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회생비록
서문세가의 태상가주 서문륭.
그는 금분세수하여 무림을 떠나갔다. 사실 태상가주란 직책에 오른 이들은 보통 가문의 대소사에 큰 관여를 하지 않는다. 분명 그들이 쌓아 올린 지식과 경험은 후대에 큰 도움이 되지만, 세대 교체는 결국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나이가 든 무인들이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노화(老化)였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나이가 들수록 힘이 약해진다. 무공을 익혔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많은 내력을 단전에 쌓았다고 하더라도 세맥에 불순물이 쌓이기 시작하고, 걷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순간이 오게 된다.
특정한 경지.
반로환동이나 환골탈태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극복하는 게 불가능하다.
서문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문세가의 태상가주로서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지만, 무림의 은원을 모두 청산하고 가문을 떠나갔다. 이제 그가 책임져야 할 것은 없었다. 그의 아들인 서문자건에게 서문세가의 모든 것을 맡기고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었다.
노화하고 약해진 태상가주였기에 서문세가는 그를 보내지 않으려 했었지만, 이제 아들인 서문자건의 시대라고 생각했기에 결국 떠나갔다.
그리고.
태상가주가 떠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 태상가주가 돌아왔다.
“허어, 네가 청이로구나. 정말 많이 컸구나.”
서문청이 멍하게 눈을 깜빡인다.
그것은 서문취아도 마찬가지다. 사실 서문취아는 할아버지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보았다고 하더라도 갓난아기 때이니 기억이 날 리 만무하다. 서문청도 사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건 똑같았다.
하지만 두 남매가 당황한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뒷짐을 쥔 채 곧게 편 허리.
애환이 담겨 있는 눈동자로 남매를 바라보는 한 소년.
그렇다.
돌아왔다는 태상가주는 많이 쳐 주어도 열여섯 정도나 되었을 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서문청이 원로 서문호를 바라본다. 그는 서문세가의 가장 큰 어른 중 한 명이었다. 배분으로는 죽은 서문세가의 가주보다 항렬이 위였다.
“당숙 어르신……?”
“크흐으음!”
서문호가 입을 막고 헛기침한다.
그 또한 처음에 믿지 못하였다. 하지만 찬찬히 얼굴을 살펴보니 분명히 태상가주의 얼굴이 있었다. 거기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서문세가의 가주만 익힐 수 있는 무공까지 선보였다.
“이분은 태상가주님이 맞다. 다른 장로들도 그걸 확인했단다.”
“이처럼 어린아이가 태상가주님이라고요? 설마……?”
“그래, 태상가주께서는 반로환동의 경지에 닿았다고 하더구나.”
“……!”
서문청과 서문취아 두 남매의 눈이 부릅떠진다.
반로환동이라니? 환골탈태도 무림의 고수들이 바라 마지않는 경지가 아니던가? 어려져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정말 태상가주님이십니까?”
“그래, 지금껏 고생이 많았구나. 이 할애비가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허이.”
소년답지 않은 말투였다.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서문청은 왜인지 그러한 말투를 들으니 안심이 됐다. 분명 외관은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서문청은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는 서문세가의 소가주였다. 그렇기에 서문세가에 일어난 참변을 모두 감당해야 했다. 순수하기만 했던 여동생의 눈빛이 변화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서문세가엔 그가 기댈 만한 어른들이 많았지만, 가주의 자리에 올라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이었으니까.
태상가주.
심지어 반로환동이라는 경지에 오른 서문세가의 무인의 등장이다. 그 하나로 인해 서문세가는 괴한들에게 복수할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말이다.
하지만 서문청은 결국 울음을 참아 냈다.
가주가 되어서 이런 자리에서 울 수는 없었다. 옆에선 서문취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크으음! 태상가주님, 안으로 가서 대화하도록 하지요.”
“그래, 알겠다. 조용히 이야기하자꾸나.”
앞으로 나아가던 태상가주 서문륭.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시선의 끝에는 백의를 입은 한 귀공자가 있었다. 황극린이다.
“귀하는 누구신지요?”
경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서문청이 황급히 대답한다.
“이분은 저희 가문을 도와주신 은인이십니다.”
“네게 물은 게 아니란다.”
“…….”
황극린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도 태상가주라는 양반은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황극린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던 두 남매였지만, 태상가주는 황극린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한 경계가 나쁜 것은 아니다. 만약 만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황극린 또한 태상가주처럼 행동했을 터이니.
“만뇌문의 황극린입니다.”
“만뇌문? 분명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문파인데…….”
원로 서문호가 태상가주의 귀에 속삭인다.
“형님, 만뇌문은 뇌불이 개파한 문파입니다. 그리고 황 대협께선 현 무림인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화경의 경지에 접어든 분이십니다.”
늙어서 허리가 구부정한 서문호가 태상가주에게 형님이라고 하니 꽤 많이 어색했다. 물론,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인 것이라 황극린 외에는 듣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서문세가로 온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나가던 길에 서문세가에 변이 생겼다는 걸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주러 오셨다는 것이군요.”
“예.”
두 사람이 눈을 마주한다.
서문륭은 솔직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하늘이 내린 기회와 끊임없는 수련으로 새로운 경지에 올라선 초인이었다.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서문세가에 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 가문의 흉수를 만난다면 망설이지 않고 살수를 펼치리라 다짐했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가문에 돌아오니 웬 절대고수가 손주들과 함께 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만…….
경지에 오른 서문륭은 황극린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대번에 깨달았다.
