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낚이다
혈마교의 제2공자 마적사.
소교주 후보 중 한 명으로 어릴 때부터 기회를 잡아채는 능력이 탁월했다. 또한, 칼 같은 성정으로 잡아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잘 구분하여 처신해 왔다.
그런 마적사가 보기에 만뇌문과의 대립은 기회나 다름없었다.
강자존을 추구하는 혈마교에서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행동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다른 소교주 후보들은 이번 일에서 빠져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마적사는 직접 교도들을 이끌고 십만대산을 벗어났다.
“만뇌문이 화령신침을 요구했었는데, 괜찮겠습니까?”
홀쭉 들어간 볼을 보면 해골을 연상케 한다. 부교주 백골마존(白骨魔尊)의 물음에 마적사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부교주께선 황극린이 정말 화령신침을 원한다고 생각하시오?”
“중원 무림에서의 그의 행동을 돌이켜 보면 정말 그것을 원할 수도 있겠지요. 대룡상단이라는 곳과 싸우고 그들에게 ‘금화종’을 요구했다고 했었습니다.”
“만약 상대가 대룡상단이었다면 나였더라도 그걸 요구했을 것이오. 황극린은 결코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오. 지극히 차가운 이성을 가진 놈이지.”
황극린도 알고 있으리라.
제아무리 화경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혈마교와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혈마교가 지금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내부 사정 때문이지, 만뇌문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자는 아마 혈마교와의 연줄을 원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오.”
제2공자 마적사는 혈혼단주의 서신을 받았을 때 깨달았다.
그는 혈마교의 실세와 대화하려 했다. 대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혈마교와 전쟁이라도 하려고 하는 걸까?
아니다.
그는 무림맹이 시기와 질투로 온갖 수작을 부리니 바로 용성으로 터를 옮겼다. 아무리 좋게 봐 주더라도 용성은 당장 정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는 정파나 사파라는 틀에 갇혀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에게 납치된 혈마교도만 하더라도 열 명이 넘습니다. 모두 사천성에서 꽤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던 마인들이었지요.”
“설마 황극린이 날 납치할 것이라 생각하시오? 그게 가능하겠소?”
백골마존이 뒤를 돌아본다.
마적사를 따르는 장로만 셋. 거기다 장로들이 애지중지 키운 정예 마인만 열 명이다. 그리고 장로 혈악도 사천성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천하의 백골마존 부교주께서도 내 곁에 있지 않소?”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니오. 내 판단이 십 할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 부교주의 의견도 고려할 가치가 있긴 하오.”
마적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그렇기에 이걸 챙겨 나온 것이오.”
백골마존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생각이었던가.
“파열고(破裂蠱)와 표염암향(飄閻暗香).”
마교와 혈교는 합쳐지며 수많은 상승효과를 만들어 냈다.
두 문파는 중원에서 발호할 때마다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그들이 가진 무공이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단순히 무공만이 그들의 전부는 아니었다.
무림세가인 제갈세가의 장기가 무공이 아니라 진법이듯.
혈교와 마교에서도 순수한 마공(魔功)만 익히는 게 아니다. 혈마교에서도 진법과 독(毒) 그리고 주술과 술법 등 폭넓은 주제로 연구를 이어 왔다. 거기에 마공을 결합했으니 파괴적인 부분은 중원 그 어떤 문파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파열고.
생명체 중 인간의 장기만을 파먹고 사는 벌레로 호신강기를 둘러도 그것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린다. 파열고 한 마리만 인간의 속살을 뚫고 들어가도 인간은 무조건 죽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파열고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길들일 수 있는 놈이 아니다 보니 함부로 전장에서 풀어놓았다간 되레 주인이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표염암향이다.
혈고독이 좋아하는 향을 집약한 향. 향이라고 하지만 그것에도 치명적인 독이 깃들어 있다.
일차적으로 표염암향으로 파열고를 막아 내지 못하게 한 뒤에, 파열고를 이용하여 적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상대가 대비하지 않고 있다면, 필히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
“초절정에 이른 고수라도 파열고 한 마리가 살에 들어가면 일각 이내에 목숨을 잃소. 치열한 전투 중에 파열고를 풀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소?”
“황극린이 죽겠군요.”
“그렇소. 뭐, 이걸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오.”
마적사가 두 개의 병을 조심스레 갈무리했다.
“아무튼, 황극린이 어찌 나오든 내게는 이익이오. 놈과 연을 맺는다면 본교의 중원 진출은 더 수월해질 것이고, 만약 놈이 이 몸을 적대시한다면 만뇌문을 집어삼키면 그만이지.”
“허허, 역시 소교주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백골마존이 죽은 사람처럼 퀭한 눈동자를 한 채로 웃음을 흘렸다.
