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절강성
동려(桐廬)현.
황극린에게 동려대협이라는 별호가 생긴 장소였다. 악덕 고리대금업으로 동려현의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워 인간을 팔아먹던 용비문이 있던 곳이다. 오랜만에 들렀지만, 딱히 감회가 새롭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백온후나 백건악이 지금보다 어렸던 것을 이 장소에서 처음 보았던 기억이 잠깐 들었을 뿐.
황극린은 사천성에서 절강성까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줄곧 달려왔다. 아무리 화경에 이른 고수라도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황극린은 운기조식도 할 겸 동려현 중심부의 고급 객잔에서 방을 빌렸다.
고급 객잔이다 보니 주방에서 요리하여 방까지 대령한다.
‘우와! 저걸 한 사람이 다 먹을 수 있나?’
점소이 세 명이 황극린의 방에 접시를 날랐다. 황극린은 거의 장정 다섯 명이 와도 쉽게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요리를 주문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잘생기긴 했구나. 부럽다.’
황극린의 머리가 꽤 자라긴 했지만, 눈을 가릴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꼭 불러 주세요, 나으리!”
“고맙구나.”
점소이의 인사를 받은 황극린이 요리를 먹어 치운다.
누군가 보았다면 저렇게 빨리 손과 입을 놀리는데도, 그 움직임에 품위가 담겨 있다며 놀랐으리라. 정갈한 자세로 금방 식사를 마친 황극린.
‘취수혈정을 먹은 뒤로는 먹는 양이 확 늘어났군.’
특히 전투가 있거나 몸을 많이 쓰면 식욕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아마 몸의 회복력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식사를 제한하고 내공심법을 운용해도 굶주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뭐, 평소 먹던 것보다 조금(?) 더 먹으면 되는 거라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식욕이 늘어나는 대신 이러한 회복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을 능력이었다. 식사를 마친 황극린이 눈을 감고 내공심법을 운용한다. 내공심법은 호흡으로만 주변의 내력을 빨아들인다.
하지만 최근 황극린은 피부를 통해서도 주변의 기운이 감응하여 달라붙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혈풍뇌전신공을 개조하면 운기조식을 하지 않고도 내력을 보충할 수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단전을 채워 나가고 있을 때.
집중으로 예민해진 황극린의 귀에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황극린은 의도적으로 소리를 듣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운기조식을 할 때는 무림인이 가장 취약해지는 때이다. 화경에 이른 고수였기에 방심은 금물이다.
“서문세가가 풍비박산이 났다는구만.”
“대체 왜?”
“모르겠네.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귀신이 나타나서 죄다 죽여 버렸다는군.”
“푸른 눈동자? 색목인이라는 건가?”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다는데? 정말 귀신이 아닐까?”
“예끼, 이 사람아. 그냥 다 하는 소리지! 진짜 귀신이 있을 것 같은가?”
황극린이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라.”
귀신이 있다고는 황극린도 믿지 않는다. 인간을 초월한 감각임에도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 명명되는 것들과는 조우한 적이 없었으니.
하지만 그는 푸른 눈동자에 대하여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무림을 한바탕 헤집어 놓았던 집단. 당연히 현재의 이야기는 아니다. 황극린이 살수로 활동하던 당시에 흑살문의 정보통으로 입수했던 것이다.
“벌써 활동할 때가 됐던가?”
놈들이 어떠한 결말을 맞았는지 황극린도 모른다.
사실 흑살문의 활동 반경과 겹치지 않던 놈들이었고, 황극린이 척살대에게 쫓길 때부터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다만, 그들이 중원에서 사망교에 버금가는 학살을 자행했다고는 알고 있다.
“용왕궁(龍王宮).”
그들에겐 악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한번 확인해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들이 주로 활동하던 곳은 절강성이다. 그리고 절강성에는 회계산이 있었다. 관련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공교로운 일. 그런 상황에서 황극린은 직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 * *
“으아아아!”
“흐으윽, 철우야아!”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서문세가. 오대세가라 불리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절강성 항주에서는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가문이었다. 거기다 백성들 사이에서 평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힘을 가진 자들은 으레 부패하기 마련이었지만, 항시 가문을 단속하여 무인의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게 했다.
