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만남
만무지회의 예선은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만뇌문의 정식 문도의 숫자는 적었지만, 대장장이 초우와 그의 도제들은 어느 정도 무공을 익혔기에 예선을 관리하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거기다 용봉지회를 개최한 경험이 있던 청성파의 도움도 있었다.
구파일련이 번갈아 개최하는 대회.
용봉지회는 중원에서 가장 큰 규모의 비무대회였다. 청성파가 용봉지회를 개최한 지는 꽤 오래되긴 했지만, 청성의 장로들은 용봉지회를 통해 비무대회를 어찌 진행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아무 소득도 없이 만뇌문을 돕는 것은 아니었다.
만뇌문은 소속을 바꾸어 용성이 되었지만, 그들의 사업은 중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만뇌문이 만든 내상약과 외상약은 효과가 이미 실전에서도 적용되어 인기가 몹시 많았다. 중원 전체에 공급하고 있지만, 매번 물량이 모자라는 실정이었기에 청성은 만뇌문과 계약을 체결하여 우선적으로 약을 공급 받기로 했다.
그리고 청성산과 가까운 현인 중강현에는 청성파가 직간접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체가 많았기에 만무지회의 개최는 청성파로서는 돕는 게 무조건 이익이었다.
청성이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할 만큼 규모가 큰 대회였다.
그만큼 수많은 후기지수가 몰렸다. 고수가 즐비하다는 말이었다.
“7번 예선장에서 소림의 제자가 모두 압승을 거뒀다더군.”
“3번에서도 종남파의 위세가 대단했지.”
소림사.
종남파.
현 무림에서 만뇌문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문파를 꼽자면 단연 두 문파를 언급할 수 있으리라.
두 문파는 마치 만무지회의 본선에 자신들의 제자를 모두 올려 보낼 작정으로 수준이 높은 제자를 파견했다. 그들은 예선에서도 단연 돋보이고 있었다. 괜히 구파일련이 아니다.
중강현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만무지회 예선에서 누가 활약했는지 서로 떠들어 댔다. 소림사와 종남파가 아니고서라도 돋보이는 참가자들은 많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만뇌문의 문도들은 바로 본선에 진출한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당연히 이런 소리도 나온다.
“얼마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면 예선에 참가하지 않는 거지?”
“아니, 실력이 모자라서 예선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 아닌가? 예선을 치르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말이야.”
애초에 용봉지회와 달리 만뇌문에서 개최하는 대회였기에 어떻게 진행하느냐는 그들의 선택이었지만, 만뇌문이 내건 상품의 가치가 크다 보니 이런저런 말들이 나돌고 있었다.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커진 탓에 만뇌문에서 열심히 수련하는 이들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말이다. 만뇌문의 식솔들도 만무지회의 예선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문도들도 가끔 예선을 견학하러 갔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 * *
“우리가 소림의 제자를 이길 수 있을까……?”
제갈수의 걱정은 당연했다.
그 또한 이제까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수련했다. 그런데도 불안해진다. 자신의 명예만 달려 있는 게 아니다. 거기다 제갈수는 다른 문도들과는 다르게 꽤 무림의 정세를 잘 알고 있었다.
구파일련이 얼마나 강한 힘을 보유한 문파인지.
육대세가의 직계들이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품고 있는지.
물론, 제갈수도 제갈세가의 직계였지만…….
제갈세가는 무공보다는 진법에 특화된 문파였다. 그리고 제갈수는 가문 내에서도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할 수준이었으니까.
“하아…….”
“후.”
제갈수가 그리 말하자 백건악과 비청하가 얼굴을 굳힌다.
그들도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무위가 일취월장했다고는 하나 그게 중원에서 통할지 의문인 것이다.
세 사내가 궁상맞게 휴식을 취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연무장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사형! 사제!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요!”
백건악을 비롯한 문도들이 바짝 긴장한다.
백온후가 나타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온후의 머리 위에서 늠름한 자태로 앉아 있는 존재 때문이었다.
파다다닥!
갑자기 공중에 떠오른 흑주. 녀석이 갑자기 거미줄을 쏘아 낸다.
- 끼잇!
“악!”
“흡!”
갑자기 거미줄을 쏘아 대자 세 사내가 백온후를 바라본다.
백온후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인다.
“음, 흑 사형이… 그럴 거면 자기가 나가겠다고 하는 것 같은데요?”
- 끼에!
