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10화 (210/316)

210화 은침

당연히 소림사는 뇌불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리라. 반야신공이나 혼원장공은 내어 줄 수 없는 무공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소림사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무공이었으며, 그것을 볼 수 있는 건 소림의 방장뿐이었다.

방장 천선대사의 고민이 깊어진다.

“아미타불.”

정말 만뇌문이 천학을 죽인 범인일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해월대사는 만뇌문이 범인이라 확신하는 듯하다. 그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방장 또한 해월대사를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천선대사의 마음이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흔들린다.

천선대사가 보았던 황극린의 무위. 어린 황극린은 방장을 앞섰다. 달마가 남긴 절학을 그 비무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황극린도 숨겨 뒀던 수가 있으리라. 그게 무엇을 뜻하는가?

‘무서울 정도의 재능. 어쩌면… 그 달마조사의 옆에 대등하게 설 재능.’

부러움과 시기.

소림사의 고승들은 모두 해탈하고자 한다. 인간의 감정에서 탈피하여 해방되고자 한다. 하지만 방장은 해방되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감정이란 격류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떤 게 옳은 길일까.

전대 방장께서 계셨다면 뭐라고 답해 주셨을까?

시간이 지나간다.

달이 떨어지고, 해가 떠오른다.

아침이 밝아 왔을 때.

천선대사가 붓을 들었다.

‘지금 방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학의 죽음이다.’

방장은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소림을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 * *

“방장께서 다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

“반야신공과 혼원장공은 내어 줄 수 없다고 했겠지?”

“그건 어떤 누구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만뇌문이 요구한 것은 공식적인 사과와 대환단 그리고 불가침조약이다.

방장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예상한 일이긴 했다. 채찍을 때렸으니 당근을 줄 차례였다. 소림사가 다른 요구 조건은 승낙했으니 그들도 큰 결단을 내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한들, 반야신공과 혼원장공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뇌불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혈풍뇌전신공은 소림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뇌불이 선택한 무공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주화입마에 빠졌다.

‘극린이 놈은 혈풍뇌전신공을 익히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아이의 세맥과 혈맥은 그 누구보다 튼튼하다.

애초에 영물의 내단을 취하여 체질을 변화시키는 놈이었으니, 계속 환골탈태를 한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뇌불은 다르다.

그는 혈풍뇌전신공을 대성할 수 없었다. 혈맥을 이용하는 무공은 황극린과 같은 육신을 가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는 소림의 무공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최근 성장한 것은 영약을 먹고 황극린과의 비무에서 깨달음을 얻은 덕도 있었지만… 소림의 절학이 얼마나 뛰어난지 다시 한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뇌불 자신을 위해서라도.

만뇌문의 문도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더 강해져야 했다.

그렇기에 소림사에 반야신공과 혼원장공을 요구했다. 지금은 그들을 압박하기보단 풀어 줘야 할 때다. 이미 패는 모두 갖춰졌으니.

“좋다. 내 팔에 찔러 봐라. 극린이 놈과 난 같은 내공심법을 익혔다.”

뇌불은 사대금강 전부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황극린 대신 은침을 맞기로 했다. 황극린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뇌불의 의지가 강경했다.

“알겠습니다.”

해월대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은침을 들었다.

그렇게 뇌불이 내민 손목에 은침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잠깐.”

뇌불이 갑자기 손을 뺐다.

“무슨 짓입니까?”

해월대사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사대금강이 기운을 끌어 올린다.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데 말이다. 달마의 초혼대법은 실패할 수도 있지 않나?”

“지금 달마조사님을 욕보이려 하는…….”

“아니. 나도 그 양반은 존경한다. 만나 본 적은 없지만 한 시대의 무림을 풍미했던 대종사니까.”

뇌불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니 해월대사가 떨떠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너희가 완벽하게 펼쳤다고 장담할 수 있나?”

“그건…….”

해월대사는 자신감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달마는 소림사에서 유일하게 해탈하여 삶의 굴레를 벗어던진 부처였다. 그가 남긴 심득을 온전히 펼쳤다고 자부하는 것 자체가 오만한 발언이었다. 소림의 고승이라면 대부분 쉽게 대답하지 못하리라.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로군.”