이토록 가까이 있음에도 그의 기척을 가늠할 수 없다. 마치 흐릿한 그림자와 같았다.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그런 그림자.
원로 서문호의 말대로라면 황극린의 나이는 손자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서문륭은 과연 그게 가능한 것인지 의심되었다.
‘전력을 다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들의 복수를 위해 금분세수를 깨고 무림에 다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만약 황극린이 적이라면.
그 복수가 성공할 수 있을까?
“본가를 도와주신 귀인께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캐물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마침 태상가주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말입니까?”
“예.”
태상가주가 서문청과 서문취아를 바라본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두 아이와 따로 이야기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예, 그러시지요.”
* * *
꽤 시간이 흐른 후.
손주들과 돌아온 태상가주가 황극린에게 허리를 숙였다.
“다짜고짜 의심한 것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의심할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서문 소협과 서문 소저가 절 너무 쉽게 믿은 것이지요.”
그 말에 서문청과 서문취아가 흠칫한다.
반성의 표정보다는 섭섭하다는 듯한 얼굴이다. 그런 손자 손녀의 표정을 본 태상가주가 헛웃음을 짓는다.
“황 공자께서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시군요.”
“그렇습니까? 요즘은 적을 많이 만드는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허허, 황 공자님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이겠지요. 아마 진짜들은 황 공자를 따를 겝니다. 흘흘.”
“…….”
아무리 황극린이라도 어린 소년의 할아버지 말투는 어색했다. 마치 귀여운 척하는 뇌불 같은 느낌이랄까. 황극린이 묻는다.
“그래서, 의심은 모두 거두셨습니까?”
“예, 황 공자께서 취아랑 만났던 일부터 오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까지 모두 들었습니다. 여기서 더 의심한다면 귀인을 모욕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행이군요.”
“이번 일로 황 공자께서 위험에 빠지실 수도 있습니다.”
태상가주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마저 어려 있었다.
“배후에 대하여 알고 계신 겁니까?”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태상가주의 말에 서문 남매가 긴장한다.
진짜 태상가주가 목적이었던 건가? 고작 그런 이유로 혈겁을 일으켰단 말인가?
“대체… 대체 그놈들이 누굽니까?”
서문청이 진득한 분노를 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손자를 마주하는 태상가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만약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지. 손주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이 편해져서는 안 된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들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는 할애비도 잘 모르겠구나.”
“사파 무리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슬퍼하는 태상가주의 눈빛을 마주한 서문청이 흠칫한다.
보통 혈겁을 일으키는 건 사파가 아닌가?
“…뇌불이라는 무인이 있었단다. 그는 무림맹에서 무림공적으로 지정할 정도로 마두로서 이름을 날렸지. 하나, 내가 보았던 뇌불은 성격이 고약하긴 했지만 절대 악인은 아니었단다.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었어. 사파라고 모두 악하지 않으며, 정파라고 모두 의롭지 않으니. 청이 너 또한 이제 가주가 되어 세가를 이끌어야 할 터이니 그걸 꼭 기억해 두거라.”
“예…….”
태상가주가 황극린을 바라본다.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보았을 때 그들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부류였습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인간이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다고 한다면… 정녕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설마 사람에게 아가미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예, 비슷합니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몸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 그것이 단전에 쌓은 내력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용왕궁이 구파일련과 오대세가와 충돌하고도 살아남았는가?
그 의문이 풀리는 듯하다. 태상가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태상가주님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서문세가를 노리는 겁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용왕궁은 왜 이렇게까지 해서 서문륭을 불러내려 했는가? 그에게 무엇을 얻기 위해서?
태상가주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암담함을 숨길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이것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닳고 닳은 서책 한 권.
표지엔 유려한 필체로 회생비록(回生秘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어떠한 서책입니까?”
“유득유실(有得有失)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그것이 유득유실이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서책은 하나로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아마 다른 서책도 있겠지요.”
“한번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그냥 내어 주는 것으로 보니 무공 비급 같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황극린이 빠른 속도로 활자를 읽어 나간다.
‘으음.’
회생비록에 담긴 내용은 하나의 설화였다.
천형이자 축복을 타고난 인간이 고군분투하는 내용. 태상가주의 말대로 몹시 짧은 이야기였다. 여기에 나오는 건…….
‘태양과 마주하면 피부가 타들어 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 그런 제약과 동시에 공령신체(空靈神體)를 타고났다라……. 다른 이야기도 있다는 듯한 암시도 있군.’
황극린이 묻는다.
“그들이 왜 이것을 원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사실 회생비록은 단순히 흥미를 위한 이야기라 생각했었습니다. 태양과 마주하면 피부가 타들어 간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인간이라면 햇빛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인간을 보신 거군요?”
“햇빛에 피부가 타는 인간은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인간을 본 적은 있지요. 침에서 바다 짠 내가 나고 입안에 아가미가 있는 인간을 말입니다.”
가문에 돌아온 태상가주 또한 가문을 습격한 이들의 시신을 확인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어 아가미를 확인한 것이다.
“그렇군요.”
황극린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주이자 축복을 받은 인간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압도적인 무공 재능을 타고나지만, 인간으로서 치명적인 제약도 함께 존재했다.
‘북해빙궁.’
저주를 풀려고 황극린에게 혼인을 제안했던 빙궁주를 생각하고 있을 때.
태상가주가 슬픈 눈으로 말을 이어 나간다.
“만약 물에서 숨을 쉴 수 있었던 그 아이가 회생비록에 나오는 아이처럼 천형을 타고났다면… 어쩌면 이것이 그들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