그 말이 정확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부터인가 흑주는 유일하게 백온후의 머리에 올라탔다. 마치 자신을 모실 기회를 준다는 듯이 말이다.
‘고양이에 올라탄 거미라…….’
백온후가 어떤 체질을 타고났는지 알기에 비청하가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크음, 그런데 흑 사형이라니?”
뭐, 문도들이 이제 흑주와 친숙해졌다고는 하나 사형제지간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백온후는 편하게 흑주를 사형이라 부르고 있었다. 백온후가 그리 부르니 그리 어색한 발언은 아니다.
“그렇게 부르시라는 것 같아서요! 맞죠!?”
- 끼!
흑주는 그 후에 끼에, 끼이이! 영문 모를 소리를 질러 대며 문도들은 훈계했다.
솔직히 뭐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대로 안 하면 흑주에게 잔뜩 혼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뭐, 사실 흑주가 혼을 내지 않더라도 문도들은 열심히 했을 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힘이 난다.
‘그래, 나는 구 교관님과 문주님 그리고 장로님의 지옥 훈련을 이겨 냈다.’
‘세 개의 태양이 떠오른 상태에서 오리걸음을 했었지.’
‘흑주의 독이 묻은 거미줄을 피해 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던지.’
이제껏 해 온 수련을 상기하며 백건악이 결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이제껏 해 왔던 것을 의심하지 않고 나아가면 된다. 그게 우릴 거둬 주신 분들에게 은혜를 갚을 방법이다. 패배하더라도 후회 없이 싸우자.”
패배.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패배였다. 황극린이 쌓아 올린 만뇌문의 명성이 자기 때문에 추락한다고 상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선다.
하지만 대사형인 백건악은 패배를 입에 담았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들이 해 온 수련이 더 힘들고 고달팠다. 고작 비무대회에서 이렇게 긴장한다면… 어찌 황극린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만약 패배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한다, 그게 백건악이 내린 결론이었다.
* * *
만무지회 제1비무장.
“옥향선녀(玉香仙女)다!”
“허허!”
“정말 아름답긴 하군.”
예선임에도 불구하고 제1비무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녀는 만무지회에 참가한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뿐 아니라 뛰어난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총 세 차례의 비무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본선에 오르기도 전에 그녀에겐 옥향선녀라는 별호가 붙여졌다.
관중의 환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녀의 상대인 나부파(羅浮派)의 제자 적운(赤雲)이 모습을 드러낸다.
“적운 소협이다!”
“나부파의 희망!”
나부파는 과거 구파일련에 속했던 적이 있는 명문거파로, 광동성에 뿌리를 둔 도교 문파였다. 현재는 그리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적운은 광동성 부근에서 나부파의 희망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유명한 후기지수였다.
예선이지만 본선에 필적할 만한 대결.
과연 옥향선녀와 적운 중 누가 승리를 가져갈 것인가? 경쟁자를 의식하듯 참가자들도 많이 비무를 관전하고 있었다.
“무량수불……. 잘 부탁드리오.”
적운이 합장하며 인사했지만, 옥향선녀는 작게 고개를 까닥거릴 뿐이었다.
몇몇 이들이 판돈을 걸고 내기까지 벌이고 있다. 확률은 반반이었다.
“시작!”
심판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다.
나부파의 적운은 옥향선녀의 실력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적당히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며 신형을 옮겨 옥향선녀를 압박한다. 하지만 옥향선녀는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부드럽게 그의 공세를 피해 냈다.
옥향선녀의 움직임은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해 보였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해 내며, 적운의 틈이 보일 때마다 반격했다.
얼핏 보면 백중지세로 서로 공방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옥향선녀의 무위가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몇몇 이들은 옥향선녀가 실력을 감추고 있다는 것까지도 눈치챘다.
한창 비무가 진행되고 있을 때.
한 여인이 한 마리의 표범처럼 거대한 느티나무의 정상 부근까지 올라갔다. 잠시 뒤.
“뭐야, 저거.”
단벌의 여인이 인상을 찌푸린다.
“참가해도 되는 거였어?”
억울한 목소리.
그녀는 충분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만무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출신에 있었다.
“북해빙궁인 것을 드러내지 않는 조건으로 참가를 허락했다.”
“꺄악!”
깜짝 놀란 여인이 중심을 잃고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외관의 사내가 작은 나뭇가지 위에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저런 기예를 부릴 수 있는 건 경공의 경지가 초상비(草上飛)… 아니,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오른 무인뿐이었다.
