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신분과 배경
홍장회풍 봉장풍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이유 자체가 남들보다 우월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를 증명한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또 그에겐 열등감이 있었다. 무공을 성장시키고 높은 자리에 올라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는 평균보다 부족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내를 보니 한마디 해 주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잘생기면 뭐 하나?’
그는 절강성지부의 부지부장 자리에 올랐다.
젊은 사내는 당연히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리라. 선심 쓰듯 그를 용서해 주고, 조언만 적당히 해 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면 우매한 인간들도 외모보다는 능력이 더 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젊은 사내는 얼굴에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억울해하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냥 부지부장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뒤에 있는 서문청에게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명백한 무시였기에 봉장풍은 속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달구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허, 이놈이 감히?’
젊은 사내.
그러니까 만뇌문의 장로인 황극린은 이런 경험은 수없이 겪었다. 심지어 감정이 절제된 살수들마저 그의 얼굴을 질투할 때도 있었고, 흑살문에 들어가기 전에는 남색을 밝히는 미친놈에게 대항하려고 처음 사람을 죽였었다.
이 정도 시비로 황극린의 화를 돋우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갈 생각은 없긴 했지만 말이다.
“서문청 소협이십니까?”
황극린은 서문청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과거 용봉지회 예선에서 서문청이 비무하는 걸 지켜보았었다. 나이에 비해 꽤 수준이 높았던 건 사실이었지만, 칠룡오봉에 들어갈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용봉지회에서 봤을 때보다 성숙해 보였다. 애초에 그와는 접점이 없었지만, 서문취아라는 여인 덕분에 서문세가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무림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이는 황극린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었다.
그런 순수한 호의는 황극린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부모님을 잃고 호의를 가지고 접근해 오는 모든 사람을 경계했었다. 마치 길고양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게 된 지금은 그런 순수한 인간의 호의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사람답게 살아가려 한다.
황극린이 흑살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문파를 만들면서 생각해 왔던 부분이었다. 회계산으로 향하며 항주로 온 것은 무언가 있다는 직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인연이 생각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소협께서는 누구신지……?”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 방문한 손님. 당연히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본다. 황극린의 얼굴이 중원에 꽤 알려지긴 했지만, 그간 그는 대부분 치렁치렁한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당연히 황극린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멈추시오.”
봉장풍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황극린을 가로막았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감히 나이도 어린 놈이 잘난 얼굴을 믿고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최소한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소?”
몰랐다는 듯이 바라보는 황극린의 얼굴에 봉장풍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무림맹 지부의 부지부장이라는 걸 알면 저 당당한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질까? 무슨 말로 변명하려 할까?
이제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혹, 무림인이신가?”
“그렇소만.”
“그렇군. 어디 출신인지 궁금하오만?”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아챈 서문청이 황급히 나선다. 장례를 치르는 와중 소란을 만들 수는 없었다. 솔직히 그는 지금 부지부장의 태도가 영 께름칙했다. 아무리 독기를 품고 복수를 해야 한다지만… 솔직히 저 잘생긴 공자가 소란을 피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서문세가의 손님으로 왔다.
부지부장의 권세가 절강성에서 대단하다고 하지만, 이곳의 책임자는 서문청이었다. 슬픈 날에 이런 일로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해가 있는 듯한데, 여기서 그만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다른 분들도 시선을 거두어 주시지요.”
부지부장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분명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살벌하다. 사람을 물린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부지부장이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건 것 같지 않은가. 부지부장이 보기에 서문청은 아직 애송이였다. 어른인 척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모르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구려. 마치 내가 잘못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말이오. 난 장례를 소란스럽게 만든 이에게 조언하고자 했을 뿐이오. 그런데 저 사내는 내 말을 무시하였지. 절강성지부의 부지부장으로서 참을 수 없었소. 나에게 한 행동이 곧 무림맹에 한 행동이니 말이오.”
은근슬쩍 신분을 밝혀 버렸다.
부지부장 봉장풍이 은근슬쩍 황극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반응을 기대했다.
대부분 부지부장의 정체를 모르고 거들먹대던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봐 왔다. 갑자기 허리를 굽혀 인사하거나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버벅대는 덜떨어진 인간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눈물까지 머금는 사람도 있다.
저 얼굴만 잘생긴 사내는 어떤 반응을 보여 줄까? 벌써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그게 무림맹에 대한 모욕이란 말이오?”
허, 그런 반응이라 이거지?
가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부류도 있기 마련이었다. 조금 성가시긴 했지만 오랫동안 아랫사람을 부려 본 봉장풍의 경험으로 저런 마음만 앞서는 애송이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트집을 잡으면 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오? 항주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듣지 못했는데……. 소가주인 서문 소협께서도 모르는 얼굴인 것 같고 말이오.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겠지만 무림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을 겪다 보니 알 것 같소. 범인은 말이오.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버, 범인!?”
“아, 이 소협이 범인이라는 말은 아니오. 단지 조금 의심된다는 것일 뿐이니까.”
자, 어떠냐.
죄라는 건 붙이기 나름이었다. 부지부장이 죄가 있다고 하면 그냥 지부로 끌려가서 심문을 받는다. 뭐, 범인이 아니다? 그럼 다행이라고, 그간 미안했다고 사과만 하면 된다. 권력을 가졌다는 건 그런 것이다.
당연히.
황극린은 계속 신분을 숨겨 저딴 망발을 지껄이게 둘 생각은 없었다.
“요즘 내가 만나는 무림맹의 인간들은 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군.”
정파 무림의 수호자라 불리는 무림맹.
