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29화 (229/316)

229화 스쳐 갔던 인연

어린 시절의 서문취아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아름답게만 보았었다. 맹자가 주장했던 성선설(性善說)이 당연한 이치라고 여겼었다. 서문세가는 서문취아에게 세상의 좋은 면만 보여 주려고 했었고, 명문가라 불리는 서문세가에서 태어난 서문취아는 큰 시련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세상의 어두움과 직면하지 않았었다.

그녀와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줬으며, 호의를 건네 왔었다. 어린 시절의 서문취아가 성선설을 신봉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한 계기로 서문취아는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우연히 들렀던 친우의 집.

그곳에서 만난 무뚝뚝한 아이. 왜인지 눈길이 갔었고,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하여 도움을 줄 게 없을까 고민했었다. 호의를 베풀려고 하면 차갑게 거절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서문취아의 마음을 자극했달까?

서문취아는 친우의 집안에서 그를 배려하여 무공을 알려 주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건 서문취아의 착각에 불과했다.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운 친우라 생각했던 황보휘.

그는 심지어 사촌 동생이었던 황극린을 죽이려 했었다. 그 모습을 직접 본 서문취아는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평소 자신에게 보여 주던 친근한 미소와는 전혀 다른 눈빛. 질투와 의심 그리고 증오가 담긴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살수를 펼치던 그 모습에 서문취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엔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그 사건을 계기로 성숙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서문세가는 항주에서 존경받는 무가였으며, 서문취아의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서문취아는 결국 깨달았다.

세상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오랫동안 항주에서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던 서문세가라도 거대한 악의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악의를 가진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선 그 스스로가 악이 되어야 한다.

서문취아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다.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이제껏 그녀가 살아온 삶을 버리려 했다.

‘왜.’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 백의를 입은 미공자가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있다. 그의 주변으로 각양각색의 복색을 한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서문세가에서 치르는 장례인 만큼 꽤 많은 무림인들이 방문했다.

백의를 입은 사내가 장례식을 망치려고 했다면 모두가 그를 막으려 했으리라.

그러나 모두가 열광하고 있었다.

저 사내에게 말이다.

‘저들이 대체 뭘 했길래?’

설마.

그럴 리는 없다. 괴한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아무리 그들이 악에 물들었다고 해도 장례식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려 했다고? 그걸 저 백의 사내가 막아 냈다고?

‘그건 말도 안…….’

서문취아의 생각이 멈추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이가 있었다. 평범한 복색을 했지만,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백발노인이 검을 휘두른다.

‘저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괴한들과 맞서 싸우던 아버지. 그는 짙은 청록색의 검강(劍罡)을 휘두르던 괴한에게 쓰러졌다. 괴한은 아버지를 비웃었다. 명문가의 가주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냐고. 부끄러운 줄 알라며 타박하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노인의 검에 깃든 청록의 검강은 그보다 더 진하고 매서웠다. 당장이라도 백의 사내를 두 동강 낼 것 같다.

“조심!”

서문취아가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왜인지 아무도 걱정하는 이가 없다. 서문취아가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만 해도 사방에선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지금은 환호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쿠릉-!

무언가 익숙한 얼굴의 백의 사내.

그가 손바닥을 펼쳤다.

쿠르으으응-

하늘이 진노하여 벼락을 내리는 듯, 창공이 갈라질 것만 같은 굉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찬란한 태양과도 같이 감히 마주치지 못하는 광채가 어둠을 몰아낸다.

뇌룡(雷龍).

사내의 손에서 뻗어 나간 뇌룡은 먹이를 집어삼키듯 백발노인을 꿰뚫었다.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자건조차도 막아 내지 못했던 청록색의 검강은.

뇌룡의 앞에서 그 어떤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서문세가를 피로 물들인 그 무공은 사내의 손짓 한 번에 으스러졌다.

백발노인이 쓰러지는 순간.

사내가 시선을 돌린다.