“극린!”
“오랜만이군.”
황극린이 두야랑에게 인사한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냄새가 나더군.”
소매를 올려 냄새를 맡던 두야랑. 그녀 또한 후각이 매우 발달했지만, 황극린의 코를 따라갈 순 없었다.
“땀은 안 흘렸는데.”
“독.”
“아…….”
독의 냄새를 맡았다?
두야랑의 얼굴이 굳는다. 독공을 익히는 자들이 결국 염원하는 경지는 무형(無形)이다. 독이라는 건 상대에게 들킬수록 그 위력이 반감되는 종류니까.
열심히 수련해서 어느 정도는 격차를 줄이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황극린은 이미 넘볼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와 비견될 수준으로 말이다.
하지만 두야랑은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황극린은 규격 외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두야랑은 황극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영물의 내단을 복용하여 체질을 바꿀 수 있었다. 그녀와 황극린의 만남 사이에 성수신의가 있었다.
그의 후각에 독 냄새가 발각됐다고 해도, 그건 황극린이라서 가능한 것이었다.
“근데 뭐야? 왜 북해빙궁이 만무지회에 참가해?”
“빙백마후가 보낸 모양이더군.”
“아, 그 머리가 돌아 버린 년…….”
두야랑 또한 그 소식을 들었다.
빙백마후가 황극린에게 뭐 혼인을 제안했다나? 제정신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 독수마제도 혀를 찼을 정도였으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 저 여자를 참가하게 허락해 준 거야?”
만무지회는 중원 무림에서 가장 강한 후기지수라 할 수 있는 칠룡오봉의 참가를 제한했다. 그리고 북해빙궁 출신의 저 여자는 북해빙궁의 소궁주였다. 두야랑은 같은 사흑련이었기에 오래전 만나 본 적이 있었다.
만뇌문도들의 실력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녀의 실력은 칠룡오봉에 준한다.
아니, 아마도 칠룡오봉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리라.
“북해빙궁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이다.”
“하기야 들키지 않으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괜찮겠어?”
만무지회에서 저 여자가 우승해 버리면 난감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었다.
“빙궁도들이 타고난 힘은 빙공(氷功)을 사용할 때 힘을 발휘하지. 거기다 북해의 추위가 없는 이곳에서 빙궁도의 힘은 제약될 거다.”
물론 소궁주 한도린은 빙정석을 품고 있다지만, 애초에 빙정석은 빙공을 활용할 때나 효과가 극대화된다. 뭐, 빙궁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한도린은 우승을 자신하는 듯했지만…….
황극린은 문도들을 믿고 있었다.
“음, 만뇌문도들이 정말 강한 모양이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승부가 결정됐다. 옥향선녀 한도린의 승리였다.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온다. 한도린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비무장을 내려갔다.
“그리고 문도들에겐 만무지회가 끝이 아니니까. 저런 상대도 만나 보면 도움이 되겠지.”
만뇌문도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승리할 수 없다.
애초에 우승자는 한 명이다. 만뇌문도들 사이에서도 승패가 갈릴 것이다. 만무지회가 예상보다 규모가 커진 지금에는 황극린은 이번 비무대회가 문도들에게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나도 교연이한테 지고 많이 발전했으니까.”
황극린이 두야랑을 바라본다.
그녀의 기세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황극린이 보기에 지금이라면 그녀는 언교연에게 패배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만히 두야랑의 기세를 가늠하던 황극린이 말한다.
“이제 천기피독신주는 필요 없겠군. 소문주의 자리에 올랐나?”
“엑? 뭐야? 그것까지 안다고?”
두야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황극린을 마주한다.
얘는 진짜 모르는 게 없구나. 두야랑은 오라버니를 꺾고 독수마제에게 인정받아 그의 진전을 이어받았다. 결국 소문주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가자. 너한테 실험할… 보여 줄 게 있다.”
두야랑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 보여 줄… 실험?”
“흑주가 많이 자랐다.”
“흑주? 그게 뭔데?”
“네가 준 인면지주 이름이다.”
두야랑에겐 받은 게 많았다.
인면지주부터 시작하여 만년화리까지. 황극린 또한 천기피독신주라는 신물을 그녀에게 대가로 지불하긴 했지만… 서로 좋은 것을 나누는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만뇌문과 만독문은 동맹 관계로도 발전할 수 있다.
“꽤 괜찮은 독을 만들 수 있더군.”
물론, 황극린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두야랑에겐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