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그 이후
생각의 범위가 좁아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중심의 한 가지 입장에서만 사물을 보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고방식.
해월대사는 아집에 빠져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뇌불이 소림사에 있던 시절 거침없는 행동과 언동으로 소림의 명성에 누를 끼친다고 생각했을 때부터였을까?
황극린이 파계당한 뇌불의 마공을 익혔기에 그 또한 뇌불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리라 생각한 때부터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만뇌문을 지키는 지옥과도 같은 진법을 마주하고 난 후부터일까.
소림의 나한전주 해월대사.
이번 비무에서 무언가 일이 터질 것을 예상했다. 안 그래도 의심되는 만뇌문이다. 그들이 만무지회에서 일을 벌이리라고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소림의 제자 천학의 죽음에 그들이 관련되어 있으리라 믿었다.
초혼대법이라는 초강수를 써서라도 해월대사는 만뇌문의 실체를 밝혀내려 했다.
뇌불의 세맥에 은침이 꽂혔을 때, 해월대사는 그들이 진정으로 악의 축이라는 증거를 잡아냈기에 흥분했으며 또 분노했다. 뇌불이나 황극린이 천학을 죽인 범인이라는 걸 세상 모두가 알게 되었다.
용성이라는 배경을 둔 만뇌문이었지만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소림이 작은 문파를 괴롭힌다는 소문도 쏙 들어가고,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이 다시금 강호를 지켜 냈다고 칭송받을 것이다. 그것이 소림의 역할이다. 무림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을 처단해야 한다.
하지만.
해월대사의 자기 확신은 무림맹 사천지부장 하지태가 등장한 후 흔들렸다.
처음엔 만뇌문이 그를 인질로 잡았다고 생각했었다. 세밀하게 잘 만들어진 인피면구를 벗겨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말도 안 돼!’
해월대사는 경악했다.
황산파 출신의 하지태가 혈마교의 끄나풀이었다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어떻게? 대체? 왜……? 은침이 반응하지 않는 거지?’
혈마교의 끄나풀로 추측되는 하지태의 세맥에 은침을 찔러 넣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다. 천학의 심장을 꿰뚫었던 뇌기와 같은 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뇌문이 아니라 혈마교가 흉수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혈마교가 만뇌문과 소림사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이번 사태를 계획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해월대사는 스스로가 현명하고 옳은 길로 걸어왔다고 확신했다.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정신적인 충격은 배로 다가왔다.
틀렸을 수도 있다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잘못된 길을 걸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해월대사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설마 어쩌면.
달마대사께서 남기신 초혼대법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
그런 망측한 상상을 하며 자기 세맥에 은침을 찔러 넣은 해월대사.
결국, 그는 진실에 닿을 수 있었다.
‘내가 틀렸다.’
해월대사는 감히 은침을 뽑지 못하고, 멍한 눈을 할 뿐이었다.
다른 사대금강들도 해월대사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로지 청성파의 태을종객만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황극린과 뇌불에게 사과하고 상황을 수습하려 했을 뿐이었다.
* * *
안휘성 황산.
비록 구파일련에 속하진 못했지만, 역사가 깊은 명문거파 중 하나로 황산파가 있었다.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 그 아래서 황산파의 문도들은 평소처럼 열심히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오늘도 황산파의 하루는 다르지 않으리라.
황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다 같은 생각이었다.
복색을 통일한 무인들이 황산파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슨 일입니까? 안휘성 지부의 무인들이 왜…….”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굳은 얼굴의 안휘성 지부의 무인들. 그들은 황산파와 싸움이라도 불사하겠다는 태도였기에, 황산파의 제자들은 당황하면서 문파의 장로들을 기다렸다. 그런 와중에도 안휘성 지부의 무인들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어림잡아도 족히 오백 명이 넘는 무인이 황산파에 올랐다.
그리고.
“창천뇌검 대협?”
안휘성에서 가장 유명한 무가(武家), 남궁세가의 가주마저 등장했다. 막 옥병루(玉屛樓)에서 달려 나온 좌조천리(坐照千里) 장로가 창천뇌검의 앞에 섰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창천뇌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좌조천리 장로의 물음에 대답한 건 무림맹 안휘지부장이었다.
“사천지부장 비천도 하지태, 그가 혈마교의 간자로 밝혀졌습니다.”
