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09화 (209/316)

209화 대가

황극린의 말에 뇌불의 입꼬리가 가라앉는다.

장난기가 어려 있던 눈동자에 살기마저 일렁이고 있었다.

소림사가 만뇌문을 의심하는 것.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림에서 문도가 죽었으니 흉수를 찾아내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의심받는 입장에선 화를 내야 한다. 아무리 소림사가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해도,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뇌불은 만뇌문의 문주였다.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소림사는 봉문(封門) 할 준비가 되었는가?”

봉문이라는 말에 사대금강이 움찔한다. 유일하게 해월대사만이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더 해 보라는 듯이 뇌불의 말을 기다린다.

“아니, 봉문으로는 약하지. 네놈들은 내 무공을 가져가겠다고 십팔나한을 끌고 와서 만뇌문을 치려 했었지. 우리 극린이가 마음씨가 착해서 망정이지, 솔직히 다 죽여 버렸을 수도 있었어. 그걸 생각해 보면 봉문은 너무 약하군!”

뇌불이 턱을 쓰다듬는다.

“일단 무림공적에서 내 이름을 빼는 것부터 시작하지.”

무림공적이 되면 불편한 게 많다.

기억이 돌아온 뇌불은 과거 자신이 ‘만보련(萬寶聯)’에 꽤 거금을 맡겨 놨었다는 걸 깨달았다. 문제는 만보련이 무림맹을 후견인으로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무림공적으로 지정되자마자 만보련에 맡긴 돈과 귀물(貴物)들이 동결되었다.

“좋습니다.”

해월대사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만뇌문은 용성 소속이다. 아직 뇌불이 무림공적으로 지정되어 있긴 했지만, 언젠간 해제될 것이다. 시기가 문제였던 사안이었을 뿐.

하지만 뇌불은 고개를 젓는다.

고작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소림의 방장과 사대금강이 직접 만뇌문을 찾아와서 공식적으로 사과도 해야겠지.”

공식적.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사과하라는 뜻이다. 사실 사과라는 건 어렵지 않다. 허리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거다.

하지만.

자존심 하나로 먹고살고, 사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는 무인들이 수두룩한 강호에서는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특히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의 방장과 사대금강이 사과한다면, 전 무림에서 소림사의 명예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그건 불가…….”

“어허,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불가능이라니? 더 들어 봐라.”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해월대사가 그의 눈빛에 움찔한다. 소림사에서 그에게 몇 번 얻어맞은 경험이 있었다. 그때마다 뇌불은 저런 눈을 했던 것 같다.

“반야신공(般若神功)과 혼원장공(混元掌功)의 비급을 내놓아라.”

“아미타불!”

욕을 내뱉지 못하니 분노한 음색으로 불호를 외는 사대금강.

지금 그가 말하는 소림의 무공은 오로지 장문인만이 열람할 수 있는 희대의 신공이다. 혈풍뇌전신공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대반야금강공 또한 소림의 절기 중에서도 최상승의 무학이다.

하지만.

반야신공과 혼원장공은 차원이 다르다.

현 방장인 천선대사조차도 아직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다. 아니, 역대 방장들도 완벽히 그 심득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알려진 무공이었다. 달마조사가 남긴 마지막 단서라 불리고 있는 무공.

오히려 봉문보다 더 과한 요구였다.

“귀하도 소림에 몸담았다면 그 요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 텐데 말입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해월대사가 말했다.

뇌불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한다.

“네놈들이 한 짓에 비하면 모자라다.”

“허허허허허! 모자라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듯한데, 반야심공은 달마조사께서 남기신 마지막 심득입니다. 그걸 내어 달라는 건 소림 그 자체를 내어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 말이다.”

“…….”

“멸문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처음 뇌불이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긴장했던 사대금강이 뇌불에게 순수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과거의 연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

뇌불이 쐐기를 박는다.

“네놈들이 나와 극린이를 막을 수 있겠느냐?”

“……!”

해월대사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 또한 방장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황극린이라는 무인의 무위가 어디까지 닿았는지 알게 되었다. 거기에 뇌불이라는 존재가 있다. 그렇다고 한들, 소림이 두 사람에게 패배한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

진짜 싸움이 벌어진다면…….

‘소림이 위험할 수도 있다.’

해월대사는 소림의 대외적인 행사를 담당한다. 그렇기에 세속적인 부분에 해박하다. 뇌불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소림과 만뇌문의 절대적인 무력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절대고수가 작정하고 치고 빠지기를 한다면?

