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05화 (205/316)

205화 수련의 결과

위무근의 자신감은 자만이 아니었다.

눈앞의 꼬마는 비무 경험도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만뇌문이 왜 저런 놈을 상대로 내보였는가는 자명했다. 음흉하게 종남파의 위신을 깎아내리기 위함이겠지.

만뇌문은 종남이 악의를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

약한 상대를 내보이면 종남이 과하게 힘을 쓸 거라고 생각하겠지? 만약 저런 어린애를 비무에서 다치게 한다면 종남이 지탄받을 것이다. 지금이야 비무장에서 만뇌문을 의심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다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의와 협을 절대 기치로 내세우는 게 정파였다.

막상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들면 반감을 품는 이가 많아진다.

‘날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았단 말이지?’

위무근의 입장에서 만뇌문은 사파나 다름없었다.

놈들이 꾸민 계략이 빤히 보여서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 실로 좋은 태도다. 양보하는 여유를 보여 준다면 세인들은 종남을 더 높게 평가할 것이다.

귀빈석에서 비무를 지켜보는 고문종 장로가 전음을 보내왔다.

위무근은 자신의 판단에 확신하게 되었다.

‘위험할 수도 있다? 제대로 준비하라고?’

문득, 백온후라는 놈이 내뱉은 말에도 짜증이 치솟는다.

순박하게 웃는 저 모습 뒤에도 악인 황극린의 안배가 깔려 있으리라. 인간 같지 않은 놈. 문도를 희생해서 종남파의 위신을 깎아 먹으려 하다니. 하지만 당하지 않을 거다.

‘네놈의 의도는 모두 파악했다.’

위무근은 검을 뽑고, 여유롭게 백온후의 공격을 기다렸다.

어린아이가 작정하고 공격한다고 해도 잠영보(潛影步)라면 쉬이 피해 낼 수 있다. 아니, 그냥 보법을 펼치지 않고도 흘려 넘길 수 있으리라.

“갈게요!”

“그래, 최선을 다하거라.”

일부러 목소리에 내력을 담았다.

비무장 가까이에 있는 관중은 똑똑히 알았으리라. 위무근의 넓은 배포를, 어린 무인의 치기와 만용을 받아 주는 종남의 아량을 말이다.

찌릿!

백온후의 공격을 기다리던 위무근.

그의 망막에 번쩍이는 무언가가 맺혔다. 백온후의 몸에서 발산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뇌전?’

그 순간.

“……!”

퍼억!

찰나의 순간에 거리를 좁힌 백온후가 주먹을 내질렀다. 피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예상보다 훨씬 속도가 빠르다.

“켁!”

빠른 게 다가 아니다.

순간의 충격에 위무근은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귀가 빨갛게 익었고, 허리를 굽혀 구역질을 한다.

“쿨럭! 쿨러어억! 우에에엑!”

“…어.”

백온후는 당장 공격을 이어 나가려다 멈췄다.

‘위 소협이 너무 방심했구나…….’

백온후는 착한 아이였다.

사형제들끼리 만뇌문의 명예를 위해 꼭 승리하자고 다짐했지만, 방심한 상대의 틈을 찔러 비겁하게 이기자고 맹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승리가 만뇌문의 명성에 누가 될 것이다. 거기다 위무근이 먼저 선공을 양보해 준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착한 마음씨를 가진 무인이었다.

순간 관중석에 정적이 감돌았다.

위무근이 푸들푸들 떨리는 얼굴로 고개를 든 순간, 정적이 깨진다.

“뭐야? 저 아이 왜 이렇게 빨라?”

“발돋움을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뭐지?”

“위 소협이 방심한 건가?”

여러 추론이 오간다.

그리고 위무근의 귓가에는 한 사내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설마 실력을 숨긴 건가?”

위무근의 머릿속에서 천둥이 쳤다.

‘이… 이……! 개만도 못한……!’

위무근이 방심한 탓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백온후가 실력을 숨기고 비무에 임했다는 게 더 그럴듯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자기만족에 불과한 억측이다. 강호에서 외관을 보고 무시하다가 황천길로 향한 놈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 이야기도 이제는 진부하다며 호사가들도 잘 꺼내지 않는 주제였다.

하지만 주먹 한 방에 비무장에 오늘 점심에 먹은 것을 게워 낸 위무근은 그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검을 뽑았다. 은은한 기운이 검에 맺힌다.

“실력을 숨겼구나……!”

“…네?”

당연히 백온후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인자한 얼굴로 배려해 주던 무림의 선배가 갑자기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솔직히 무서워서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내 이젠 방심하지 않겠다!”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비무가 시작되기 전 생각했던 대로,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여야 한다.

