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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07화 (207/316)

207화 뜻밖의 사건

삼킨 것을 모두 녹여 버린다는 용암.

황극린은 용암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폭발해 대지 위로 흐르는 뜨거운 용암을 보고 저걸 삼키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무의식적인 궁금증이었다.

당연히 그러한 의미 없는 궁금증은 생각으로만 남겨 둬야 한다. 인간이 용암을 삼키면 몸의 장기가 모두 녹아 버릴 테니까. 애초에 그걸 삼킬 수나 있을까?

하지만 황극린은 지금 그런 용암을 삼키면 어떤 고통이 있을지 체험할 수 있었다. 처음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인면지주의 내단을 취했을 때나 만년화리의 기운을 흡수할 때는 육신이 변화하더라도 딱히 고통 따위는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

뼈와 살이 녹았다가 굳는 고통이 뇌리에 전해진다. 거기다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지도 않는다. 그의 예민한 초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했다.

‘으윽.’

고통을 감내하려면 신음이라도 뱉어야 하건만, 황극린은 입을 꾹 다물고 참아 냈다.

입을 열면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왜 취수혈정(聚髓血精)은 다른 영약과 다를까?’

황극린은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것을 떠올렸다.

취수혈정이 황극린의 몸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기에 고통이 찾아올까?

혈고독의 기름을 정제하여 만든 혈금유는 대단한 효능을 지닌 내상약이다. 황극린에겐 그 내상약의 효능이 몇 배는 좋았다. 그걸 본 성수신의가 황극린만을 위해 만든 영약이 바로 취수혈정이다.

‘근본적인 무언가.’

음양오행의 완벽한 균형을 갖추게 된 황극린.

그의 육신은 무공을 익히는 이상향에 가까운 육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니다. 내 몸은 완벽하지 않다. 인간의 관점으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황극린은 여러 짐승을 떠올린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는 말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 제비가 날씨를 예상하는지 모르겠지만, 놈들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보다 뛰어나다. 도마뱀은 꼬리가 잡히면 자신의 꼬리를 끊어 내고 도망친다. 놀랍게도 도마뱀의 꼬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라난다.

현재 황극린의 육신은 완벽한가?

그런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아니군.’

육신 전체를 녹이고 불태우던 고통이 삽시간에 사라진다.

동시에 빛마저 삼켜 버리는 어둠이 황극린의 의식을 집어삼킨다.

* * *

“벌써 칠 주야라니.”

성수신의가 초조한 기색으로 황극린이 들어간 연공실을 바라본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화경에 이른 고수가 영약을 취하다가 죽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과도한 기운을 억지로 품어 ‘주화입마’에 빠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성수신의는 뇌불이 그 이유로 주화입마에 빠졌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황극린의 정신과 육신은 과거의 뇌불보다 훨씬 강인하지만, 그렇다고 황극린이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안 되겠다. 일단 확인을 해야겠어.’

성수신의는 의원이었다.

만약 황극린에게 이상이 생겼다면 그의 모든 것을 걸고 살려 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우욱!”

연공실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악취가 흘러나와 연단실 전체를 에워싼다. 의원으로 살아오며 온갖 것의 냄새를 맡아 보았던 성수신의도 쉬이 참을 수 없는 냄새였다.

연공실에서 성수신의가 그토록 기다리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 장로님!?”

성수신의의 목소리에 놀람이 가득했다.

당연했다. 취수혈정을 삼키기 전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머리가……?”

황극린의 머리가 몽땅 빠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 빠지고 다시 난 모양입니다.”

“허어!?”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취수혈정의 부작용이 머리가 빠지는 것이라면 성수신의는 평생 황극린에게 사죄하며 살아야 했다. 현 무림의 의학으로는 대머리를 치료할 수 없었다. 물론, 얄궂게도 머리가 빠진 황극린의 외모는 딱히 추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치렁치렁한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닐 때보다 훨씬 빛이 난다.

황극린이 자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만져 본다.

상당히 부드러웠다. 혹시나 하여 머리카락을 뽑아 이리저리 살펴본다.

‘역시 흑주의 뇌섬사처럼 질긴 것은 아니군.’