거기다 만뇌문은 배교의 진법으로 완벽한 방비를 갖춰 놓았다.

“뭐, 우리도 싸우고 싶지 않으니 중재안을 말하는 거다. 그래서 이렇게 흉수를 찾는 걸 도와주기 위해 왔지 않겠느냐?”

“은침을 놓는 대가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겨우 입을 연 해월대사.

조금 전보다는 그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전혀. 대환단까지 내놓아라.”

“무슨!”

해월대사의 얼굴이 분노로 달달 떨린다.

사대금강을 대동하였기에 만뇌문도 물러서리라 생각했다. 최근 만뇌문의 행보를 보건대, 그들은 무림에서 자리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소림사와 척을 진다면 만뇌문은 더 성장하지 못할 것이니까.

막상 와 보니 상황이 기묘하게 흘러간다.

뇌불이라는 놈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잊었었다.

‘그래도 황 시주라면 대화가 통할 거다.’

해월대사의 시선이 황극린에게 닿았다.

“황 장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반야신공과 혼원장공 그리고 대환단까지 요구할 정도로 은침의 대가가 크다고 말입니다.”

“부족하오.”

“부족……?”

지금 말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솔직히 난 소림과 싸우고 싶지 않소.”

“그걸 알고 있다면 무리한 요구를 거둔 후에 흉수를 찾는 것에 협조하신다면 소림도 그에 걸맞은 보답을 드릴 겁니다.”

황극린은 웬 개가 짖냐는 듯이 그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입을 연다.

“소림은 그 어떤 경우에도 만뇌문도를 공격할 수 없다는 조약이 필요할 것 같소. 공증은… 구파일련의 장문인들이면 뭐 조금 믿을 만하겠군.”

“아미타불!”

대체 소림사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태을종객과 사천지부장도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림이 보복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소만.”

“껄껄! 맞다. 극린이 네가 잘 생각했구나.”

뇌불은 황극린의 말이 맞다는 듯이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면 찌르시오.”

황극린이 손을 내민다.

은침을 세맥에 찌른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해월대사가 작정하고 그를 해하려 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여유만만이다.

그가 수작을 부리더라도 방비할 대책이 있다는 말일까? 오히려 해월대사가 당황할 정도다.

“어쩔 것이오?”

사대금강이 움찔한다.

기백으로 한 사람에게 밀리고 있었다. 천하의 사대금강이 말이다. 당연했다. 그들이 소림의 기둥이라 해도 소림 전체를 좌지우지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의 선택이 소림사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에,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 해월대사, 어쩔 것이오?

- 저들의 요구는 무리하오. 절대 수용할 수 없소.

- 그렇다고 황 시주에게 은침을 찌르는 걸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머지 사대금강이 해월대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복잡한 얼굴로 은침을 내려다보던 해월대사.

‘저들의 요구 조건은…… 만뇌문이 흉수가 아니라는 가정하에 성립된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해월대사는 나한전주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조건이라지만 여기엔 청성의 장문인과 무림맹 사천지부장도 있다. 그의 발언은 곧 소림의 의지가 된다.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까지 와서 독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뇌불이 묻는다.

“방장한테 물어보려고?”

“그렇습니다.”

“뭐, 이해한다. 혼자 다 감당하긴 싫겠지. 하나, 은침을 찌르지 않더라도 소림은 대가를 치를 게 남아 있는 걸 잊지 마라.”

“…….”

전투라도 벌어지는 줄 알았던 태을종객이 안도했다.

‘해월대사가 옳은 선택을 했어.’

여기서 막무가내로 혼자 결정했다면, 분명 큰 사달이 났을 거다.

막말로 황극린이 진짜 범인이라면?

사대금강이 뇌불과 황극린을 상대할 수 있는가?

뇌불은 나이가 들었기에 실력이 퇴보했다고 하더라도, 황극린의 무위는 최전성기라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사천지부장은 오묘한 눈빛으로 사대금강과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보고.』

기괴한 일이었다.

사람의 손바닥만 한 평평한 돌이 작게 파이며 작은 글자가 새겨지고 있다. 그 누구도 돌에 글을 새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전음석(傳音石).

황극린이 손에 넣은 금화종과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가르고 발견한 돌. 한 쌍으로 이루어진 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한쪽의 돌을 긁어내면 나머지 한쪽도 똑같이 긁혔다.