처음의 일격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종남을 증명할 수 있다.

- 무근아, 정신 단단히 차려라! 놈은 보통내기가…….

장로의 전음이 끝나기 전.

위무근이 움직였다. 한 초식 정도는 펼칠 기회를 주었고, 주먹 하나를 초식으로 퉁칠 수 있지 않은가?

“천성검(天星劍) 운해망산(雲海望山)!”

초식을 펼칠 때, 그 이름을 외치는 건 수련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대에게 어떤 공격을 할지 알려 주는 것만큼 미련한 것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위무근은 외쳐야만 했다.

그래야지 관중이 그를 응원할 명분이 생길 테니까.

구름과 바다를 기다리는 거대한 산.

종남에서 가장 유명한 초식 중 하나인 운해망산이 펼쳐진다. 변화무쌍한 초식은 아니지만, 일검에 거대한 산의 힘을 품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그어지는 종남의 검은 당장이라도 백온후를 깔아뭉갤 듯 위협적이었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검.

“어?”

웅장한 종남의 검법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백온후가 고개를 갸웃하며 일검을 피해 냈다.

당연히 끝이 아니다. 운해망산은 총 17개의 검격으로 이루어진 초식이다. 바다와 구름이 산과 만나면 결국 산은 무너진다. 처음은 느린 것처럼 보이는 산사태는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속도가 붙어 인간을 압사한다.

사선으로 올려지는 검격에는 푸르스름한 검기가 맺혀 있었다.

그런데 백온후는 또 피해 냈다.

‘뭔가…….’

백온후의 눈이 가늘어진다.

처음 운해망산이라는 초식을 보았을 땐 긴장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작정하고 피하고 있으니 그리 빠른 것 같지 않았다.

흑주가 작정하고 쏘아 대는 거미줄이나 구자광의 검과 비교하면…….

‘원래 이렇게 느린 건가?’

백온후는 두 번째 검격을 피하는 와중에 틈을 찾아냈다. 그리고 주먹을 찔러 넣었다.

이번에는 위무근도 방비하고 있었기에 몸을 틀어 피해 냈다. 그런 와중에도 세 번째 검격을 그어 내는 것은 잘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으리라.

위무근은 최선을 다해 운해망산을 펼친다.

그가 평생을 갈고닦은 초식이다. 한 번의 공격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한 번. 단 한 번만 명중한다면!’

쉬이이잇! 점점 빨라지는 위무근의 검격. 그리고 백온후의 눈동자가 그의 검격에 맞춰 빠르게 움직인다. 마치 고양이가 작은 표적을 노리며 눈동자만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퍽!

“컥!”

쉬잇! 퍽! 쉬이익! 퍽!

일방적인 공수 교환. 위무근은 몰랐지만, 묘연골을 타고난 이의 감각은 평범한 사람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 있다. 고양이의 반사 신경이 인간에게 적용됐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웠다. 거기다 백온후는 만뇌문의 진법 내에서, 그것도 사대금강 중 하나인 해월대사도 고생한 세 개의 태양 아래서 수련했다.

“커허억!”

백온후는 지독하게 빈틈을 공략했다.

결국, 위무근은 보법을 펼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권격을 허용하면서도 무리하게 초식을 펼쳐 내상을 입었다.

“…….”

“…….”

침묵이 감돈다.

당연히 위무근이 압도했어야 할 경기였다. 그런데 실상은 백온후가 압도하고 있었다.

“…이게 만뇌문인가?”

황극린.

무림에서 이단(異端)이라 불릴 만큼 강한 무력을 자랑한다. 그의 나이에 화경에 오른 이는 고금 무림을 통틀어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백온후라는 아이의 무재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패배하지 않는다. 나 종남의 위무근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위무근이 발악하며 달려 나간다.

다시금 공방이 시작되었고, 백온후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작은 뇌광이 번뜩인다. 백온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그가 흥분했을 때가 최적의 기회라는 걸.

처음엔 좋은 분이라 생각하며 틈이 보여도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하압!”

백온후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주먹을 찔러 넣었다. 복부에 뇌광이 깃든 권격을 맞은 위무근의 허리가 크게 꺾인다. 턱이 아래로 왔다. 백온후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무릎을 차올렸다.

빡!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얀 무언가와 붉은 피가 위무근의 입에서 하늘로 솟아올랐다.

쿵.

바닥에 대(大)자로 뻗은 위무근.

이미 눈이 뒤집혔다.

