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의지
문파들은 왜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가?
어려운 질문이지만 간단한 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중원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서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과거 인간은 자연과 맨몸으로 싸워야 했다. 혹한의 추위. 지면을 쓸어버리는 거대한 태풍. 그리고 호시탐탐 인간을 포식하려 드는 강인한 짐승들까지.
당시에는 각자의 생각보다는 공동의 생존이 먼저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땅 위에서 인간의 지위는 달라졌다.
혹한의 추위는 석탄과 나무를 태워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태풍에 휩쓸려 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건물을 지어 보금자리를 잃지 않게 되었다.
짐승들은 검이나 창 그리고 화살로 사냥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발전했다.
더 이상 나약한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저마다의 뜻과 개성을 펼치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무림인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인간 중에서도 가장 특별했다.
자연의 기운을 단전에 품어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홀로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되었으며, 태풍이 불어도 굳건히 두 발로 버틸 수 있었다. 검과 창을 써야만 잡을 수 있는 호랑이를 맨손으로 격퇴할 수 있었다.
무공을 익힌 인간들이 모여 문파와 가문을 세운다.
개개인의 개성과 의지가 거대한 하나가 되어 중원 곳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범한 백성들은 누릴 수 없는 호화로운 삶을 살아갔다.
농사법이 발달한 현시대에도 굶어 죽는 이들이 많다.
무림인 중 정파라 불리는 이들은 협행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지만, 사파에선 오히려 약자를 핍박하여 그들의 노동력과 돈을 갈취한다.
사파의 정점에 선 것이 바로 마교와 혈교였다.
그들은 특별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렸다. 뜻이 맞지 않고 거슬리는 인간은 죽였고, 돈을 많이 모은 인간들의 재화를 강탈했다.
처음부터 혈교와 마교가 사파의 중심이 된 것은 아니다.
강탈하고 또 강탈하다 보니 그들은 걷잡을 수 없이 성장했다.
하지만 만들어진 문파는 혈교와 마교뿐만이 아니었다.
도가의 장삼봉 진인은 무당파를 개파했으며, 달마는 소림사를 개파했다.
무공이 널리 퍼지지 못한 시대에 중원 전체를 지배하는 황실의 힘은 막강했지만, 더없이 넓은 중원에서 태동하는 무림인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저마다의 현(縣)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아갔다.
물론, 그 호화(豪華)라는 의미는 저마다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혈교와 마교는 태초부터 누군가를 지배하며 살아왔었다.
더 넓은 땅을 지배하기 위해, 더 많은 인간을 발밑으로 두기 위해서 중원을 침공했다.
혈교와 마교는 결국 실패했다.
중원에서도 혈교와 마교와 같은 뜻을 품은 문파들이 있었다. 그들이 연합을 구성하여 막아 냈으니 뚫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과정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고.
혈교와 마교는 결국 생존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 혈마교로 거듭났다. 혈마교는 궁극적으로 복수를 원한다. 그들에게 복수란 단순히 한 문파를 멸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복수를 성공하게 되면 그들은 혈교와 마교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중원을 지배할 수 있게 될 터이니.
온갖 실패를 경험했던 혈마교는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중원을 침공하려 했다.
지금까진 그 방법이 잘 먹히고 있었다.
혈마교를 막아 냈던 무림맹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분열한다.
하나가 되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완전한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문파끼리의 분쟁은 끊이질 않았고, 심지어는 정파 문파끼리 전쟁하여 하나가 멸문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렇기에 혈마교는 만뇌문과 소림사를 이간질하려 했다.
두 문파가 싸운다면 정파의 분열은 가속화될 테니까.
그러나 혈마교는 알았어야 했다.
무림맹 또한 완전한 하나가 되지 못했듯이.
혈교와 마교 또한 진정한 의미의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 * *
“피해는?”
“수라혈검대는 전멸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백의를 갖춰 입은 중년인. 학자와 같이 선량한 인상이었지만, 그의 앞에 선 우락부락한 무인은 식은땀을 훔치며 중년인의 앞에 부복하고 있었다.
중년인이 탁자 위에 올려진 전음석을 바라본다.
‘벌써 교주님께 실패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실패에 대한 대가는… 죽음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는 교에 수많은 공을 세웠으니 최소한 목숨은 간수할 수 있으리라. 하나, 자리를 잃고 좌천된다면 목숨을 잃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최대한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
혈마교라는 거대한 의지에 편입되어 뜻을 펼치곤 있지만, 저마다 그 뜻을 행하는 방식은 달랐다. 중년인 나름대로는 기발한 수를 내었다고 생각했지만, 황극린이라는 놈은 혈마교의 수법을 알아채고 극복했다. 거기다 전음석까지 빼앗겼다. 그걸 어떻게 회수할 수 있을까? 그것이 살길이다.
