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뇌옥
“대체 무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혈악이 전각 내부로 들어왔다. 장내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백골마존과 마적사는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장로들까지 모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
황극린.
화경에 이른 고수. 하지만 그는 홀로 찾아왔다. 백골마존 또한 화경의 경지에 닿아 있었으니 결과는 정해진 듯 보였었다. 백골마존을 비롯하여 혈마교의 정예들이 포진해 있었으니까.
그런데 황극린은 백골마존을 비롯하여 모든 교도를 쓰러트렸다. 거기다 더욱 놀라운 점은 바닥에 널브러진 파열고였다. 만족한 듯이 통통한 배를 내밀고 뒤뚱거리는 파열고. 대체 어떻게 했길래 파열고가 저렇게 되었을까?
이유를 알려 줄 사람이 있었지만, 혈악은 감히 묻지 못했다.
지금 그따위 것을 궁금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도주해야 한다.’
황극린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그와 맞붙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혈악까지 패배하게 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일단 자신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모두 황극린을 막아라!”
“존명!”
장로 혈악의 명령에 혈마교도들이 황극린을 둘러싼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주면 혈악은 황극린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끼이!
거미 한 마리가 혈악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또 무슨…….’
몸통에 난 인간의 얼굴 형상. 한눈에 인면지주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날개까지 달린 거미는 처음 보았다. 거기다 왜인지 인간의 얼굴에 분노의 감정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인면지주가 가진 얼굴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관이었던가?
이놈도 보통 영물이 아니다.
혈악이 검을 뽑았다.
당장이라도 놈을 베어 버리고 활로를 뚫어야 한다. 짙은 검강이 검신을 물들였다. 당장이라도 인면지주의 몸통을 두 동강 낼 기세로 검을 휘두른다.
쉬익-!
하지만 인면지주의 속도는 혈악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거미줄을 타고 이동한 흑주는 혈악의 검을 피하고 거미줄을 사방에 흩뿌렸다.
“큭!”
보통 거미줄과 다르다. 손짓 한 번에 맥없이 끊어지는 보통 거미줄과 다르게 혈악 정도의 초고수도 쉽사리 끊어 낼 수 없었다. 거기다 거미줄에 닿은 맨살에서 타는 냄새가 흘러나온다. 독이 발라져 있었다. 혈악은 내력을 끌어 올려 독의 침투를 막는다.
“이놈!”
분노한 혈악이 흑주를 공격하고 있을 때.
혈악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쿠르으응-!
뇌전이 폭발했는데 어떠한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황극린은 수하들을 모두 제압했다.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투항하면 죽이진 않겠다.”
이미 황극린이 등 뒤에 도착해 있었다. 거미줄에 발이 묶인 혈악. 그는 황극린의 눈빛을 보고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 이미 백골마존까지 당한 마당에, 혈악이 싸워 봤자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차라리 밖에서 대기하지 말고 백골마존과 함께 싸웠어야 했다.
‘우리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어쩌면.
그는 교도들이 그토록 추앙하는 혈마교의 교주와 비슷한 수준에 오른 것이 아닐까?
혈악은 빠르게 판단했다.
지금은 힘을 아껴야 한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아야 했다.
“항복하지.”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는다. 동시에 그의 주먹이 혈악의 복부를 강타한다. 혈악의 허리가 크게 휘청이며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다.
“커, 커헉! 이놈……!”
“그래도 힘은 좀 빼 놔야 하지 않겠나? 흑주, 마적사와 백골존자를 묶거라.”
- 끼에에에!
알겠다는 듯이 신나게 움직이는 흑주.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황극린의 주먹이 혈악을 몇 번 더 강타한다. 혈악은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황극린의 움직임과 흑주라는 놈을 최대한 살펴보았다. 큰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잠시 뒤.
혈마교도들이 모두 제압당했다. 거미줄에 꽁꽁 묶인 혈마교도들을 보고 황극린이 말한다.
“잠시 지키고 있거라.”
- 끼끼!
황극린이 흑주를 믿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 점혈도 했고, 흑주의 뇌섬사로 묶었으니 탈출하기 힘들 거다. 이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움직일 건 아니었다. 마차를 빌려 놈들을 데리고 만뇌문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혈마교도들을 제압한 황극린이 사라지자 혈악이 겨우 입을 연다.
코와 입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에 입을 열 때마다 비릿한 맛이 속을 울렁이게 했다.
“마 공자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파열고는 어떻게 된 겁니까? 표염암향을 가지고 왔다지 않았습니까?”
파열고는 홀로 있다면 위험성이 너무 크며 제어하기가 힘들다. 파열고는 피아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염암향을 사용했다면 파열고는 그 냄새만 좇게 된다.