지부의 간부들이 특히 문제였다. 그들은 본성의 명령에 따르긴 하지만, 그들이 관리하는 지방에선 독립적으로 사건을 판단한다. 사실 무림맹에 직접 보고가 올라가는 일은 많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정신이 오락가락?”
“난 황극린이다.”
“네놈이 누군지는 관심 없다! 감히 무림맹을 모욕……?”
그렇게 소리친 봉장풍이 의아함을 느꼈다.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봉장풍은 분명 아랫사람들을 다룬 경험이 많았다. 하지만 당연히 상관을 모셔 본 경험도 많았다. 그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상관에게 지적을 받고 혼이 난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느꼈던 조용한 오싹함.
“잠시만, 누구…….”
뭐라고 했지?
황극린이라고 했던가? 황극린이 누구였더라.
“파, 파천뇌권?”
뇌리에 번개가 쳤다.
그가 누군지 생각이 나 버렸다. 젊은 나이에 화경에 이른 절대고수. 만뇌문의 장로. 그 소림사마저 만뇌문이 개최한 만무지회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한 일이 있었다.
‘대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당연히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사천성에 있는 고수가 서문세가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유흥거리로 젊은 사내의 자존심을 짓밟고 자존감을 느끼려고 했던 부지부장 홍장회풍이다. 그런데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황극린에 대한 소문은 무림에 파다하게 퍼졌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다. 이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였다.
“정말… 정말 만뇌문의 황극린 대협이십니까?”
절로 나오는 존대.
심지어 비굴하기까지 한 표정을 본 서문청이 혀를 내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후배에게 훈계를 내리는 엄한 무림 선배의 얼굴로 뒷짐을 지고 있던 사내였다. 그런데 한순간에 태도가 뒤바뀌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서문청은 무언가 인간의 본성이 본래는 악한 것이 아닌지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정파 무림의 심장이라 불리는 무림맹, 절강지부 부지부장이 고작 저런 인간이었던가.
황극린은 부지부장의 말에 긍정했다.
“그래.”
“대체 왜……?”
“왜 여기 왔냐고 묻는 건가?”
사색이 된 얼굴로 부지부장이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닙니다! 제가 황 대협을 몰라뵙고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부지부장은 이런 일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 소란이 생겨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이들이 혀를 찬다. 부지부장은 스스로 똑똑하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의 오만방자한 행실을 일찍이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가던 봉장풍에게 크나큰 시련이다.
소문에 따르면 황극린은 사람을 해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거기다 황극린은 무림맹의 사람이 아니다. 용성 소속이기에 무림맹의 권위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 소림사도 한 수 접어 준 게 만뇌문 아니던가?
그렇기에 사과한다.
비굴하다 욕하더라도 지금은 그래야 하는 거다.
“이런 자리에서 피를 보긴 싫군.”
“그, 그런…….”
그럼 이곳에서 벗어나면 피를 본다는 말인가? 설마 이런 일로 죽이지는 않겠지?
“가라. 만뇌문을 모욕한 대가는 곧 치를 거다.”
“그, 그게…….”
말실수.
그는 별것 아닌 일로 무림맹을 모욕했다며 들먹였다.
그렇다면 그런 말은 되돌아올 수도 있었다.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못하는 법이니까. 물론, 상대가 보잘것없다면 주워 담는 것도 가능하긴 하겠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화경에 이른 절대고수가 아닌가?
“여기서 끝을 보고 싶은가?”
“아, 아닙니다!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꼭 지부를 찾아 주십시오. 제가 지은 벌은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커흑!”
기세등등하게 후배를 훈계하려던 부지부장이 비 맞은 개처럼 축 늘어져서 도망간다. 그러던 중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가관이었다.
황극린이 몸을 돌려 서문청을 바라본다.
“저, 음…….”
서문청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황극린은 한 번이라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고수였다.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부지부장처럼 말실수할까 걱정되기도 한다.
“서문세가에서 벌어졌던 참극에 궁금한 것이 있소.”
그 말에 서문청이 정신을 차렸다.
“예, 뭐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것은 뭐든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실례일 수도 있으나, 괴한들에게 당한 시신을 볼 수 있겠소?”
“무슨 이유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흉수를 찾기 위해서요.”
잠시 고민하던 서문청.
그는 결단을 내렸다. 황극린이 악의적인 의도로 서문세가에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서문청은 서문취아가 어릴 적에 황극린이라는 이름을 수없이 언급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 황극린은 갓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였다.
화경에 이른 지금에는 거의 입에 담고 있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소문처럼 악독한 인간이 아니다. 서문취아가 말한 황극린은 쑥스러움이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라고 했었다.
물론, 지금은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 버렸지만 말이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 * *
눈을 뜬다.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다. 사람들이 허겁지겁 도망간다. 화마가 일어 전각이 불에 탔다. 환영과도 같은 그것이 눈에 맺혀 있다. 이게 환각이라는 것을 알아챈 서문취아는 눈을 비볐다. 이런 상상 속에서 파묻혀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전각을 태우던 화마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비명과 허겁지겁 달려가는 모습은 선명하다. 이건 환각이 아니란 말인가?
분명 장례를 치르고 있는 와중이었다. 오라버니의 조언대로 잠깐 눈을 붙이러 왔었다.
‘설마!’
서문취아가 황급히 도(刀)를 쥐고 달려 나간다.
괴한들이 다시 찾아왔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싸워야 한다. 다시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소란의 중심지에 도착한 서문취아.
그녀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껴야 했다. 분명히 비명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어……?”
도를 두 손으로 쥐고 나아가던 서문취아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백의를 입은 한 사내의 앞에 열 명이 넘는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백의를 입은 사내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