“당연히 달마조사께서 펼치신 것처럼 완벽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나, 은침에 깃든 뇌전의 기운은 거짓말을 하지 않겠지요.”

이미 심장에 박힌 기운을 뽑아냈다.

만약 혈풍뇌전신공으로 쌓아 올린 내력이라면 반발하지 않고 상대의 세맥에 흘러 들어갈 것이다. 만약 다르다면 반발이 일어나 은침이 크게 요동칠 것이다.

“청성의 장문인 양반.”

“…예?”

태을종객은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당황한 그가 눈을 끔뻑끔뻑 뜨고 있으니 뇌불이 말을 잇는다.

“당신이 증인이니 똑똑히 봐야 할 거요.”

“그러겠습니다.”

뇌불이 손을 내밀었고.

해월대사가 은침을 찔러 넣는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은침에 깃든 기운이 반발한다면 만뇌문은 흉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 반대로 은침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만뇌문이 범인이다.’

모두가 긴장한 눈으로 은침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태을종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정말 만뇌문이 천학을 암살한 배후란 말인가?

‘대체 왜?’

태을종객은 황급히 황극린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사대금강은 전투태세를 취했다. 당장이라도 합격진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학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이다. 화경의 고수가 둘이나 있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들의 각오가 전해졌던 탓일까?

태을종객이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객잔 주위로 무림맹의 무인들과 청성의 무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이렇게 되길 원하진 않았지만, 태을종객은 무림맹에 속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마땅한 행동을 해야 했다.

“허허허, 정말 네 말대로구나.”

뇌불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린다.

해월대사가 격노했다. 목에 핏줄이 선 상태로 외친다.

“감히! 이런 일을 벌이고도 그리 뻔뻔하게 요구를 해! 대환단? 공식적인 사과!?”

오히려 그러한 요구 때문에 해월대사는 마음이 흔들렸다.

처음엔 만뇌문이 범인이라 확신했었다. 물증보다는 심증이 앞선 확신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만뇌문이 너무 강하게 나오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라!

만뇌문이 범인이었다. 소중한 제자 천학을 죽인 흉수가 눈앞에 있었다.

“사대금강 모두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두 사람 중 한 명은 데려갈 것이다!”

“잠시 기다리시오.”

황극린이 두 손을 든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우리 문주께서 묻지 않았소? 초혼대법이 완벽하냐고 말이오.”

“허, 그딴 궤변으로 넘어갈 생각이더냐? 이젠 통하지 않는…….”

황극린이 움직인다.

사대금강이 바로 합격진을 펼치려는 순간.

“잠시만!”

태을종객이 크게 외친다.

안 그래도 오늘 왔어야 할 사람이 오지 않아 의아했던 참이었다. 그런데 황극린이 옆방의 문을 여니 한 사내가 기절한 상태로 포박된 것이 보였다.

“황 장로! 정말 이러긴가! 난 자네를 믿었다네!”

태을종객의 배신감은 상상 이상이다.

황극린을 믿고 청성파와 같이 청성산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만무지회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만뇌문과 거래하여 청성파도 이득을 취한 것도 있었지만, 청성도 구파일련에 속한 문파다. 그들도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문파를 꾸려 나갈 힘이 있는 문파다. 단지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헌데, 저 꼴을 보라.

황극린이 숨겨 둔 사람은 다름 아닌 무림맹 사천지부장 비천도(飛天刀) 하지태였다. 그는 황산파 출신의 무인으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무림맹의 장로진에 영전(榮轉)할 가능성이 매우 큰 무인이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하지태를 납치한 건가?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구나! 뇌불! 황극린! 네놈들의 악독함에 치가 떨리는구나!”

해월대사가 열변을 토한다.

“하나, 잘못 생각했다. 사대금강은 오욕을 뒤집어쓰더라도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사파의 종자들보다 더 악랄한 네놈들을 심판할 것이리라!”

설령 하지태를 인질로 잡더라도 망설일 생각은 없다.

“그 모욕도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끌끌.”

천하태평인 뇌불. 그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노옴! 감히!”

