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협상
“마령이 교섭에 성공할까요?”
혈마교 부교주 섭혼요희(攝魂妖姬) 백란.
여인의 몸으로 혈마교 부교주 자리에 오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부교주의 자리에 올랐다. 거기다 그녀는 혈마교의 부교주 중에서도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따르는 건 제1공자 마영비.
소교주 후보들 사이에 재능은 거의 차이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섭혼요희가 보기엔 마영비가 최고였다. 그는 타고난 마인이었다. 당장 다른 소교주 후보들을 압도할 수 있음에도 경쟁을 즐기기 위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섭혼요희의 질문에 마영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 그렇겠지.”
“위험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위험한가?”
“마령은 저와 많이 닮아 있답니다. 그 아이가 날개를 단다면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교주님은 소교주 위에 대한 의중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으시니 혹여나 교주님께서 마령 그 아이의 공적을 높게 평하신다면…….”
섭혼요희의 걱정은 당연했다.
혈마교주의 의지는 절대적이었다. 마령은 부교주의 선택을 받지 못했음에도 공적을 쌓아 나가고 있었다.
마영비는 더 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본교의 생리가 무엇인지 잊었는가?”
“예, 알고 있답니다. 강자존이지요.”
“자네가 보기엔 내가 령이 그 아이에게 패배할 것 같은가?”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 결국 내가 소교주가 된다. 그것 변치 않는 사실이지. 마령이 나와 경쟁할 수 있다면 기회를 줄 뿐이다.”
섭혼요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저런 태도가 마영비를 더 강하게 한다. 어쩌면 저런 광오한 여유가 혈마교주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가능성일지도.
“공자님의 가르침을 새기겠습니다.”
“그래, 그런 의미에서 비무를 하지. 자네가 내게 가르침을 줄 시간이라네.”
마영비의 말에 섭혼요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매사에 여유가 넘쳤지만 그렇다고 게으르진 않았다.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운다. 그리고 모든 걸 체화하려 했다.
그는 노력하는 천재의 표본이었다.
그렇기에 부교주 섭혼요희는 마영비를 따른다. 그를 후대의 교주로 추대하기 위해서.
‘시간만 주어진다면 당신은 최고의 교주가 되겠지요.’
천하제일인.
아니, 그는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될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시간을 단축하는 게 섭혼요희의 사명이라 할 수 있었다.
마령이 돌아오기 전까지 마영비는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
* * *
수라천가.
마도삼가 중 하나. 혈마교에는 마도삼가뿐 아니라 많은 가문과 파벌이 존재했다. 혈마교는 완전히 통일된 문파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건 혈마교를 잘 모르는 이들이 하는 말이다. 혈마교 내에서도 세력 다툼은 존재했다. 서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비슷한 부류가 뭉친다.
같은 무공을 익혔을 수도 있으며.
같은 피가 흐를 수도 있었다.
수라천가는 그러한 가문 중에서도 가장 큰 권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수라천가의 가주 마랑천살도(魔狼天殺刀) 혁련광은 혈마교를 지탱한다고 할 수 있는 거대 가문을 이끄는 마인 중 마인이었다.
혁련광은 눈앞의 젊은 여인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혁련소를 처형하겠다?”
“예, 그는 혈마교에 큰 해를 끼쳤답니다. 감히 수라천가의 가주께도 허락을 받지 않고 계략을 꾸몄지요.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혈혼단주 혁련소.
그는 만뇌문과 소림을 이간질하여 무림의 정세를 어지럽히려 했다.
하지만 정말 그게 혁련소만의 생각일까?
계획은 혁련소가 세웠다고 하더라도, 혁련광이 그걸 몰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무언의 승낙이라고 할까? 수라천가주의 명으로 계획한 것이 실패했다면 혈마교 내에서 수라천가의 입지가 흔들린다.
혁련광은 아마 거기까지 고려하고 있지 않았을까?
마령은 그렇게 생각했기에 수라천가주를 은근히 도발했다. 그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수라천가를 위해 둘째 아들을 버릴까?
“그러도록.”
무심하게 아들의 죽음을 허락하는 혁련광.
마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수라천가의 가주는… 아니, 혈마교의 교도들은 대부분 이러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친혈육조차 내버릴 수 있다. 그걸 알아도 패륜이라 욕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했을 뿐.