기절한 것이다. 막상 피를 질질 흘리며 쓰러진 상대를 보니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백온후의 심장이 쿵쾅 뛴다.

“괘, 괜찮으세요?”

어느새 달려온 청성파 출신의 심판이 백온후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기절한 것뿐이라는 말이었다.

이미 승패는 결정됐다.

청성의 장로가 승자를 호명한다.

“만뇌문의 백온후, 승!”

침묵에 휩싸여 있던 비무장.

장로의 외침에 격변하듯 환호로 물든다.

“우아아아아아아-!”

백온후의 유려한 몸짓은 관중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관중 대부분은 멋진 비무를 보기 위해 중강현으로 온 이들이었다.

첫 승리를 거둔 백온후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다.

승리에 대한 기쁨보다는 얼떨떨함이 앞섰다. 그 또한 최선을 다해 무공을 펼쳤다. 절대 힘을 숨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종남파의 제자에게 이렇게 빨리 승리를 가져올지는 몰랐다.

- 잘했다.

황급히 전음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백온후.

그곳엔 미소를 머금은 황극린이 있었다.

“아…….”

이제야 승리의 쾌감이 백온후의 전신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 * *

손님으로 북적이는 반점.

점소이치고는 튼실한 육신의 사내가 멍하게 서 있다.

“어이, 계산 안 해?”

누군가 점소이를 불렀지만. 미동하지 않는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점소이가 고민이 있다고 기다려 줄 손님은 없었다.

“뭐 하는 거냐? 돈 안 받고!”

“자, 장 형! 그만!”

“왜?”

“저 사람 몰라? 그냥 점소이 아니야.”

“뭐?”

같이 온 일행이 점소이의 진짜 정체를 알려 준다. 지금은 황악반점의 점소이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는 촉망받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었다.

“사, 사마 소협이라고?”

“그래, 얼른 사과드려!”

“죄송합니다, 사마 소협. 제가 몰라뵀…….”

때마침 정신을 차린 사마광도가 화들짝 놀란다.

“아, 예……!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 줄을 놓고 있었습니다. 은자 두 냥입니다.”

말을 붙여 보려던 일행은 사마광도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떠나간다. 황악반점은 이미 만뇌문이 운영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거기다 사마세가의 직계가 점소이로 일하고 있으니 소문이 더 빨리 퍼지는 건 당연했다.

몇몇 손님들이 그런 사마광도를 보고 쑥덕인다.

“종남파의 위무근을 가볍게 이긴 백온후도 그렇고… 반점에서 사마세가의 직계를 점소이를 쓰는 것도 그렇고, 만뇌문의 위세가 대단하긴 한 것 같군.”

“그러게 말일세. 정파였다면 구파일련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였을 거라는 말이 있네.”

“혈풍뇌전신공이 그리 대단한 무공인가? 소림사가 욕심을 낼 만도 하군.”

백온후가 익힌 무공은 혈풍뇌전신공이 아니었지만, 굳이 그것을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백온후가 비무에서 보여 준 실력이라면 뇌불의 절기를 익혔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사마광도는 자신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반점 곳곳에서 울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처음엔 점소이 일을 하는 것에 모멸감과 수치를 느껴야 했지만… 그 또한 사람인지라 차츰 깨닫게 되었다.

‘사마명은 얼마나 강해졌을까?’

오래전에 가문에서 퇴출당한 사마명이었다. 그래서 ‘사마’의 성씨를 붙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사마광도는 그를 사마명이라 부르고 있었다.

‘난 이때까지 뭘 한 거지?’

사마세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도.

비슷한 부류와 어울리며 사고나 치고 다녔다. 그래도 딱히 걱정은 없었다. 사마세가는 중원에서 알아주는 명문이었고, 그 또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비슷한 수준의 여인과 혼인하여 남 부럽지 않게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확신이 없었다.

끈끈하다 여겼던 친우들과의 우정은 산산이 부서졌다. 점소이 일을 한 뒤로 단리총운이나 그가 연모의 마음을 품었던 상관려와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황극린의 시선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겠지.

그걸 보니 사마광도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마세가의 위세라는 것에 의심이 들었다.

“후우… 정신 차리자.”

이렇게 넋이 빠져 제대로 점소이 일조차 하지 못하면, 또 어떤 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

손바닥으로 뺨을 때려 정신을 바짝 차린 사마광도.

그때, 객잔에 들어선 이가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거지가 분명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허리에 3개의 매듭이 있었다. 개방의 삼결제자라는 말이다.

“사마광도 공자시오?”

“예… 그렇습니다만.”

“사마세가에서 보낸 서신이오.”

“……!”

사마광도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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