“……?”
전투라도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에 검을 쥐고 있던 황산파의 제자들이 제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건가? 비천도 하지태, 그는 황산파 출신의 무인이었다. 언젠간 무림맹 본성 요직으로 올라갈 것이라며 황산파의 기대를 잔뜩 받는 고수였다.
그런데 그가 혈마교의 간자라고?
“이에 맹주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오늘부로 황산파의 무인들은 황산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의혹이 풀리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어느샌가 황산파의 장로들이 속속 도착해 있었다.
당연히 안휘지부장의 말에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떼지 못했다.
“서로 얼굴 붉힐 일은 만들지 않았으면 하오.”
묵직한 저음. 남궁세가를 이끄는 수장이자 천하칠대고수의 일인 중 한 명인 창천뇌검이 말했다.
“구파일련의 장문인들과 육대세가의 가주들이 황산을 주목하고 있소.”
“……!”
“부디 만뇌문을 겁박하여 이익을 취하려 한 게 황산의 의지가 아니었으면 좋겠소. 진심이오.”
만뇌문.
이번 일로 까딱 잘못했다간 만뇌문과 소림에서 전쟁이 벌어질 뻔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황산파 전체가 혈마교의 손 아래에 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만뇌문은 수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무림에서 버텨 왔다. 황산파는 이번 사건의 중심에 있으니 결코 억울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창천뇌검은 황극린과 만뇌문에 빚이 있었다.
그런데도 무림맹 내에서 오해를 받는 만뇌문을 제대로 지켜 주지 못했다. 그런 빚을 이렇게라도 갚아야 한다. 만뇌문이 받은 오해만큼 다른 문파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 창천뇌검 정도나 되는 거물이 황산에 직접 오른 이유였다.
“소림의 천학과 관련이 있는 문파는 모두 동일한 조사를 받을 것이오. 사천지부와 은천문 그리고 소림사까지 말이오.”
창천뇌검의 마지막 말에 감히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구파일련 중 한 축을 담당하는 소림사도 이런 조사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황산파에서 조사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강호 무림 전체에서 혈마교와 결탁했다고 의심받을 게 뻔하다.
황산파의 장로들은 짧게 토의한 후 결론을 냈다.
“창천뇌검 대협과 무림맹에 적극 협조하도록 하겠소.”
무림에서 살아가려면 대세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흐름 자체를 비틀어 버리는 만뇌문 같은 문파가 아니고서야 말이다.
만뇌문은 어느샌가 중원 무림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 * *
만무지회가 다시 진행됐다.
개가 짖어도 마차는 간다. 천학의 죽음으로 인하여 중강현은 뒤숭숭한 분위기였었지만, 다시 시작된 만무지회의 열기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어느샌가 만뇌문이 자신들의 제자를 위해 천학을 죽였을 수도 있다는 소문은 자취를 감췄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간 몰매를 맞는다.
“그래도 만뇌문의 제자들이 본선부터 진출하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는…….”
“아직 이런 미친 소리를 하는 놈이 있었군!”
“내가 자네를 잘못 봤네! 그리 소식이 늦어서야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갈 수 있겠나?”
“조언하지. 다신 그딴 말을 중강현에서 내뱉지 말게! 아니, 중원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야!”
몇몇 눈치 없는 이들이 분위기도 읽지 못하고 만뇌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가 종일 욕을 들어 먹었다. 세간의 분위기란 이렇게 빠르게 바뀌는 것이다. 작정하고 만뇌문을 억압하려는 세력은 어느샌가 발을 빼 버렸고, 사대금강이 만뇌문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그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이다.
그것도 평제자가 아니라 사대금강이다. 구파일련에 속한 문파들은 그네들의 지역에선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 있다. 소림이 터를 잡은 등봉(登封)현에서 그들을 욕보인다면 언제 돌을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만무지회는 그대로 진행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결승 대진이 결정되었다.
만뇌문의 백온후.
단목세가의 단목기.
우승 후보로 점쳐지던 옥향선녀는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었다. 천학 사건이 터지기 전이었다면, 만뇌문이 뒤에서 그녀를 처리했다고 욕할 사람이 넘쳐 났겠지만… 최소한 중강현에서는 그런 소문 따위를 입 밖으로 내뱉을 간 큰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승전 전날.
