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17화 (217/316)

217화 인질

“미친놈.”

절로 욕이 나왔다.

전음석을 사용할 때, 첫 번째 규칙은 축약하여 내용을 전달하는 거다. 그런데 이놈은 전음석의 가치를 모르고 마구 써 댄다. 이것만으로도 상부의 문책을 피하기 힘들다. 이걸 사용하기 위해 수라천가의 가주에게 힘을 빌렸다.

“전음석을 내놓으라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감히 혈마교의 보물을 탐내고 있다고?

하지만 혈혼단의 단주 혁련소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상황이 점점 꼬이고 있었다. 혈혼단의 중요한 인재들이 이미 황극린에게 당했다. 모두 혁련소의 책임이었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되었을 인물을 건드려서 일을 키웠다. 물론 잘 처리했다면 그는 많은 것을 얻었을 테지만, 결국 실패했다.

학사와 같은 외관을 한 혁련소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다.

이대로 가다간 수라천가에서도 버림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혈마교에선 마도삼가끼리 소교주 책봉에 대한 문제로 신경전이 한창이다.

“이놈과 직접 만날 수는 없다.”

황극린의 무위는 잘 알고 있다.

위대하신 교주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중원 내에서는 한가락 하는 놈이다. 놈을 처리하려면 그만한 혈마교의 고수를 초빙하거나 높은 수준의 전투부대를 끌어들여야 한다. 혈혼단 하나로는 만뇌문을 처리할 수 없다.

일단 대화를 해야 한다.

혁련소가 전음석을 들었다.

- 불가. 다른 것.

조심스레 글을 새겨 놓으니 금방 답이 왔다.

- 전음석은 대화의 첫 번째 조건이다. 협상은 없다.

“이 새끼가 진짜!”

단어만으로 대화해야 하는 규칙을 어기고 혼자만 길게 쓴다. 그러다가 전음석의 겉면이 쑥쑥 갈려 나간다. 혁련소는 자신의 심장이 갈리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 조건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인질을 죽이겠다. 혈마교 사천지부장이 처음이다.

“뭐라고?”

순간 혁련소는 이해하지 못했다.

혈마교 사천지부장? 분명 혈마교도 사이에서 그렇게 부르는 이가 존재한다. 혈악, 그는 장로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혈마교의 장로들은 혈마교 전체를 통틀어서 서열이 30위 안에 들어가니 혈악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혈마교 사천지부의 지부장은… 그 혈악이 가장 아끼는 수하 중 하나였다.

옥면미호(玉面眉狐) 우약란.

설마 그녀를 말하는 건가?

‘그녀를 죽인다고? 설마 인질로 잡았다는 말인가?’

혈마교 사천지부는 중원의 지부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힌다. 그만큼 지부장급의 마인들은 확실한 도주로와 은신처를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그녀는 무림인이 상상하지 못하는 장소에 숨어 있었다. 혁련소는 우약란이 잡혔을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그러했다면 조금 전 혈악이 보냈던 서신이 더 험악해졌을 테니까.

그렇기에 혁련소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우약란이 갇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혈악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황극린에게 분노를 쏟아 낼 것인가.

혁련소에게 그 탓을 넘길 것인가.

‘제기랄.’

혈악의 성격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중원의 모든 간자들을 관리할 수 있는 이유는 잔혹하고 칼 같은 성격 덕분이었다. 그는 혁련소에게 먼저 책임을 떠넘길 것이 분명했다.

혁련소의 고민이 깊어진다.

이대로 가다간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이제껏 세운 공이 물거품처럼 꺼져 버릴 것이다.

‘잠시만, 음명대주도 설마 인질로 잡힌 건가?’

만뇌문의 문도를 납치하는 입무로 파견된 음명대주.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황극린이 우약란을 납치한 것으로 보건대, 음명대주도 잡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뒤에서 몸을 사리고 있다간 이도저도 안 된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우약란이 정말 납치된 것이라면… 나도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혈마교는 결국 무를 숭배하는 집단.

뒤에서 머리만 굴리고 있다면 결국 장로들의 책임 문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혈마교를 위해 한 몸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그는 당장 혈마교의 정보부대 귀령대(鬼領隊)에게 서신을 보냈다.

우약란이 사라진 게 확실하다면 바로 청성산으로 간다.

창의적인 발견이라도 한 듯이 혁련소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면, 교의 높으신 분들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귀령대에 서신을 보낸 몇 시진 뒤.

- 옥면미호의 행방 알 수 없음. 납치된 것으로 판단됨.

서신을 받자마자 혁련소가 전음석을 들었다.

- 내가 직접 청성산으로 가겠다.

* * *

황극린은 언짢았다.