아랫것들이 보기엔 부교주의 그런 표정은 공포 그 자체였지만, 소교주가 될 마적사에겐 거두어야 할 수하의 아부에 불과했다.
백골마존은 혈마교 내에서 인정 따위 없는 잔학무도한 마인으로 평가된다. 감히 그의 앞에서 함부로 농을 지껄일 수 없었다. 하지만 소교주가 될 마적사에겐 지금처럼 아부할 뿐이다.
물론, 소교주가 부족한데도 백골마존이 억지로 그를 치켜세우는 것도 아니다.
그는 불확실한 위험을 확실히 대비하고 있었다.
“혈악 장로도 있으니 황극린이 미치지 않고서야 우릴 적대시할 순 없을 것이오.”
“황극린을 교의 끄나풀로 이용할 수 있다면 뒤에서 상황만 지켜보던 공자들이 닭 쫓던 개처럼 행동하겠군요.”
“하하하, 그렇지. 놈들은 너무 생각이 많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중강현으로 간다면 상황이 그들의 예상대로 척척 흘러갈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과거 황극린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무슨 짓을 벌였는지 말이다.
천화련.
피의 혈족이라 불리는 혈교가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문파. 혈마교로 합쳐졌음에도 그들이 가장 경계하는 천화련. 그곳의 소련주를 황극린은 납치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한번 정한 길을 결코 물리는 법이 없었다.
* * *
“클클, 그놈들도 머리는 있군.”
혈마교에서 사신이 온다고 했다.
당연히 그들은 만뇌문의 진법 내에서 회담을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만뇌문의 진이 얼마나 위험한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전의 마교였으면 그딴 것 상관없이 마인들을 보냈을 텐데 말이야. 쯔쯧, 명색이 마인이라는 놈들이 겁이 많아서는.”
뇌불이 혀를 차고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부교주를 보내서 북해빙궁주와 연을 맺을 생각을 하지 말라 으름장을 놓던 자신감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마 놈들도 대비를 했을 것이오.”
“그런데 혼자 갈 셈이냐?”
“문주와 내가 함께 가면 오히려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소.”
“하기야 나와 네가 있으면 교주라도 오지 않는 한 싸움을 쉽게 걸진 못할 테니.”
절대고수의 존재는 모든 중원의 문파가 원하는 것이다. 억제력이라고도 한다. 절대고수는 활약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경쟁 문파가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든다. 물론 진짜 전쟁이 일어나면 억제력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지만, 정면으로 맞붙기 전에는 절대고수는 효율이 좋은 존재였다.
“그래도 조심해라.”
“걱정하지 마시오. 흑주도 있소.”
- 끼이!
흑주가 황극린의 어깨에서 빼꼼이 얼굴을 내민다.
녀석이 사람의 몸에 올라탈 때는 대부분 머리 꼭대기 위에서 상전처럼 거만한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감히 황극린과 뇌불의 머리 위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 그래. 흑주야, 마음껏 활약하고 오거라.”
- 끽!
뇌불의 배웅을 받아 청성산을 떠났다.
혈마교도가 말한 장소는 중강현 서쪽에 위치한 소금(小金)현이었다. 이곳은 혈마교의 사천성 지부가 있던 장소이기도 했다.
황극린은 쉴 새 없이 경공을 펼쳐 소금현에 도착했다.
중강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발전한 현이었다. 현에 진입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시선이 집중된다.
“허, 저 사내 좀 보게!”
“저게 뭣이여?”
“살맛 안 나는구만!”
빛을 받으면 찬란한 반사를 일으키는 뇌섬사로 짜인 의복을 갖춰 입은 황극린. 취수혈정을 취하고 머리가 몽땅 빠졌었지만, 지금은 꽤 자란 상태였다. 물론, 치렁치렁 길러 눈동자를 가렸던 때처럼 길진 않았기에 그 아름다운 조각과 같은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뉘 집 공자이려나?”
“옷을 입은 것만 봐도 보통 가문이 아닐 것 같은데 말일세.”
“꺄악, 가서 말이라도 걸어 볼까?”
- 끼이이!
황극린처럼 작은 진동에도 반응할 수 있는 예민한 흑주가 옷 속에서 적의를 흘렸지만, 황극린이 손가락으로 녀석의 몸통을 쓰다듬으니 금방 진정되었다.
그는 뜨거운 시선을 뒤로한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황극린이 펼치는 기묘한 보법은 평범한 백성들이 홀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은밀했으며 빨랐다.
“뭐야? 어디 갔어?”
“방금 여기에 있었는데?”
“설마 환각을 본 것가?”
저 뒤에서 웅성임이 들려왔다.
황극린이 고개를 들었다.
영취문(靈鷲門).