황극린은 백온후를 불렀다.
“긴장되느냐?”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그래도 후회 없이 비무를 하고 싶어요.”
- 끼.
장하다는 듯 백온후의 머리에 올라가 있는 흑주가 날개를 퍼덕인다. 어느 순간부터 흑주는 백온후의 머리가 보금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항상 올라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부터 백온후의 실력도 빠르게 상승했다.
“단목세가의 단목기는 용봉지회에 출전했다고 하더라도 우승을 노려 볼 만한 실력이다. 그러니 비무에서 배우는 게 많을 거다.”
황극린은 본선의 비무를 보며 다른 문파의 무공을 분석했다.
단목세가의 무공은 변초를 활용한 환검(幻劍)이 특징이었다. 처음엔 천학이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본선이 진행될수록 단목세가의 단목기의 실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백온후도 주목받고 있었지만, 단목기도 만만치 않았다.
“네, 장로님. 열심히 할게요!”
밝은 백온후의 대답.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된다. 백온후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단목기에게 패배하거나 같은 만뇌문도에게 패배했다. 중요한 비무에서 패배하면 실의에 빠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만뇌문도들은 패배가 각성의 계기가 된 듯이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백온후가 우승하면 더 좋겠지만, 패배하여도 잘 극복할 수 있으리라.
사형들이 어떻게 하는지 직접 보고 느꼈을 테니까.
“오늘은 수련하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해라.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게 말이다.”
“네!”
황극린의 말엔 모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백온후는 내일 결승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는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백온후가 황극린의 격려에 생글생글한 미소를 띤 채로 방을 나섰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백온후가 떠난 후, 황극린의 방에 방문한 것은 사대금강 중 하나인 해공대사였다. 나한전주였던 해월대사. 해공대사는 자운당(慈雲堂)의 당주였다. 자운당은 금분세수까지는 아니지만, 속세와의 연을 끊은 채 불법에만 수련을 매진하는 주지들이 모인 곳이었다.
배분으로만 따지면 그 소림사의 방장보다 높은 이들이 자운당의 비처에서 머물고 있다.
그렇기에 해공대사는 어떤 부분에서는 나한전주인 해월대사보다 소림에서의 발언권이 컸다.
그는 사대금강의 대표로 황극린을 찾아왔다.
“자운당의 주지들께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내일 방장께서 직접 반야신공과 혼원장공의 사본을 내어 주실 겁니다.”
“예, 문주께선 그 정도로 만족할 겁니다.”
뭐, 반야신공과 혼원장공의 진본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사본을 내어 주는 것만으로도 소림사가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만큼 소림사는 반성하고 있었다. 내일 소림사의 방장이 직접 만무지회의 결승을 참관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수많은 인파가 모일 만무지회 결승이다.
소림의 방장은 그 인파의 중심에서 만뇌문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은천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무림맹에서 천라지망을 펼쳐 그들을 추격하고 있으니 곧 잡아낼 수 있을 겁니다.”
황극린은 무림맹의 공적이 되어 천라지망에 당해 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단전에 금이 간 상태였다고는 하나, 인간 한 명을 잡기 위한 지독하고 끈질긴 추격을 겪어 본 황극린으로선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안다. 무림맹 또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해공대사는 스스로 정보원을 자처하며 만뇌문에게 무림맹과 소림이 어떤 대처를 하고 있는지 보고하고 있었다.
해공대사의 보고를 듣던 황극린이 입을 연다.
“혈마교에 대하여 제가 요청한 것은 어떻게 됐습니까?”
혈교와 마교가 합쳐지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마령이 찾아오고 혈마교주가 만뇌문에 제안을 했었지만, 그들은 만뇌문의 뒤통수를 때렸다. 마령과 거래한 것이지 혈마교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충격 따위는 받지 않았지만… 그들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다고 황극린은 미련하게 정면으로 혈마교와 맞붙을 생각은 없었다.
받은 대로 돌려준다.
“그건… 감히 소승이 말씀드릴 부분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아마 내일 상당히 많은 절대고수들이 만무지회의 결승을 참관할 겁니다.”
해공대사가 내일 만무지회를 참관할 예정인 고수들의 별호를 읊는다.
황극린조차도 놀랄 수준의 거물들의 이름이 줄줄이 거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