그렇기에 서문세가는 오대세가의 반열에 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서문세가의 직계들은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다.
“취아야, 눈을 좀 붙이거라.”
의문의 복면인들이 습격한 지 보름이 지났다.
무림맹 절강성지부의 무인들도 함께 배후를 찾아내려 했지만,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괴한들에게 당한 서문세가 식솔들의 시체에 남은 검흔으로는 그들의 정체를 밝혀 낼 수 없었다. 지독히도 음독한 것 말고는 알아낸 것이 없다.
서문취아는 운이 좋게도 목숨을 부지했지만, 형제자매들과 아버지를 잃었다.
“더 수련했어야 해요. 제가 조금만… 조금만 더 강했다면…….”
서문취아의 오라비인 서문청이 한숨을 내쉰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강해질 필요가 있을까? 적당히 항주의 치안을 지킬 정도만 되면 되지 않을까? 과욕은 불행을 부른다는 서문세가의 가르침. 지금 생각하면 전혀 의미가 없었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란다. 기회는 있다. 십 년이 걸리더라도 복수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아니 된다. 그러니 쉬도록 해라. 몸을 아껴야지.”
숨을 쉴 때마다 움직이는 우락부락한 근육. 세심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 것 같은 서문세가의 대공자 서문청이었지만 의외로 섬세함이 있었다.
다짜고짜 쉬라고 하면 서문취아는 쉬지 않을 거다.
그러니 쉴 이유를 만들어 준다. 서문취아는 순수한 성격이었지만 멍청하진 않았다. 오라버니가 배려했다는 걸 깨달았고,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감사해요. 잠시 눈을 붙이고 올게요.”
“그러려무나.”
서문청이 떠나가는 서문취아를 보며 슬픈 눈을 한다. 서문세가에서 서문취아는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한 막내였다.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무당파에 다녀온 이후 갑자기 성숙해진 면모를 보여 주긴 했었지만, 그래도 서문청의 눈에는 귀여운 막냇동생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떠나가는 서문취아의 얼굴에는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세상을 저주하는 눈동자. 그녀의 눈에 그러한 감정이 깃들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알 수 없다.
이유라도 알면 좋을 것 같다. 갑자기 나타난 괴한들은 서문세가를 습격하여 수많은 사망자를 만들어 냈다. 단순히 무공을 익힌 자들만 죽인 것도 아니었다.
“하아.”
이제는 가문의 대공자로서, 소가주로서.
아니, 가주로 살아가야 하는 서문청은 자연스레 한숨을 내뱉었다.
장례를 치를까 말까도 고민했다.
복수를 끝마치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방법도 생각했었지만, 가문 어르신들은 일단 장례를 치르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장례를 치러 이 참상을 중원 전역에 알려야 한다고 말이다.
“소가… 아니, 가주님. 절강지부의 부지부장께서 오셨습니다.”
“아, 그래.”
서문청이 움직인다. 쉴 틈이 없었다. 특히 절강지부에서 온 손님은 서문청이 직접 맞이해야 한다.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쁘실 텐데 이리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장회풍(紅掌廻風) 대협.”
인심 좋은 얼굴을 한 장년인이 슬픈 눈동자를 한다. 홍장회풍 봉장풍. 무림맹 절강성지부의 부지부장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오……. 서문 대협께서 이리 가실 분이 아니셨는데, 하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 나간다.
봉장풍이 위로하고, 서문청이 한탄하는 식이었다.
이각 넘게 대화를 나눈 두 사람. 봉장풍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제 난 가 봐야겠소. 장례를 잘 마무리하길 바라오.”
“이리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서문 가주와의 인연도 있는데, 당연히 찾아와야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뭐든 도우리다.”
서문청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과거의 그였다면 찾아온 것만으로 감사하다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기회가 올 때 잡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부지부장님.”
“말하시오.”
“지부로 찾아가서 말씀드릴 것이었는데, 혹시 무림맹 본성의 도움을 받아 배후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지부의 무인들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오?”
“그게, 보름이 지났는데 전혀 흔적을 찾지 못하여서 말입니다. 무림맹 본성의 고수분들이라면 어쩌면…….”