혈마교와는 싸울 생각이 없었지만, 그들이 수작을 부려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만뇌문을 위협한 대가는 치르도록 해야 한다. 상황이 커질수록 위험도가 증가하지만 선공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만뇌문의 뇌옥에는 수십 명의 혈마교도들이 잡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몇몇 이들을 심문하였지만, 제대로 된 정보는 얻어 내지 못하였다.

과연 사천에서 활동하는 혈마교도들은 고문에 대한 훈련도 착실하게 받은 듯하다.

황극린이 멈추지 않고 사천성에 뿌리를 내린 혈마교의 간자들을 잡아들이고 있을 때.

서신이 도착했다.

- 사천지부장이 있는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직 사천성에 자리 잡은 혈마교도 전체를 뿌리 뽑은 건 아니다. 당연하다. 사천성은 너무도 넓었고, 황극린 또한 사천성에 있는 혈마교 지부들을 모두 알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누군가의 서신이 사천지부장이 있는 곳을 알려 준다.

당연히 서신을 보낸 이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마령.’

그녀는 황극린과 거래하고자 했다.

소교주가 되기 위해서 천흉을 발견하면 혈마교 쪽으로 끌어들여 달라고 부탁했다. 만뇌문과 소림사를 이간질하려는 세력이 혈마교의 일부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황극린의 행동의 변화는 없을 테지만.

황극린은 마령의 서신을 받자마자 직접 움직였다.

우약란이 있는 곳은 사천성 성도의 관아였다.

황극린은 여러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혈마교는 황실의 권력에도 손을 뻗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번 사태의 원흉이 바로 혈마교의 혈혼단주 혁련소.

전음석을 가지고 있는 그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혁련소만 죽인다고 이번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 했다.

* * *

콰앙-!

흉측한 얼굴에 박힌 섬뜩한 눈빛의 노인이 손을 휘두르자 돌을 깎아 만든 책상이 가루처럼 부서진다.

노인은 혈악 갈태악.

혈마교 내에서도 서열 10위 안의 인물이었으며, 현재 혈마교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일인이었다. 그는 무위도 강했지만, 중원 진출의 선봉장이 되어 성공적으로 중원에 간자들 심어 놓았다. 물론 고검문을 비롯하여 몇몇 문파들이 발각당했지만, 그 정도는 예상 범위 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간자들이 한꺼번에 발각당했다. 그것도 사천성의 간자들만 말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지만.

“약란이를 납치했다?”

“그렇게 파악되고 있습니다.”

귀령대.

중원의 정보를 수집하는 혈마교의 첩보 부대라 할 수 있다. 살수보다 더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귀령대원들이기에 감정을 잘 표출하지 않았지만, 마기가 풀풀 날리는 혈악의 분노에 절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몸에 쌓인 마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감정이 요동치면 공간 자체를 잠식한다.

거기다 마교의 무공과 혈교의 무공이 합쳐진 이후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다. 혈악은 혈마교에서도 서열 10위 안에 들어가는 괴물이다. 귀령대원이 분노한 그 앞에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황극린이라고 했나?”

“예, 그리고 서신을 남겼습니다.”

“감히!”

콰앙!

혈강기(血罡氣). 마치 천화련의 대공자가 펼쳤던 그것과 흡사한 강기가 혈악이 휘두른 손끝에서 솟구쳤다. 혈강기가 닿은 벽면이 마치 용암이라도 닿은 듯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꿀꺽.

귀령대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호신강기고 뭐고 저것에 직격하면 온몸이 녹아내릴 것이다. 원초적인 공포 앞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숨기는 고된 수련도 큰 효과가 없었다.

혈악의 눈동자에 불꽃이 인다.

“그리고 혈혼단주 그놈은 뭘 하고 있지?”

“예, 그 부분도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 혈혼단주는… 홀로 황극린과 교섭하겠다는 보고를 남긴 채로 청성산으로 향한 상태입니다.”

“혼자?”

혈악은 혁련소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일을 잘 처리해 왔었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얍삽한 성격이며 제 목숨을 무척이나 아끼는 놈이다. 그런 놈이 황극린을 찾아갔다고?

“예, 그렇습니다.”

혈악의 눈썹이 꿈틀한다.

혁련소가 무슨 속셈인이 알아챈 것이다.

“교주께 잘 보이기 위해 행동한 것이군.”

혈마교주는 강자존의 정점에 오른 이다.

지존이라 불리는 그는 약자의 희생과 용기를 기꺼워한다. 현재 혈마교에서 몇몇 이들이 중원에서 단독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도 교주의 배려 덕분이었다.

“교에 대한 충심을 보여 주려 한 행동이야.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 회피해?”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혈악은 혁련소의 깜찍한 생각에 치가 떨렸다.