“다시 황실에 서신을 보내도록 해라. 날을 앞당겨야겠다.”
“존명.”
흑의 무인이 사라지자 백의 중년인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어차피 사천성의 문파들은 쓸어버렸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천성에 터를 잡은 만뇌문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이 품은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만약 북해빙궁의 궁주와 황극린이 혼인이라도 하는 날에는…….
“음명대주.”
중년인이 말하자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난다.
“중강현으로 가라.”
“누굴 죽여야 합니까?”
“만뇌문도들을 납치하도록.”
“존명.”
음명대주가 사라지자 중년인이 한숨을 내쉰다.
이걸로 될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황씨 가문이라……. 여긴 아예 신경도 안 쓰는 것 같고.”
황극린에 대한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최대한 약점을 잡아 황극린을 통제할 수단을 찾아야 한다. 왜 화경에 이른 무인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가? 그러한 고수들은 지켜야 할 것이 많았다. 특정한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그만큼 적이 많았다.
황극린에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완벽히 파악해야 한다.
“남궁운혜라……. 뭐, 없는 것보단 낫겠지. 그리고 황씨 가문? 이것들도 쓸모가 있으려나?”
중원의 지도를 펼쳐 놓고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들을 올려놓는다.
“제갈소희와도 몇 번 만났고……. 두야랑? 만무지회에서 만남이라……. 이건 안 되겠군. 서문세가의 서문취아? 근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다고 해도 어릴 적의 인연은 쉬이 잊을 수 없는 법이지.”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황극린을 포기하게 할 수단을 만든다. 그래도 최악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서 납치하는 선에서 끝낸다. 일단 현 상황만 모면한다면 다시 재기할 수 있다.
혈마교의 주축이라 불리는 마도삼가(魔道三家).
수라천가(修羅天家)의 둘째이자 혈혼단(血魂團)의 단주 혁련소는 이제껏 호화롭게 살아왔지만, 위기에 봉착했다. 그는 탁월한 결단력과 잔혹한 성정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대로 추락할 수는 없었다.
“대주 모두 들어와라.”
혈혼단의 모든 것을 걸고 황극린과 교섭할 패를 만들어야 했다.
* * *
- 끼이이이!
흑주가 침을 퉤 뱉는다.
정확히 따지면 침은 아니다. 독액(毒液)이라 할까. 황극린은 아무 데서나 그것을 뱉으면 안 된다고 훈계한 후에 말한다.
“이젠 사람을 먹지 않느냐?”
- 끼잇!
“이유는?”
- 끼이익! 끼이익!
뭐라 말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대충 ‘맛’과 관련된 것 같았다. 과거 흑주는 사망교의 지흉이라는 놈을 먹고 더 성장했었다. 흑주의 특이하고 급격한 성장은 영물에 관심이 많은 성수신의도 지켜보고 있는 부분이었다.
흑주는 진원진기를 소모한 혈마교도들을 포식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원진기를 소모하지 않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엇으로 흑주가 이렇게 성장했을까?’
무림인은 영약을 취해 급격히 내공을 늘릴 수 있다.
그럼 영물은?
‘계빈이라는 놈에게 물어봐야 하나?’
흑주의 폭발적인 성장 시점이 딱 그때였다.
‘언젠가 한번 만나겠지.’
서신을 보낸다면 이것으로 트집을 잡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만뇌문이 거침없는 행보를 해 왔다고 해도, 천화련과 당장 정면으로 부딪칠 수준은 아니었다. 소림사의 방장도 천화련을 언급할 때는 긴장했었다. 그런 사소한 표정의 변화를 황극린은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다 지금은 혈마교와의 일이 먼저였다.
“장로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백온후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우승을 차지한 백온후는 우승 상품으로 무극단(無極丹)을 얻어 취했지만, 내력이 많이 상승하지 않았다. 그는 같이 고생한 사형제들과 함께 영약을 나누었다. 확실히 무림에 걸맞지 않게 심성이 착한 아이였다.
“들어와라.”
“예!”
백온후가 황극린에게 용무를 보고한다.
혹시 모르니 진법을 벗어날 일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했다.
“잠시만 단목 형님을 만나러 나갔다 와도 될까요? 청성산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만무지회의 폐회식이 끝나고는 문도들과 어울려 회식을 했기에 단목기와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 혹시 모르니 흑주가 따라갈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백온후와 흑주가 만뇌문을 나선다.