“예, 그리고 만뇌문에서 본교에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파열고 백 마리를 요구했습니다.”
“백?”
파열고.
그건 수라천가주마저도 경계하는 고독(蠱毒)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파열고를 다루는 이마저 놈에게 죽임을 당한다. 수라천가는 파열고를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기르고 있긴 했지만, 백 마리나 기르고 있진 않았다.
수라천가주 혁련광의 눈이 가늘어진다.
“황극린이 백 마리나 요구했다고?”
이미 혁련광은 이번 일을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묵룡천가나 야수천가의 가주가 호시탐탐 그를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으니까.
하나, 파열고 백 마리는 불가능한 요구였다.
혁련광은 백 마리라는 게 마령의 계략이라는 것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예.”
그가 혁련소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버렸듯이 마령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파열고 열 마리를 요구했다간 한 마리도 얻어 내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일단 백 마리를 불러 버린 것이다.
“그놈과 혼인이라도 할 셈인가?”
“소교주가 될 마인이 외인과 혼인할 수는 없지요.”
혁련광의 자극에도 마령은 자연스럽게 넘겼다. 그녀의 장점이다. 어떤 누구에게도 마령은 당당할 수 있었다.
“다섯.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혁련광은 굳이 마령과 기 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을 말했다. 마령도 그의 성격을 알고 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들조차 버리는 극악무도한 인간이었지만… 얍삽하게 흥정하는 성격은 아니다.
“금화도 내어 주시지요. 황 공자와 협상을 하려면 필요합니다.”
“그러지.”
“최근 수라천가에서 묵철을 발견했다고 들었는데…….”
“불가.”
협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간결한 대화가 오갔다. 일각이 지나자 마령은 그나마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황극린에게 성의를 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인질은 혈마교에 모두 돌아왔지만, 마령은 황극린과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협상을 끝내고 마령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수라천가주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불가능한 것이 있다.”
그녀가 소교주 위에 오르지 못한다고 말하는 거다.
마령은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모르는 일이지요.”
그녀가 떠나갔다.
그리고.
방 뒤편에 있는 문이 열리고, 기다란 손톱을 가진 여인이 걸어 나왔다.
혈마교의 부교주 섭혼요희 백란이었다.
“부교주,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가 따로 조치해야겠소?”
“아뇨. 그분께서는 원하지 않으실 거랍니다.”
“그렇군. 하나, 황극린은 무시할 수 없는 자요. 백골마존 부교주와 혈악 장로까지 동시에 당했소. 어쩌면 파열고도 극복할 수준의 무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분께서는 경쟁자가 강해질수록 더 성장하실 테니까요.”
“마경에 발을 디딜 마인이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수라천가주가 차가운 눈동자로 백란을 마주했다.
“언젠가 그분께서 소교주의 위에 오른다면 마령의 최후는 내가 결정할 것이오.”
감히 수라천가주를 상대로 거래를 한 마령.
소교주 후보이기도 하고 묵룡천가 출신이기도 했다. 그리고 수라천가주는 잠시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그렇다고 해도 수라천가주는 작은 원한도 잊지 않는다. 언젠간 모든 것을 갚아 주리라.
마령에게도.
만뇌문의 황극린이라는 놈에게도 말이다.
“네, 그분께 말씀드리죠.”
혈마교 내에 은밀하면서도 거대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 * *
황극린은 마령이 떠난 직후부터 파열고에게 실험을 시작했다.
파열고에 대한 설명은 귀가 닳도록 들었다. 마령은 황극린이 걱정되었는지 파열고를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며, 파열고가 피부에 붙으면 절대 내력을 끌어 올리지 말라고 조언했다.
마령의 조언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허튼 말을 할 여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황극린이 아니었다. 그는 만뇌문의 문도들에게 파열고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말라고 명령한 후, 뇌옥으로 와서 바닥에 누워 꼼지락대는 파열고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뇌옥의 입구에 성수신의가 서 있었다.
“그게 인간의 장기를 파먹는 파열고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배부름을 모르고 끊임없이 인간의 피와 살을 탐하는 놈이라 들었습니다. 이것도 과거 배교에서 만들어 낸 고독 중 하나라는 설이 있는데… 어쩌면 배교가 아니라 혈교가 만든 고독일지도 모르겠군요.”
성수신의도 모든 영물이나 고독을 알지 못한다.
