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귀빈
수많은 관중이 모여 토해 내는 함성이 후덥지근한 기류를 형성한다.
솔직히 말하면 용봉지회의 결승보다는 절대적인 관중의 숫자가 적긴 했다. 용봉지회는 3년마다 정해진 날에 개최되는 무림 최대 규모의 비무대회다. 하지만 만무지회는 고작 몇 달 전에 개최를 알리고 참가자를 모집했다.
무림에서 가장 빠른 이동 수단 중 하나가 마차였고, 말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이들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단기간에 준비하여 개최된 만무지회의 관중이 용봉지회보다 적다고 하여 전혀 부끄러울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용봉지회와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첫 번째 만무지회는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누가 이기려나?”
“그래도 단목세가의 단목 소협이 유리하지 않겠나?”
“아니지. 백 소협이 싸우는 걸 보지 못했었나? 그의 재능은 파천뇌권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다네.”
“그래도 단목세가의 단목 소협도 이제까지 비무에서 밀린 적이 한 번도 없다지 않았던가?”
관중들은 결승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 토론을 하거나 내기까지 한다.
“참, 그러고 보니 귀빈으론 누가 오려나?”
“그래도 사천성에서 개최되는 거니 청성파의 장문인이나 사천당문의 가주 중 한 명은 오지 않으려나?”
용봉지회에서도 어떤 명망 높은 고수가 관람을 하는지 화제가 된다.
특히 천화련에서 개최되었던 용봉지회에는 무림맹의 부맹주와 소림의 방장까지 참석했었다. 타 문파가 개최하는 용봉지회엔 명문거파의 장문인은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
평범한 백성들은 평생 한 번 얼굴을 보기도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만무지회의 결승에 어떤 기인들이 참관할 것인지도 관중들의 화젯거리였다.
“강호 동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결승전의 심판을 맡게 된 청성의 정검대협(正劍大俠)입니다.”
“정검대협!”
“오오, 정검대협께서 심판을 보시다니!”
청성파에도 당연히 이름난 고수들이 즐비하다.
특히 정검대협은 청성의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무인으로, 무공이 뛰어날 뿐 아니라 협의지사로서도 강호에서 명망이 높은 무인이었다.
결승전이다 보니 확실히 수준이 높은 심판이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작은 요소들로 만무지회의 격이 높아지고 있었다. 명성이란 이렇게 하나씩 쌓아 올리는 것이다.
“먼저 비무대회에 앞서 공지할 것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더 언급할 것이 아닌 듯하군요.”
“뭐야?”
“웬 공지?”
소란스러움이 더해진다.
무슨 말을 하려고 막 결승이 시작되기 전에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심판의 수준이 대회의 격을 올리는 것은 맞지만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 지금 중요한 건 결승…….
“어?”
만을 헤아리는 관중 중에서 누군가 관중석에 올라온 스님을 알아본 이가 있었다.
거대한 풍채. 가만히 있음에도 주변을 압도하는 존재감.
“자, 자, 잠시만! 저, 저분은!”
“왜, 누군데 그래?”
“처, 천선대사!”
“뭐……?”
소림과 만뇌문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건 이미 소문으로 알음알음 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림의 방장이 직접 여기까지 찾아올 일이었던가?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의 천선대사가 비무장에 올랐다.
그는 회한이 담긴 눈동자로 관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그의 목소리엔 중후한 내력이 깃들어 있었다. 크게 소리치는 것도 아니었지만, 관중석 끝까지 목소리가 전해진다.
“소승은 소림의 방장 천선입니다.”
“오오! 정말이구나!”
“근데 왜 귀빈석에 가는 것이 아니라 비무장에 오른 거지?”
관중석에서 의문이 터져 나왔다.
천선이 말을 이어 나간다.
“여기 계신 시주분들께 모든 것을 밝히진 못하지만, 만뇌문과 소림 사이에선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뇌불의 무공인 혈풍뇌전신공을 반환하라고 했던 일이 있겠지요.”
웅성거림이 커진다.
“하나, 오늘 이 자리에서 소림의 입장을 정정하려 합니다. 소림은 뇌불의 혈풍뇌전신공의 존재를 소림사와 상관없이 독립적인 무공으로 인정하며, 앞으로 소림은 혈풍뇌전신공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
관중석이 침묵에 휩싸인다.