현재 사대금강 중 하나인 해공대사가 청성산 부근에서 혈마교도가 있는지 감시 중이다. 그리고 나머지 소림의 고승들은 뇌불과 함께 황극린이 미래의 정보로 알고 있는 혈마교도의 지부들을 급습하는 중이었다.
최소한 사천성 부근에서 혈마교의 싹을 모조리 잘라 버릴 생각이었다.
만뇌문을 건드린 대가는 치러야 한다.
아무리 혈마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황극린은 조용한 방에서 이제까지의 상황을 정리하고, 미래를 계획했다.
그렇게 두 시진쯤 지났을까?
“자, 자, 장로님!”
급박한 백온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극린이 급히 방을 나서니 백온후가 보였고, 그 뒤에는…….
‘사람인가?’
흑주는 마치 사람 크기의 무언가를 거미줄로 돌돌 말아 두었다. 뇌섬사라 불리는 흑주의 거미줄. 저렇게 칭칭 묶어 놓으면 아무리 힘이 장사라도 홀로 풀어낼 수 없었다.
“혈마교도로군.”
“네… 죄송해요…….”
이런 상황에 밖으로 나갔으니 백온후는 황극린에게 사죄했다.
“괜찮다. 오히려 좋다.”
“네?”
뇌불과 소림의 고승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납치해 올지 알 수 없었다. 혈마교도를 많이 납치할수록 황극린에게 좋은 상황이라 말할 수 있었다.
“흑주, 놈을 감옥에 걸어 두어라. 잘했다.”
- 끼잇!
칭찬을 받은 흑주가 신이 나서 고치를 끌고 깊은 곳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정말 혈마교 놈들은 안 되겠군.’
마령이 혈마교주의 전언을 전달해 준 적이 있다.
당시에는 북해빙궁주와 엮일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기에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 혈마교는 선을 넘고 있었다.
오히려 좋다고 말했지만, 만약 문도를 건드렸다면.
“혹시 모르니.”
황극린이 만뇌문을 나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었다. 어느 정도 경고를 해 둘 필요성이 있다.
* * *
“셋째 공녀님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쯧.”
셋째 공녀.
어쩌면 언젠가 혈마교의 패권을 쥘 수도 있는 여인이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래도 혈마교 공녀의 서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혈혼단주 혁련소는 서신을 읽는다.
“…….”
마령은 상당히 살벌한 단어를 사용해서 혁련소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셋째 공녀가 정말 황극린을 연모하기라도 하는 건가.”
이건 이것대로 문제다.
마도삼가 중 하나인 묵룡천가의 마령. 그녀는 지지 기반이 약하다. 물론, 혈마교주가 되려면 본신의 힘이 가장 중요하지만… 지금 소교주 후보들은 다 비슷비슷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배경이었다.
만약 황극린과 마령과 이어진다면?
그리고 그녀가 정말 소교주의 위(位)에 오른다면?
혁련소에게는 좌천이 아니라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래도 공손한 어투를 사용하여 마령에게 전할 서신을 작성하던 혁련소.
“혈악(血嶽) 장로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혈악.
혈마교의 장로 중 하나로 중원 무림의 혈마교의 간자들을 관리하고 있는 총책임자였다. 거의 부교주와 비슷한 수준의 고수로 혈혼단주인 혁련소도 어려워하는 인물이다. 소교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지 모르는 마령과는 달리 실제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마인이었다.
“…….”
황급히 혈악의 서신을 읽던 혁련소가 인상을 찌푸린다.
이게 무슨 소리지?
처음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사천성의 지부들이 공격받았다고?’
무림맹의 대대적인 수색에도 들키지 않았던 사천성의 지부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고 들켰다고 왜 자신에게 이런 서신을 보냈는가?
의문투성이였던 혁련소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는다.
“나 때문에 혈마교의 지부를 공격하는 것이라 했다고?”
지부를 습격한 소림사의 고승들과 뇌불이 글을 남겼다고 한다.
계략으로 소림과 만뇌문에 싸움을 붙였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 간다고 했단다. 당연히 혁련소가 그 주체인 것은 몰랐겠지만, 장로인 혈악은 그 작전의 주체가 혁련소라는 걸 알고 있다.
혈악 또한 함부로 만뇌문과 소림사를 공격할 수 없으니.
상황의 책임을 혁련소에게 넘기려는 것이다.
상황이 점점 기묘하게 꼬여 간다는 생각이 들 때쯤.
“보고드립니다! 납치 임무를 나섰던 음명대주가 실패한 듯합니다!”
수하의 보고와 동시에.
이제껏 움직임이 없었던 전음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대가를 치르도록. 먼저 그쪽이 가진 전음석을 가져와라.
점차 상황은 혁련소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