“…파열고는 황극린의 피부를 물었소.”
“예? 파열고를 막아 냈다는 말입니까? 호신강기를 종잇장처럼 찢어 냈을 텐데… 대체 어떻게?”
“그걸 나도 모르겠소. 파열고는 분명히 황극린의 피부를 뚫고 금방 놈의 장기를 먹어 치울 것처럼 보였소. 하지만 어느 순간 땅바닥에서 저러고 있더군.”
“…….”
“어쩌면 부교주의 말처럼 놈은…….”
확신이 없는지 제2공자 마적사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골마존과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혈악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이지를 상실하고 괴성을 질러 대고 있어야 할 혈강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뭐지? 왜 눈에 생기가 가득한 거지?’
그런 의문도 잠시.
혈악을 보며 혈강시가 ‘말’을 했다.
“천하의 혈마교도도 이렇게 무력하게 패배하는군요…….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마공도 통하지 않는군요…….”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목소리.
혈강시는 말을 할 수 없다. 놈들이 할 수 있는 의지 표현이라곤 과격한 괴성과 몸짓뿐이었다.
“부교주? 지금 혈강시가……?”
“전 혈강시가 아닙니다.”
혈강시가 되었던 공야진.
그는 기억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일하게 뇌섬사에 묶여 있지 않은 인간이었다.
* * *
황극린이 청성산에 도착했다.
그가 가장 먼저 만난 건 구자광이었다.
“이 사람은 공야진. 혈마교 부교주 동생이라더군.”
“은공의 인연께 인사드립니다.”
“…구자광이오.”
만뇌문의 교관 명견살검 구자광이 어색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보통 혈마교도도 아니고 부교주? 다른 혈마교도들은 뇌옥에 갇혀 흑주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내는 왜 여깄을까?
‘장로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렇게 생각한 구자광에게 황극린이 말한다.
“공야진은 혈마교도지만 곤륜파의 무공을 익혔다더군.”
“아, 그렇군요. 곤륜… 예?”
구자광의 눈이 부릅떠진다.
“구 대협께서는 태청기검과 태청검을 익혔다고 들었습니다.”
“마, 맞습니다만…….”
“저 또한 곤륜의 무학과 깨달음을 수학하던 한 사람의 도사(道士)였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많은 피를 손에 묻혀 스스로 도사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곤륜의 가르침은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구자광이 황급히 황극린을 바라본다.
그는 만뇌문도들이 뇌정신공과 같은 최강의 무공을 익히는 동안 계속 곤륜의 무공을 갈고닦았다. 물론 뇌불과 황극린이 그 무공을 개선해 주기도 했지만, 뇌정신공과 비교하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공야진은 곤륜 장문인의 무공을 익혔다. 네게 알려 줄 수 있다더군.”
“황 장로님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같은 곤륜의 무공을 익혔으니 구 대협과 저는 엄밀히 따지면 사형제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당연히 사형 취급을 받을 생각으로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허어…….”
황극린이 부연 설명을 한다.
“공야진의 깨달음은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육신은 ‘화경’에 오른 고수에 필적한다. 그러니 서로 도와 가며 수련하면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다.”
“화, 화경!”
백골마존은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경에 이른 고수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황극린은 공야진의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백골마존이 만약 혈강시를 다루는 무공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본신의 무위를 더 높일 수 있었으리라.
“잠시 두 사람끼리 이야기를 나누도록. 혈마교에 대한 이야기는 또 나중에 하지.”
“예, 장로님.”
“예, 옙! 장로님!”
마차를 타고 청성산으로 돌아오며 공야진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혈강시로 살아온 시간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부교주의 곁에서 있다 보니 혈마교의 비밀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황극린은 뇌불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들려주었다.
“강시라……. 괜찮겠느냐?”
뇌불이 걱정의 무엇인지 알고 있다.
“부작용이 분명히 있을 것이오. 하지만 스스로 이겨 내려는 의지가 있으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문주가 가끔 봐주시오.”
“그래, 허튼짓을 한다면 내가 반쯤 죽여 놓도록 하마.”
“고맙소. 소림의 고승들은 어디에 있소?”
“방장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떠나갔다. 지금은 해월과 해공만 남아 있다.”
“해월?”
“그래, 놈은 혈마교도와의 일이 끝날 때까지는 만뇌문을 위해 싸우겠다더군. 개인적으로는 꺼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써먹을 데가 있긴 하겠지.”
만뇌문은 점점 힘과 안정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에 반해 적들도 강해지고 있으니 문제였지만.