“하아…….”
부지부장이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한숨을 내쉰다.
“사실 요즘 무림맹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말이오. 사천성의 여러 문파에 혈마교도들이 숨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않소?”
“예,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무림맹 본성에 난리가 났다 들었소. 일단 인력 지원을 요청해 보겠으나…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소.”
과거의 서문청이었다면 그런 말을 듣고 미안함에 물러났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렇다면 혹시 본문에서 일어났던 학살의 배후에 혈마교가……!”
“내가 판단하기로는 아니오.”
부지부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혈마교는 최대한 숨으려 하지 않겠소? 그런데 이렇게 사건을 키운다? 말이 안 되는 일이오.”
“그건 그렇지만… 혈마교의 이름을 대면 무림맹에서 아무리 바빠도 고수분들을 파견해 주지 않을…….”
“어허! 서문세가의 일이 아무리 딱하다지만 거짓을 보고하라는 말이오?”
“그, 그건… 아닙니다.”
서문청을 위로하던 부지부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니 서문청이 당황한다. 그런 서문청을 보고 부지부장이 미안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일단 기다려 보시오. 내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고 오겠소.”
“예… 억지를 피워 죄송합니다.”
왜 안 되냐고 떼를 쓸 수 없다.
서문청은 어린아이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이제 그가 서문세가를 이끌어야 한다. 그렇기에 절강지부의 부지부장이라는 권력자에게도 비위를 맞춰야 했다.
‘쯔쯔.’
그런 서문청을 보고 부지부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서문세가는 목석같았다. 최소한 청탁을 하려면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지 않은가?
무림맹이 이런 사건을 묵과할 리는 없었지만, 그들 또한 넓은 중원을 모두 관리하다 보니 일 처리가 조금 늦어질 수도 있었다. 그걸 더 빠르게 하는 것이 바로 처세였다. 아직 서문청은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애송이일 뿐이다. 뭐, 큰일을 겪었으니 조만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될 테지만.
부지부장은 그런 마음을 숨긴 채로 서문청을 위로했다.
“아니오. 힘든 일을 겪었으니 다 이해한다오. 마음을 잘 추스르고 다음에 봅시다.”
“예에…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서문청이 부지부장을 배웅하고 있을 때.
장원 입구가 소란스러워진다. 엄숙하고 슬픈 장례 현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탄성이 들려왔다.
“꺄악! 뭐, 뭐야?”
“너, 너도 봤어?”
“무슨 사람 눈빛이…….”
“허어, 저리 잘생긴 사람은 난생처음 보는군!”
“미쳤구나!”
서문청과 부지부장 홍장회풍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곳으로 걸어간다. 대체 누가 왔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가? 소란의 중심에 도착한 두 사람.
“…….”
“허.”
두 사람 또한 멍하니 젊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대충 넘긴 머리와 새하얀 의복. 따져 보면 멋을 위해 꾸몄다고 생각할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했던가? 사내의 얼굴이 대충 넘긴 머리와 하얗기만 한 의복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절강성 부지부장 홍장회풍이다.
“어허! 엄숙한 자리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내공이 담긴 목소리에 소란이 멎었다. 물론 젊은 사내의 얼굴과 그 눈빛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수준이기는 하나,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도 계속 난리를 칠 사람은 없었다.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흘끔흘끔 사내를 훔쳐보는 눈빛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부지부장이 앞으로 나선다.
잘못한 것은 황극린을 보고 소란을 떨어 댄 사람들이었지만, 부지부장은 왜인지 저 젊은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노가 치밀 정도로 잘생겼다. 왠지 모르게 한마디 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소란을 피우지 마시오, 장례를 치르고 있으니까.”
젊은 사내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부지부장은 그가 문제라는 식으로 말했다.
당연히 사내는 반응을 보일 거다. 성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부지부장도 조금 난감할 테지만…….
그의 출신과 직책을 밝히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중원 무림을 지배하는 무림맹. 그리고 그 무림맹의 뜻을 수행하는 지부.
지부에서 두 번째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젊은 사내는 저토록 잘생긴 얼굴을 가졌음에도 세상이 쉽지 않다는 걸 배울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