그는 흑살문의 혈고독을 연구한 적이 있으니 그래도 황극린보다는 아는 게 많을 듯하여 부른 것이다. 혹시 몰랐기에 성수신의 앞을 흑주가 지키도록 했다.
파열고는 황극린의 감각조차 속일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 또한 파열고를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기에 움직임을 놓칠 가능성은 없었다.
“파열고가 정말 장로님의 피를 먹고 만족했다면… 인간의 피와 살점으로는 채울 수 없던 무언가를 가득 채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취수혈정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럴듯한 추리였다.
황극린은 성수신의가 만든 희대의 영약, 그 누구도 감히 복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극한으로 치우친 영약을 취했었다. 그것으로 황극린은 평범한 인간을 초월하는 회복력을 얻게 되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았는데, 살점이 잘려 나가도 금방 상처가 아물고, 살점을 붙이면 서로 이어지기도 했다. 뼈를 부러트려도 마찬가지였다.
“취수혈정으로 장로님의 피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파열고의 배 속으로 들어간 피가 지속적으로 ‘회복’하여 파열고의 굶주림을 채웠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성수신의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드는 결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끼워 맞추기에 불과한 답이었다.
정확하게 실험하려면 정상적인 파열고가 있어야 한다. 지금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대는 파열고들은 아무것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 혹시.”
성수신의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말한다.
“영물은 자연의 기운을 품고 내단을 형성하지 않습니까?”
“예.”
“그리고 장로님께선 여러 영물의 내단을 취하셨었지요.”
황극린은 인면지주와 만년화리 그리고 북해의 곰 영물 내단을 취했었다.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한 후에는 인간을 초월한 감각과 독에 대한 내성을 얻었다. 만년화리와 곰 영물을 취한 후에는 음양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어쩌면… 황 장로님 육신 자체가… 크음, 내단처럼 변한 게 아닐까요?”
말하고 보니 이상했다.
황극린의 단전도 아니고 몸이 내단화가 되다니?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황극린의 피에 짐작할 수 없이 순수한 ‘내력’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극린은 긍정했다.
피가 영약이 된다니?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 피를 뽑아서 영약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일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간단한 이치였다. 만약 그렇다면 황극린은 피를 뽑을수록 이제껏 쌓아 놓은 ‘체질’의 균형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뭐 적당히 뽑는다면 모를까, 빈사 상태에 이를 지경까지 피를 뽑아야지만 영약을 제조할 수 있다면 효율이 떨어진다.
뭐, 모두 다 가정에 불과했지만.
“한번 실험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급히 뛰쳐나간 성수신의가 반 시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그는 커다란 봇짐을 등에 메었고, 그의 양손에는 영초를 심어 놓은 화분이 가득이었다.
“좋은 생각이군요.”
만약 정말 황극린의 피가 내력을 품고 있다면, 영초는 반응할 것이다.
영초는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성장한다.
그리고 성수신의가 풀어 놓은 봇짐 안에는 흑주가 낳은 거미와 혈고독 그리고 작은 들짐승도 있었다.
성수신의가 열의가 가득한 표정으로 황극린에게 다가왔다.
“혈고독과 파열고가 영물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예.”
“일단 파열고에게 피를 조금 더 먹여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파열고에게 말입니까?”
“예, 영물은 내단 속에 기운이 쌓일수록 외관이 변화하지요. 장로님의 피 속에 무언가가 담겨 있다면 파열고도 변화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황극린은 지체하지 않고 묵철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흑주가 왜인지 긴장한 듯이 몸을 굳히고 있었다.
스윽.
황극린의 손가락에 상처가 나고 한 방울의 피가 고인다. 뒤뚱거리며 누워 있는 파열고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작게 벌려진 파열고의 입으로 피가 들어간다.
꿀꺽.
성수신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황극린의 귓속에 들렸다.
얼마 뒤.
파뜨드득! 파드드드득!
“이, 이건…….”
파열고의 표면이 점점 붉게 변했다. 처음엔 마치 영물이 진화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성수신의가 잔뜩 흥분하여 콧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붉은색이 보랏빛을 띠고.
종국에는 검게 변해 버렸을 때, 성수신의는 직감했다.
“터, 터, 터진다!”
파-앙!
부풀어 오른 파열고의 몸이 터져 버리며, 사방으로 진액을 쏟아 냈다. 성수신의의 얼굴에 녹색의 진액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