“그만-!”

“……!”

황극린의 눈동자가 붉게 빛난다.

살기(殺氣). 인간을 죽이겠다는 마음. 그것이 유형의 기운으로 표출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무슨……?’

해월대사가 당황한다.

살기라는 건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당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교 중 하나였다. 소림 고승들의 정신력은 살기 따위에 흔들릴 정신력이 아니다. 그런데 황극린의 살기는 달랐다.

원초적인 본능.

단순히 인간을 찢어발기는 맹수를 만났을 때의 공포가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파도.

터져 나오는 용암. 재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강철마저 녹여 버리는 지옥의 불길.

거목을 뽑아 버리는 폭풍. 천둥과 번개를 몰아치며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폭풍우.

천재지변(天災地變).

하나의 생명이 발산하는 살기가 아니다. 재해라 불릴 거대한 흐름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살의가 공간을 지배한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게 가능한 건가?’

화경에 올랐음에도 황극린이 방금 발산한 기운에 경악한 해월대사였다. 기의 운용이 대체 어떤 경지에 올랐다는 말인가?

물론, 해월대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황극린이 의지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의 살기에는 화경에 이른 고수라도 잠시 멈추게 만들 힘이 담겨 있었다. 다만 화경에 이른 고수라면 다음번엔 수월하게 저 기운을 흘려 낼 수 있으리라.

모두가 행동을 멈춘 것을 확인한 황극린.

그가 말한다.

“은침을 사천지부장에게 찔러 보시오. 아직 두어 번 더 할 수 있지 않소?”

해월대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 당연했다. 황극린과 뇌불이 또 어떤 수작을 부렸을지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소림은 또 빚을 진 거다. 흘흘.”

뇌불이 비천도 하지태의 얼굴에 손을 댄다.

태을종객이 결연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찌지, 찌지직.

살갗 찢어지는 소리가 방을 가득 메운다. 하지태의 얼굴 속에 숨겨진, 처음 보는 낯선 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태는 혈마교의 끄나풀이었다.”

“……!”

“해월, 네놈은 은천문(隱天門)에서 정보를 얻었겠지? 그 정보로 우리가 범인이라 확신했기에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그걸 대체 어떻게……?”

뇌불이 사악한 미소를 머금는다.

“이래서 소림이 안 된다니까?”

은천문은 무림맹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정보 문파 중 하나였다.

온갖 잡다한 정보까지 취급하는 개방과는 달리, 특별하고 귀중한 정보만을 취급하여 판매한다. 소림에 만뇌문의 의심 정황을 모두 판매한 것이 은천문이다. 무림맹에서도 그들을 신뢰하고 있다. 당연히 과거 무림맹이 혈마교의 끄나풀을 솎아 내려 했을 때, 은천문 또한 그 의심을 통과했다.

‘설마……! 말도 안 된다, 이건…….’

의문과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은천문을 완전히 신뢰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정보로 모든 것을 판단한 것은 아니다. 단지 만뇌문을 의심할 물증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은침을 가지고 마지막 시험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더 문제다.

만약.

모든 것이 누군가의 계획이라면.

그 누군가가 혈마교라면.

대체 어떻게.

‘초혼대법을 펼칠 것을 예상했단 말인가……?’

그리고 황극린이 쐐기를 박는다.

“놈이 사용한 무기라오. 심장에 난 관통상과 비교하면 알 수 있겠지.”

흡사 송곳과 같은 모양을 한 병기.

해월대사가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하지태에게 다가간다. 기절한 하지태. 오히려 기절했기에 더 정확하게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침을 꿀꺽 삼킨 해월대사가 은침을 꽂아 넣는다.

“말… 도 안… 돼…….”

해월대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린다.

있어야 할 반응이 없다. 달마대사가 남기신 초혼대법으로 뽑아낸 기운이다. 이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디서부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그러던 중,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해월대사의 눈빛이 돌변한다.

쑤욱!

은침을 뽑아 자신의 세맥에 쑤셨다.

“아…….”

해월대사가 초점이 잡히지 않은 멍한 눈동자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본다.

파르르르르-!

은침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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