그의 시선은 서문취아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그녀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가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침착하게 생각해 보았다면 뇌전으로 황극린을 떠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서문취아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 * *

“그 냄새를 저도 기억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할 것이오.”

“그렇습니까…….”

시체에 남겨진 내력의 냄새. 흐릿했지만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나 그들의 내력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짠 냄새가 깃들어 있다고 할까? 황극린은 살수 시절 바다에 가 본 적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물결. 쉼 없이 몰아치는 파도. 그곳의 냄새가 딱 그러했다.

용왕궁.

그 이름과 잘 어울리는 내공심법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내력에 희미한 독기도 담겨 있었다. 아마 청록의 강기에 조금 스치기만 해도 내성이 없는 이들은 금방 탈진하여 쓰러질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한 무공은 없기에 그들의 무공에도 약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내공을 쌓는 데 오래 걸린다거나.

혹은…….

“헙!”

서문청이 옆구리를 찌르자 서문취아가 당황한다.

“황 대협과 친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왜 한 마디도 못 하고 있느냐?”

“제, 제가 언제요? 그, 그리고 한 마디는 했는데요. 아까 감사하다고 분명히…….”

최대한 목소리를 죽였지만, 황극린의 귀에는 다 들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황극린이 그녀를 바라보자 흘끔 시선을 맞추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쑥스럽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과거에 보았던 어린이 황극린과는 전혀 다른 외모. 당연히 당시의 서문취아는 황극린을 이성으로 바라보고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왜 서문세가를 공격한 것인지 짐작하고 있소?”

황극린의 말에 조금 들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서문청의 얼굴에 슬픔이 깃들었고, 서문취아의 얼굴에는 독기가 어렸다.

“그게 의문입니다. 대체… 대체 왜 그들이 본가를 공격한 것인지. 재물을 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밤중에 담을 넘더니 본가의 식솔들을 베어 넘겼습니다.”

“인원은 몇이었소?”

“스무 명가량 되었습니다.”

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하지만 서문세가가 결코 약한 가문은 아니었다. 당시 황씨 가문이 서문세가와 연을 쌓으려 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황씨 가문은 당시 강서성에서도 세 손가락에 드는 재력을 가진 가문이었다. 하필이면 용왕궁으로 의심되는 괴한들과 싸운 것이 문제였다.

황극린의 기억 속에서 용왕궁은 구파일련이나 용성과도 수많은 마찰을 빚어 왔지만, 황극린이 죽는 순간까지도 토벌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물론, 척살대에 쫓기던 황극린이었기에 제대로 정보를 수집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럼 장례식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황극린의 말에 두 남매가 부들부들 떤다.

그런 참혹한 학살이 장례식을 치르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대체 왜…….”

세 사람 모두가 침묵한 채로 고민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장례식에서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었을까?

‘서문세가의 장례에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건가.’

잠깐 둘러보았던 황극린이었지만, 딱히 다른 부분은 없었다.

슬픔이 가득하고 모두가 애통한 눈빛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그렇게 고민하던 황극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간다.

‘혹시.’

장례식을 치르게 유도하려고 학살을 벌였다는 것도 추측이긴 하지만, 그 추측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장례에는 평소에 보지 못한 손님들이 방문한다. 데면데면한 사이라도 예의상 고인의 명복을 빌어 준다.

하물며 가문의 중요 인사라면?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하더라도 장례에 참석하지 않겠는가?

“혹시 서문세가의 태상가주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셨소?”

“……!”

두 사람이 움찔한다.

서문청이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할아버님… 아니, 태상가주께서는 이십 년도 전에 금분세수(金盆洗手)를 하시곤 가문을 떠나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 알 길이 없어 비보를 알리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렇소?”

그 대답으로 추측의 가능성이 더 커졌다.

용왕궁이 만약 서문세가의 태상가주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도 태상가주를 찾지 못하여 이런 흉측한 방법을 썼다면?

“혹시 태상가주님과 이번 일이 관련이 있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말이오.”