뭐, 당연한 일이었다.

성수신의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황극린은 머리카락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확인해 보십시오.”

“오오!”

머리카락을 관찰하며 여러 가지를 실험해 보는 성수신의. 연단실 안을 가득 메운 악취는 이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습니까?”

그때서야 성수신의가 정신을 차린다.

“아! 큰일 났습니다!”

그의 얼굴에 조급함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게…….”

성수신의가 흙빛으로 물든 얼굴로 최근 벌어졌던 상황을 간략히 설명한다.

황극린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소림사의 천학이 죽었단 말입니까?”

“예, 무림맹에서 흉수를 찾고 있지만…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문주께서는 살수가 아닐까 의심하고 계십니다.”

살수 하면 흑살문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들이 움직일 이유가 있는가?

뭐, 사실 흑살문에게 이유 따위는 필요하진 않았다. 흑살문은 돈을 받으면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으니까. 은원 관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천학의 시신은 어딨습니까?”

만약 흑살문의 짓이라면 황극린이 알아볼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최상급 수준에 이른 살수라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그런 황극린의 물음에 성수신의가 난감함을 표한다.

“제가 천학의 시신을 살펴보고자 했지만… 무림맹의 고수들이 기를 쓰고 막아서 확인해 볼 수 없었습니다. 아마 장로님이 가셔도 결과는 같을 겁니다.”

황극린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성수신의의 말을 들으니 상황이 그려진다. 지금 중강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만뇌문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예,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뇌불 어르신께서 몇 명을 잡아 족치셨습니다만… 흉수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치밀하게 움직인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현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성수신의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극린의 육신이 어떤 변화를 맞이했는지 확인하는 건, 지금 상황을 타개하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 * *

천학의 죽음.

당연히 중강현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도 황극린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몇몇 이들은 황극린을 의심했다.

“설마 소림사에 복수하려고?”

“아니면 천학이 유력한 우승 후보이기에 그가 직접 나섰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백온후라도 천학을 이길 수는 없다고 판단한 걸까?”

그런 유언비어를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이들도 존재했다.

“오히려 만뇌문과 소림사를 이간질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맞네. 만무지회를 개최해 놓고 왜 이런 일을 벌이겠는가? 만뇌문의 명성에 누가 될 것이 뻔한데.”

“돈을 주고 만뇌문을 욕하라고 매수한 사람도 있다더군. 헛소문에 현혹되어선 안 돼.”

그러자 만뇌문을 의심하는 자들이 반박한다.

“만뇌문에 명성이 어딨는가? 무림맹 소속도 아니고 용성인데.”

“그렇지. 북해빙궁의 궁도들과 혼인하면 사파에 속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만무지회에 걸린 영약의 효능이 거의 대환단과 필적할 수준이라는데, 외인에게 주고 싶겠나?”

“말이 되는 소릴 하게! 만약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면 본선이 차질 없이 진행됐겠지! 만뇌문에선 잠시 만무지회를 중단한다고 하지 않았나?”

큰 사건이 터져 만무지회의 본선은 연기되었다.

사건의 배후를 밝히겠다는 게 문주 뇌불의 의지였다. 물론, 그 행동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때.

“지랄하고 있군.”

싸늘한 목소리에 주변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죽립을 눌러쓴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딴 헛소문이나 믿고 있으니 만뇌문이 무림맹에서 나온 게 아닐까?”

“지금 우리 들으라고 지껄인 거냐?”

특히 만뇌문을 의심하던 이들이 여인을 둘러싼다. 허리춤에 도(刀)를 찬 것을 보니 무림인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허허, 이것 참 버릇이 고약한 년이로군. 어디 쌍판 좀 보… 헙!”

여인이 죽립을 벗는다.

몹시 차가운 외모가 드러난다. 중강현에서 꽤 얼굴이 알려진 여인이었다.

“오, 옥향선녀!?”

만무지회의 본선에 올라가서도 상당한 무위를 선보였던 옥향선녀다. 힘으로 여인을 겁박하려던 사내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참으로 위선적인 놈들이군. 내 얼굴을 보니 도를 뽑기가 겁나나?”