우약란이 납치당했기에 혈악의 분노는 모든 곳을 향하고 있었다.

“삼가의 가주께 서신을 보내도록 하라.”

“예, 알겠습니다.”

아직 혈마교는 소교주가 선출되지 않았기에 본대는 모두 십만대산에 있었다. 제아무리 만뇌문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혈마교는 홀로 무림맹과 싸운 전적이 있는 문파다. 만뇌문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혈악 혼자서는 황극린을 처리할 수 없었다.

최소한 우약란을 안전하게 구출하려면 그와 교섭해야 한다. 혁련소가 싼 똥을 혈악이 치워야 하는 상황이다.

귀령대원이 밖으로 나서자 혈악의 몸 곳곳에 붉은 기운이 일렁거린다.

“감히 그따위 수작으로 책임을 회피하려 했는가?”

지금 혈악의 분노는 온전히 혁련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만약 황극린이 우약란을 정말 죽인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다.

* * *

“감히 혈마교의 사신을 이리 대하다니. 교가 두렵지 않더냐!”

난리를 치지만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점혈을 당하여 내력을 전혀 운용할 수 없었다. 놀라운 점은 점혈을 한 주체가 인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혁련소의 무위로는 점혈을 당하더라도 반나절이면 모두 자연스럽게 회복된다.

그런데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거미 한 마리가 돌아다니며 납치된 혈마교도들을 점혈하고 있었다.

“대체 저 거미는 뭐지……?”

방금 잡혀 온 혁련소.

그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특이하게도 푸르스름한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독기를 품은 채 쏘아붙인다.

“혁련소, 좀 닥쳐.”

“우 지부장? 말이 과하군.”

우약란은 평소 혁련소에게 방글방글 웃으며 예의를 지켰다. 혁련소는 여러 업적을 세워 빠르게 승급하는 중이었다. 혈마교에서 힘을 얻는 방법은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거나 공을 세워 승급하는 것이다. 승급하는 이들에겐 혈마교의 상위 마공을 익힐 기회가 주어진다.

하위 마공과 상위 마공은 차원이 다르다.

단주급이 되면 상위 마공 중에서도 특별한 것을 익힐 수 있다.

물론, 그 상위 마공을 익힌 혁련소는 황극린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했지만 말이다.

‘대충 싸우는 척이라도 하려 했는데… 상처도 별로 입지 않았군.’

혁련소의 계획은 하나였다.

이들을 구출하려고 한 몸 희생한다. 아니, 그러한 의지를 윗분들에게 보여 준다는 게 더 정확하리라. 팔 한쪽을 내줄 각오도 했다. 그런 성의를 내보인다면 혁련소의 희생을 인정해 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혁련소는 예상하지 못했다.

황극린이 혁련소를 거의 다치지 않게 제압할 수준의 실력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화경의 고수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네놈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고 있다.”

“나 때문? 그게 무슨 말인가. 우 지부장, 우리 혈혼단원들과 자네를 납치한 건 만뇌문이라네.”

“그렇게 넘어가시겠다는 건가?”

“허허허, 넘어가겠다는 게 아니라…….”

혈혼단주의 눈빛이 번뜩인다.

“…여기서 나가고도 그 말을 감당할 수 있겠나?”

“…….”

우약란은 혈악을 뒷배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혁련소도 그만한 뒷배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혁련소가 이런 무리한 방법으로 만뇌문에 잡혀 온 이유도 그 뒷배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다. 다른 교도들은 납치당했는데 혈혼단주 한 명만 무사하면 그림이 이상하지 않은가?

혈혼단주는 지금 만뇌문과 혈마교의 분쟁이 커지게 하려고 직접 납치당한 것이다.

결국, 전음석 모두를 빼앗겼다.

우약란이 혁련소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살짝 눈빛이 흔들렸지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았다.

오히려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

“네놈이 살아서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당연하지. 이미 제2공자님께 서신을 보내 놓았다.”

제2공자.

마령과 마찬가지로 소교주를 놓고 경쟁하는 일인이었다.

“다음 희생양은 내가 아니라 너다.”

“뭐?”

분명히 전음석을 가져오지 않으면 죽이는 건 우약란이라 했다.

그런 방식으로 인질을 소모한다면, 다음번에도 우약란을 걸고 혈악에게 교섭을 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만뇌문이 혈마교와 싸우는 대신 인질을 잡아 이익을 보는 방식을 택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과연 너를 위해서 본교가 화령신침(火靈神針)을 내어 준다고 생각하나?”

화령신침.

과거 화산파가 가지고 있던 신물이었지만, 정사대전 당시에 혈마교가 강탈한 물건이다. 화령신침은 혈마교 내에서도 최상위 신물로 취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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