 애써 자위하며 말을 몰았다.
그리고 도착한 서문세가. 서문세가의 정예들이 살벌한 얼굴로 포진해 있었다.
“불온서적을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을 굳이 이렇게 일을 키운단 말이오!”
현령의 명을 받은 무관이 외친다.
그러자 서문세가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선다. 이제는 가주의 자리에 오른 서문청이다.
“무슨 불온서적 말이오!”
“이미 다 듣고 왔소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 들었소!”
“설마 회생비록 말이오!”
“…….”
제목까지는 후원자가 알려 주지 않았다. 현령이 죽립을 눌러쓴 후원자를 바라본다. 죽립이 작게 위아래로 움직이고 현령이 신호를 주자 무관이 외친다.
“맞소!”
“그건 이미 서문세가의 손을 떠났소!”
“그게 무슨 말…….”
죽립 사내의 어깨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살벌한 기세에 근처에 있던 관군들이 흠칫한다. 무림인의 기세라는 것은 무예를 익힌 관군들이라도 쉬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이제 내 물건이오.”
관군들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령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찬란한 미모를 뽐내는 사내가 얇은 서책을 들고 있었다.
“감히 용성의 물건을 탐하는 건가?”
황극린은 용왕궁이 황실의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