뭐, 만뇌문과 소림이 모종의 사건으로 그 일을 해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그런 일은 이렇게 백성들에게 밝히지 않는다. 소림사가 먼저 소유권을 주장하고 그것을 철회하는 것만으로도 소림의 명성은 추락하게 되니까. 최대한 평판을 떨어트리지 않는 선에서 정리한다.
그런데 소림의 제자도 아니고 방장이 직접 나와서 선언한다?
관중의 머릿속엔 의문이 가득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리고 무림공적으로 지정되었던 뇌불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림의 의지와 무림맹 회의를 거쳐 뇌불은 오늘부로 무림공적에서 해제됩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이렇게까지 소림사가 자세를 낮춘다니? 이제까지의 선언에서 소림의 평판에 도움이 될 말은 없었다. 오히려 만뇌문의 명성만 드높아지고 있었다. 그 소림사마저 한 수 접어 주는 문파라는 명성은 중원의 어떤 문파도 가지지 못한 거다.
“여러 오해 속에서 소림사는 만뇌문에 수많은 피해를 야기했습니다. 소림은 이 자리를 통하여 만뇌문에 정식으로 사과하고자 소승이 직접 비무장에 올랐습니다.”
자존심.
무인에겐 목숨보다 더 중요할 때가 많았다. 하물며 위세가 크지 않은 작은 문파의 문도들도 그러할진대,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는 어느 정도일까? 그들이 이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사과를 결심했다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어야 하는 걸까?
방장의 말이 끝나자 비무장에 사대금강이 올랐다.
특히 나한전주 해월대사는 퀭한 눈빛과 홀쭉한 볼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하다.
방장과 사대금강이 황극린과 뇌불이 있는 귀빈석 정면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허리를 숙였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뭐야? 대체 이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소림이 만뇌문에 사과하는 건가! 그 누구도 아니고 소림의 방장께서 직접?”
소란이 일었지만, 소림사의 고승들은 허리를 들지 않았다.
깔짝 인사만 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관중이 의문조차 표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기 시작했을 때.
몇몇 이들은 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귀, 귀빈석을 보게!”
“뭔데?”
웅성거림이 커진다.
먼저 녹색의 장포를 걸치고, 귀밑에서 입가까지 기다란 흉터가 난 사내. 모든 것을 눈빛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시선으로 비무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사내는 독왕(毒王)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사내였다. 정파 무림에서 독을 가장 잘 쓰는 무인, 사천당문의 가주. 그가 직접 행차하여 만무지회를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잠시만, 독왕 대협 옆에! 설마 아미파의 장문인이 아니신가?”
“뭣이?”
아미파.
구파일련의 한 축을 담당하는 문파. 그리고 소림과 최근 악연이 있었던 문파였지만, 어찌어찌 잘 해결했었다. 하지만 은근히 아미파가 소림사에 한 수 접어 줬다는 소문이 돌긴 했었는데, 아미파의 장문인까지 만무지회를 관람하러 왔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로 천선대사의 사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끝이 아니야! 저길 보게!”
“공동? 정말 공동파라고?”
공동파.
하늘의 신선이 지상에 강림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도가 계열의 문파 중에서도 속세와 가장 담을 쌓았다는 문파가 바로 공동파다. 그들은 드높은 공동에서 도를 닦으며, 세인들이 가장 보기 힘든 무인이다.
“공동의 장문인 옥운진인(玉雲眞人)이 분명함세! 공동파가 개최했던 용봉지회에서 아주 잠깐 얼굴을 비친 것이 기억이 나! 허허허, 저 신선과도 같은 모습을 어떻게 잊겠는가?”
심지어 공동파의 제자도 아니고 장문인이다.
지금 귀빈석에 앉은 이들은 절대 한 번에 볼 수 없는 인물들이다. 맹주령을 통하여 장문인 회의라도 있다면 모를까. 평범한 백성들은 일생에 한 명만 봐도 그 업적을 주변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었다.
사천당문, 아미파, 공동파.