“그, 그게…….”

“뽑을 용기도 없으면, 꺼지도록.”

만뇌문을 욕하던 이들이 슬금슬금 물러선다. 이대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상황을 끝내는 게 좋았다. 굳이 실력이 증명된 무인과 감정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연신 토론을 이어 가던 사내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자 옥향선녀가 다시 죽립을 눌러쓰고 고개를 돌린다.

천학이라는 스님이 죽었다는 성심객잔.

그 주위로 무림맹의 정예들이 포진해 있었다. 소림사의 관계자가 올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던 옥향선녀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단발의 여인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옥향선녀, 아니 북해빙궁의 소궁주 한도린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두야랑?”

“날 기억하네?”

“만독문의 소문주가 여긴 무슨 일이지?”

두야랑이 입꼬리를 올린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이번 일, 너희가 계획한 것 아니야?”

“뭐라고?”

두야랑은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간을 보기보다는 직설적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북해빙궁이 계획한 것 아니냐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지금 중강현에는 만뇌문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던데? 의도적으로 그 소문을 퍼트렸다는 정황도 있고 말이야.”

“그딴 수작을 부릴…….”

“빙백마후는 그런 수작을 부리고도 남는 성격이 아니야?”

“…….”

순간 한도린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것이 치욕스러웠다.

“…그 말, 감당할 수 있나?”

“감당해야 한다면 하지, 뭐.”

두야랑이 어깨를 으쓱한다.

어차피 만독문과 만뇌문은 서로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기로 했다. 그 상대가 북해빙궁이라 하여도, 만독문 또한 사흑련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도린이 말을 이어 나가려 할 때.

“배후가 있다면 그들이 감당해야 할 거다.”

무심한 목소리.

두야랑과 한도린이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그곳엔 황극린이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순간 굳었다.

“어!? 황극린? 너, 머리 자른 거야?”

성수신의가 완성한 영약을 취하고 머리가 빠졌다고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오랫동안 기르던 머리를 잘랐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두야랑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지만, 황극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다행이네.”

두야랑은 황극린의 말을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가 머리를 자를 만큼 심각한 사건을 겪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

한도린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황극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북해에서 싸웠던 것이 떠올랐다. 그 또한 자신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

황극린은 한도린을 무시하고 성심객잔으로 향했다.

걷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경공을 펼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두야랑이 피식한다.

“넌 전혀 신경도 안 쓰는데?”

“…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근데 왜 살을 흘리는 거야?”

“…….”

한도린이 고개를 홱 돌린다.

왠지 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언젠간 네 실체를 밝혀 주마.’

한도린이 떠나가고.

두야랑이 고개를 갸웃한다.

‘근데 두 사람의 눈매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했는데, 착각인가?’

두야랑은 상대의 살(殺)을 자연스럽게 느낄 정도로 감각이 발달했다. 눈썰미가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하다. 조금 전 보았던 한도린의 얼굴과 황극린의 얼굴이 묘하게 비슷했다.

* * *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무림맹의 고수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황극린의 출입을 막았다.

화경에 이른 고수를 그들이 무력으로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림사에서 고승들께서 오실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럼 잠시 기다리겠소.”

“언제 오실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만뇌문에 돌아가셔서 기다리고 계시면 곧 안내를…….”

“도착했소.”

“예?”

“소림의 사대금강 전원이 말이오.”

“……?”

이게 무슨 소린가?

소림사에서 사대금강 중 일인을 보낼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대금강 전원이라고? 그리고 어딜 도착했다는 말인가?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대주님! 소림의 고승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뭐? 정말이더냐?”

헐레벌떡 달려온 수하의 보고에 무림맹 요풍대(夭風隊) 대주 영호량이 깜짝 놀란다.

‘설마… 정말로 사대금강 전원이 찾아왔을 리는…….’

그때, 수하가 이어서 외친다.

“사, 사, 사대금강께서 모두 중강현에 당도하셨습니다. 이제 곧…….”

흠칫!

영호량도 느낄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은 일부러 기운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마치 황극린이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황극린은 사대금강이 나타났음에도 너무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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