“혈마교주가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확실하진 않지만 교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더군.”
“신경을 쓰지 않아?”
“혈마교주는 화경의 극의에 이르렀다고 하오. 스스로를 진천마(眞天魔)라 칭한다는군.”
“천마도 아니고 진천마?”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뇌불이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놈이 비열하게 중원 무림에 간자를 심나?”
“그건 부교주들과 장로 그리고 태상교주의 뜻이라 하오. 혈마교주는 본신의 무력만 갈고닦으며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다고 했소.”
공야진은 백골마존의 곁에 있으며 많은 것을 들었다.
마령도 차마 말하지 못한 비밀까지 말이다.
“그럼 지금 소교주 쟁탈전 따위도 전혀 신경 안 쓴다는 말이더냐?”
“그런 듯하오.”
“쯧, 마적사라는 놈도 인질로는 딱히 가치가 없겠군.”
뇌불의 말이 맞았다.
마적사는 버려질 가능성이 컸다.
“지켜봅시다, 놈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그러자꾸나.”
돌은 던져졌다.
이제 혈마교가 어떻게 나오느냐를 지켜볼 차례였다.
* * *
“천하의 병신 같은 놈.”
“…….”
“네놈의 작전 하나 때문에 교의 대계가 흔들리고 있다. 네놈이 대체 무슨 잘못을 한 줄 아느냐?”
“죄송…….”
“죄송하다고 할 것 없다. 어차피 뒈질 놈한테 사과를 받아서 무얼 하겠는가? 네놈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사라질 거다. 교에 있는 네 부인과 자식들은 노비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혈악의 저주와 같은 악담에 혁련소가 입을 다물었다.
오늘 새벽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극린이 데려온 인간들은 혈혼단주인 혁련소도 감히 말을 섞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친동생을 강시로 만든 부교주 백골마존.
백골마존이 따르는 소교주 후보 마적사.
중원 무림 간자의 총책임자 혈악까지.
그 모두가 황극린에게 포박당한 상태로 잡혀 왔다. 이제 황극린에게서 벗어나려면…….
“네놈은 다를 거라 생각하느냐.”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제2공자 마적사였다.
그는 파열고가 실패한 시점부터 쭉 이런 얼굴이었다. 이미 삶을 포기한 듯한 표정.
혈악은 인상을 찌푸렸다.
소교주 후보라고 해도 아직 소교주가 된 것은 아니다. 거기다 이미 여기에 잡혀 온 시점부터 그는 소교주가 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신과는 다르지.”
“과연 그럴까. 네놈은 교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난 중원의 모든 간자들을 관리하는 총책임자다. 몇십 년 동안 무림맹의 눈을 피하여…….”
“그래, 네놈의 자리를 대체할 마인들은 교에 많지.”
“…….”
사실이었다.
혈악은 최대한 살길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어떤 방향으로든 쉽지 않다고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희망이 없어진 마적사보단 나았다.
“당신이나 걱정하는 게 좋을 거다, 교로 가면 다른 소교주 후보들에게 죽을 터이니.”
“그래, 아마 그렇겠지.”
순순히 인정하자 혈악이 표정이 구겨졌다.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교도들 대다수가 멍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쯧, 부교주가 저러고 있으니 힘이 없을 만도 한가.’
백골마존은 실성한 것처럼 혼자 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기절하고 깨어나고를 반복했다. 가끔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찾으며 울기까지 했다. 부교주가 저럴진대 다른 마인들은 어떠리? 혈악만이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상교주께서는 분명 나를 구해 주실 거다.’
일단 살아 나가면 된다.
그가 혈마교에 세운 공이 얼만데 그냥 죽게 내버려 두겠는가?
혈악이 지금도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감시하는 흑주의 시선을 피하며 고뇌하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익.
뇌옥의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이 부신지 모두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마적사가 깜짝 놀란다.
“넌?”
다른 이들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공녀?”
그녀는 마적사와 같은 소교주 후보 중 하나인 마령이었다.
“네년도 잡혀 온 건가? 크크… 저승으로 같이 갈 동무가 생겨서 기쁘구나.”
“뭐라는 거야?”
마령의 어깨 위로 작은 거미 한 마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 뀨우?
놈의 몸통에도 인간 얼굴의 형상이 솟아올라 있었지만, 지금 천장에서 그들을 감시하는 흑주와는 확연히 다르다. 평범한 인면지주의 표본이랄까? 공중에 매달린 흑주가 쑤우욱, 거미줄을 타고 내려온다. 마령이 살짝 흠칫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다.
“너희 조만간 다 죽어.”
마령이 싸늘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