더 놀라운 점은… 그들이 ‘일부’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저, 저기에!”
동쪽 귀빈석에 앉은 거대한 풍채의 사내. 태양과도 같이 붉은 장포와 사람만 한 거대한 검이 그가 누군지를 알려 준다. 그를 실제로 본 적이 없더라도 그의 외견만으로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화, 화염신황!”
화산파의 장문인 화염신황.
매화검법을 또 다른 경지로 승화시킨 한 명의 천재. 만뇌문이라는 작은 문파에서 탄생한 것이 황극린이었다면, 애초에 무림의 한 축을 담당하던 화산파에서 나타난 천재. 천하제일인을 꼽자면 매번 천화련주와 같이 언급되는 무인이었다.
“만무지회를 참관하러 화염신황 대협이 왔다고?”
“허허허, 사천성에서 저분을 뵙게 될 줄이야! 정말 미쳤구나!”
화염신황은 관중의 웅성거림에도 가만히 소림의 방장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화염신황도 끝이 아니었다.
제갈세가와 진주언가의 가주나 장문인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무당파의 원로원주까지.
관중의 수는 용봉지회보다 훨씬 적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귀빈석에 앉은 기인들의 수준은 용봉지회를 아득히 초월했다. 관중들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요즘 명성을 떨치던 만뇌문 문도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자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런 진풍경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 명 보기도 힘든 기인인사들이 귀빈석에 쪼르르 앉아 있는 모습을 어찌 상상하겠는가?
“만뇌문이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분들이 직접 행차하셨단 말인가?”
“그러게 말일세. 어쩌면… 만뇌문이 구파일련의 일좌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만뇌문은 이미 탈맹한 것을 잊었나?”
“탈맹? 왜 굳이 무림맹을 나간 거지?”
“자네, 그 소문 듣지 못했나?”
무림의 정세에 밝은 이들은 만뇌문이 탈맹한 것이 소림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강호의 백성들은 무림맹을 절대적인 단체로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뇌문이 무림맹에서 탈맹하고 용성의 일원이 된 것도 모자라, 소림사가 직접 찾아와서 사과하고 있었다. 심지어 뇌불은 무림공적에서 해제되었다. 무림공적은 지정되기도 어렵지만, 역사적으로 해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각의 시간이 지난 후, 소림의 방장과 사대금강이 숙였던 허리를 폈다. 굴욕적인 사과라 할 수 있었다. 만뇌문의 문주 뇌불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뇌불은 수많은 관중이 보는 앞에서 방장에게 도발 따위는 하지 않았다.
만약 현재 상황이 우세하다고 하여 사과하는 소림의 앞에서 거들먹거린다면, 오히려 만뇌문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사과는 받아들이도록 하겠소. 앞으로 만뇌문과 소림은 마찰이 없었으면 하오.”
“예, 만무지회가 끝난 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뇌불은 방장에게 받을 것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라면 뇌불은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장을 비롯한 사대금강이 터벅터벅 비무장을 내려갔다.
언제나 당당하던 소림 고승들의 뒷모습이 축 처져 보였다.
결승의 심판을 맡게 된 청성의 정검대협 장로가 다시금 비무장에 올라 참가자들을 호명한다. 천하의 정검대협도 귀빈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긴장했지만, 최대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가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내공을 담아 외친다.
“만뇌문의 백온후.”
“오오오오오!”
“귀엽다! 이번에도 이겨라!”
소림의 사과 또한 관중들에게 여운으로 남았지만, 막상 비무가 시작되려 하자 그들의 관심은 모두 비무로 쏠렸다. 얼마나 이들을 높게 평가하면 화염신황을 비롯한 무림의 기인인사들이 관전을 하겠는가?
관중의 기대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단목세가의 단목기.”
“늠름하다!”
“단목세가의 힘을 보여 줘!”
새로운 칠룡의 후보 중 하나.
여기서 승리하는 이가 칠룡오봉에 이름을 올리는 건 당연해 보인다. 과연 누가 승리를 가져갈 것인가? 무림의 절대고수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제1회 만무지회의 결승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아아아아아-!”
백온후와 단목기가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했다.
두 사람의 눈동자엔 승리를 향한 열망이 일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