두 전음석이 공명하는 거리는 대략 천 리.

몇 번 사용하지 않았지만,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여러 실험을 자행하다가 이제는 그 크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전음석을 둘러싼 여러 전투가 있었지만, 현재 이걸 가지고 있는 세력은…….

『소강. 달이 고민 중.』

『여우를 움직이겠음.』

『확인.』

짧은 단어로 이루어진 보고를 마친 사내가 돌을 비단으로 감싸 소매 속으로 집어넣는다. 언뜻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렇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푸른 귀기가 일렁이는 눈동자. 사내가 얼굴을 쓰다듬는다.

“쯧, 인피면구도 다시 바꿔야겠군.”

무림의 고수도 구분할 수 없는 인피면구를 제작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어간다.

필요한 재료도 재료였지만, 사람마다 얼굴의 형태가 달랐기에 인피면구만을 제작하는 장인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제작해야 했다.

사내가 속한 세력에서 특상품의 인피면구를 제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주 바꾸면 상부에서 눈치를 준다. 성과를 내야 조직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법이다.

이미 사내가 받은 지원으로 성채 하나를 사고도 남을 금액과 인력이 투입되었다. 그렇기에 보고하기가 껄끄럽기도 했다.

‘뭐, 이번 일만 잘 끝내면…….’

윗분들의 눈에 들 수 있을 것이며,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잠시 소강상태였지만, 조금만 더 자극한다면 그가 계획한 대로 상황이 흘러갈 것이다.

“간단한 일이지. 뇌불과 소림의 악연을 생각한다면 말이야. 뭐, 우리가 자극하지 않아도 벌어졌을 일이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작전의 성공을 다시 한번 확신한다.

사내가 전음석을 금고에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허허허허, 정말 네 말이 맞구나.”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이 장소에는 그 누구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목소리가 들려오는 건가? 그리고 그 목소리가 왜인지 귀에 익었다. 어디선가 들어 보았던…….

‘제기랄!’

사내의 몸에서 뇌기(雷氣)가 일렁거린다.

금고에 넣으려던 전음석만을 챙겨 벽으로 달려간다. 그곳엔 미리 마련해 둔 비밀 통로가 있었다. 혹시 일이 잘못되면 도주할 수 있는 길. 저기만 통과하여 문을 닫으면 놈들이 아무리 고수라도 추격하기 쉽지 않으리라.

이미 사내는 방 안에 나타난 누군가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고수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도주를 선택했다.

하지만.

“헙!”

마치 비밀 통로가 어딨는지 알고 있었다는 듯.

짧게 머리를 자른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사내가 경악한다.

“황극린?”

“맞다.”

사내는 가타부타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의 소매 속에서 기이한 모양의 무기가 나타난다. 검(劍)도 아니고 도(刀)도 아니다. 길쭉한 송곳처럼 생긴 무기를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찌른다. 송곳의 끝에서는 뇌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죽어라!”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사내는 그것을 피해 냈다.

“커헉!”

장기가 다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 사내의 눈동자의 핏줄이 터져 나갔고, 입과 코에서 검은 피가 흐른다.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 뻗은 주먹에 담겨 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위력이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다.

하지만 사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병기를 놓치지 않고, 지속해서 상대의 급소만을 노린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짧은 머리의 사내는 기묘한 몸놀림으로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쯔쯔.”

혀 차는 소리가 들린 직후.

짧은 머리의 사내의 손에서 푸른 뇌광이 일렁이다.

퍽! 퍽!

두 번의 권격에 사내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가관이로군.”

노인이 다가와 중얼거린다. 쓰러진 사내의 품을 뒤져 비단에 싸인 돌을 꺼낸다. 신기하다는 듯이 돌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노인이 고개를 든다.

“넌 이놈이 범인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았느냐?”

“냄새로 알았소.”

“냄새? 허 참, 개코보다 더하군.”

노인이 짧은 머리의 사내에게 전음석을 건네준다.

“이제 어떡할 거냐?”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하지 않겠소?”

노인이 강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다신 발톱을 세우지 못하게 해야지.”

노인이 잔혹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에게 날을 세웠던 놈들은 모두 잔인한 결말을 맞이했다.

“근데… 벌써 머리가 좀 자란 것 같은데?”

머리를 살짝 만져 본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영약의 효과인 것 같소.”

“…그거, 내게도 효과가 있으려나?”

짧은 머리의 사내.

황극린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없을 것이오.”

뇌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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