그런 현판이 내걸린 장원이었다. 이미 뇌불이 한번 들러서 쑥대밭을 만든 적이 있는 곳이다. 혈마교가 비밀리에 운영하던 사천성의 지부 중 하나. 그들은 이곳에서 만남을 청했다.
황극린이 눈을 감고 기감을 넓게 펼친다.
강대한 기운이 셋이나 느껴진다. 그 외에도 코를 찌르는 지독한 마기가 넘쳐 난다. 역시 상당한 수준의 마인들이 몰려들었다.
“흑주, 싸움이 벌어지면 나서라. 그 전에는 조용히 있도록.”
- 끼이.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호쾌한 울음을 터트리는 흑주.
황극린이 문을 열었다.
이미 해골 같은 몰골을 한 사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퀭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무공 따위는 익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 일렁이는 치명적인 마기(魔氣)의 수준은 대단했다.
“안녕하신가? 이 몸은 혈마교 부교주 백골마존이라네.”
겸손 따위는 없는 광오한 말투.
황극린은 그를 본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혈마교가 왜 단일 문파 중 가장 강하다는지 확실히 알겠군.’
혈마교주의 전언을 전해 주러 왔던 부교주.
그 또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부교주급들은 하나같이 천하칠대고수와 필적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즉, 경지로 따지면 화경이라는 소리다.
과거 마교나 혈교 두 문파가 합쳐지지 않았을 때도 그들은 중원에서 공포로 군림했다.
하지만 힘을 합친 지금은 얼마나 큰 저력을 지니고 있을까?
‘내가 죽기 전에도 혈마교가 사천성과 감숙성을 거의 점령했었지만,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지.’
물론, 혈마교가 강하다는 사실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긴 했었다.
구파일련과 육대세가를 적대시하는 사파 문파 녹림맹의 탄생.
북해빙궁과 손을 잡은 것으로 추정되는 천음마녀 제갈소희.
용성을 견제하느라 시선이 분산된 무림맹.
황극린이 아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다.
물론, 현재에 이르러서는 과거 무림맹을 뒤흔들었던 악인들이 황극린의 편에 서 있다는 게 달랐지만 말이다.
“제2공자께서 뵙자고 하신다네. 안내해 줄 것이니 따라오도록 하시게.”
“안내해라.”
백골마존이 눈을 가늘게 뜬다.
황극린은 저런 눈동자를 한 인간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목숨 따위는 파리로 여기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다. 혈마교의 부교주에 올랐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을까?
아니, 황극린은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놈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거다.
“…따라오시게.”
백골마존은 참았다.
제2공자 마적사의 말도 있었으니 황극린과는 그래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중앙 전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들. 그리고 식탁 옆으로 흘끔 보아도 미색이 보통이 아닌 여인들이 중요 부위만 가린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응?”
잠시 황극린의 얼굴을 보고 눈동자가 흔들린 마적사.
혈마교 내에서도 저리 잘생긴 얼굴은 흔치 않았다. 거기다 그의 눈동자는 무언가 특이했다.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듯하달까? 저런 눈동자를 가진 이들은 흔치 않았다.
이내 당황에서 벗어난 마적사가 미소를 흘리며 황극린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시오. 난 혈마교의 제2공자 마적사라 하오.”
의외로 호의적인 모습.
황극린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혈마교 내에서 소교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중이라고 했던가?
“황극린이오.”
“하하하,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잘생기셨구려. 머리를 길러 놓으면 여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아, 기분이 나쁘려나? 내 사과 드리지. 본교에선 이런 농은 흔한 것이라.”
“괜찮소.”
당연히 그딴 소리를 지껄이다간 마인들끼리 피 튀기는 혈전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 농담은 그가 혈마교주의 직계였기에 용서되는 것이다.
“이거 황 공자를 위해 본교에서 미색이 빼어난 아이들을 추려 데려왔는데… 황 공자의 미모를 보니 만족하실지 모르겠구려?”
“필요 없으니 물리시오.”
소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여인들을 줄 세워 놓은 것은 황극린을 떠보기 위함도 있었다. 물론, 여인의 미색 따위에 흔들릴 사내라면 상대하기 쉬울 것이지만… 화경에 이른 고수가 그리 쉬울까? 당연히 아니다.
“얼른 물러가도록!”
“예, 공자님.”
여인들이 사라지고.
방 내부에는 마적사와 백골마존뿐이었다.
“자,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여기까지 오느라 시장했을 터인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구려.”
마적사가 마치 독을 타지 않았다는 듯이 수려한 젓가락 놀림으로 황극린 앞의 요리를 집어 입에 넣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더러운 수작 따위는 부리지 않았으니. 난 정말… 황 공자와 평화롭게 대화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소.”
마적사의 말에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