황극린이 추측한 바를 이야기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쉽게 납득하진 못했다.

서문세가의 태상가주, 그러니까 전대 가주는 두 사람의 아버지 서문자건보다 더 평범했다. 평범함이라 함은 딱히 무인으로서 그리 큰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말년에 절정의 경지를 넘어 초절정의 초입에 들긴 했으나 서문세가의 가주치고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괴한들이 대체 태상가주에게 무엇을 얻으려고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왜?’가 빠져 있으니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추측일 뿐이오.”

“아닙니다. 황 대협의 말씀이라면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요. 본가의 무인들에게 명을 내려 태상가주님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조금 전 싸웠던 괴한들을 심문하면 더 좋겠지만, 그들은 모종의 자살 수법으로 모두 숨통이 끊어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흑살문의 살수 중에서도 삶에 애착을 가진 살수가 여럿 있었다. 황극린은 인간에게 삶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본능적인 부분인지 알고 있다.

그도 알고 있지 않은가?

단전이 깨져 가는 와중에도 살아남기 위해 척살대를 따돌리고 계속 도주했다. 미련과 집착이 없었다면 그 또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리라.

“저기… 황 대협.”

“예.”

이제껏 한 마디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연 서문취아.

왜인지 황극린에겐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어릴 땐 친근하게 다가가 장난을 치기도 했었지만, 지금 그는 천하를 진동케 하는 절대고수가 되었다. 그것뿐 아니라 몸집이 너무 커 버렸지 않은가? 황씨 가문에서 보았을 땐, 그녀보다 키가 작고 잘 먹지 못해 볼이 홀쭉한 안쓰러운 아이였었다.

“이런 질문이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왜…….”

서문취아가 황극린에게 용기를 내서 질문하려 할 때.

“가주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밖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그, 그분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분?”

“태, 태상가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두 남매의 시선이 황극린에게 돌아가는 건 당연했다.

입이 자연스레 벌어지고 눈이 튀어나올 듯하다. 경악과 감탄 그리고 존경의 시선마저 담겨 있었다.

‘대체…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신 거지?’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야. 이분은……!’

황극린이 목을 긁적였다.

사실 그가 이런 추측을 하는 것은 그가 남들보다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서문세가의 태상가주.

이전까지는 서문세가의 역대 가주와 비교해도 그리 뛰어나지 않은 수준으로 평가받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금분세수를 무르고 다시 나타났을 때 무림은 깜짝 놀랐다.

겨우 은퇴할 때가 되어서야 초절정의 경지에 들었던 노인이 화경의 고수마저도 이룩하기 어렵다는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닿아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 그런데 가주께서 확인해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태상가주님께서…….”

“확인해야 한다니? 태상가주께서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신 것이냐!”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일단 나가서 확인해 봅시다.”

“예! 황 대협!”

서문청과 서문취아가 동시에 대답한다.

만약 두 사람이 세상의 풍파에 닳고 닳았다면 황극린의 존재 자체를 의심했을 수도 있다. 그가 장례식에 나타나서 바로 객으로 위장한 괴한들을 찾아낸 것도 모자라 태상가주의 등장까지 맞히었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닌가?

서문청이나 서문취아나 혈육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하여 독기를 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갑자기 철두철미한 군사(軍事)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에게 황극린은 장례에 숨어든 괴한들을 잡아 처죽인 은인이었고.

그들을 돕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내어 준 귀인(貴人)이었다.

황극린이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나중에 조언이라도 해 줘야겠군.’

가끔 살아가다 보면 작은 것 하나라도 챙겨 주고 싶은 사람과 만날 때가 있다. 현재 황극린은 서문세가에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쪽이었지만, 왜인지 손해를 본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서문취아가 과거에 황극린에게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챙겨 주려고 했던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 있어 그럴 수도 있었다. 아무려면 어떠리. 황극린은 그들을 도울 힘이 있었고, 그는 그러고 싶었을 뿐.

그것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