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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202화 (202/316)

202화 진상은 진상으로

단리총운이 흙빛으로 변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서, 설마 알아본 건 아니겠지?’

아직도 그에게 뺨을 맞은 기억이 생생했다.

당시 황극린은 무림에 전혀 이름을 알리지 못한 후기지수에 불과했었다. 그런데도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단리총운과 그를 수행했던 비천대주를 순식간에 제압했었다.

지금 황극린은 강호에서도 알아주는 절대 고수였다.

그가 단리총운의 뺨을 후려치면 이가 몇 개 빠지는 걸로 끝나지는 않는다. 대룡상단의 용살단주 이중산도 황극린에게 까불다가 목숨을 잃었지 않은가? 잔혹한 손속으로 중원에서 유명한 황극린이다. 오죽하면 수라공자라는 별호까지 생겨났었겠는가?

덜덜덜!

겨우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단리총운의 몸이 거칠게 떨리고 있다.

과도한 긴장으로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다행히도 단리총운의 일행은 황극린이 누군지 알아본 것 같았다. 이대로 상황을 끝내야 한다. 넙죽 엎드려서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 단리총운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거, 유명 인사를 여기서 만나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사마광도가 제법 고개를 빳빳이 들고 황극린에게 인사했다.

“저는 대사마세가의 사마광도라고 합니다.”

사마광도의 말에 단리총운의 입이 벌어진다.

지금 저놈이 뭐라고 한 거지?

‘대(大)? 지금 만뇌문의 장로 앞에서… 그딴 말을 지껄인 거냐!’

단리총운이 속으로 절규했다.

꽤 오랫동안 동행하여 단리총운은 사마광도의 자만심 가득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안하무인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며, 사마세가 출신인 것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사마광도의 현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곁에 있다.

‘상관려한테 잘 보이려고!’

사마광도가 상관려를 연모한다는 건 일행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단리총운은 자신이 나서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아니,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이미 결정을 내렸지만, 막상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황극린에게 당했던 공포가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 그, 그, 그만하게! 얼른 사과드리게! 이건 우리가 잘못했어!

사마광도에게 전음을 보내니 사마광도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젓는다.

‘아니, 대체 뭘 하려고!’

단리총운이 황급히 상관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 소협, 부군사님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작은아버지가 무림맹의 부군사직에 올라 계십니다.”

거기다 소협이란다.

하나부터 열까지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어를 선택하고 있었다. 화경에 이른 고수인 황극린과 대등하게 대화하면 상관려가 사마광도를 달리 볼 줄 아는 건가? 단리총운은 사마광도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 미친놈아! 가문의 위세로 비벼 볼 사람이 아니라고……!’

황극린.

그는 용봉지회에 참가하기 전에도 단리세가의 직계인 자신의 뺨을 몇 번이나 후려갈겼다. 그런 사내가 이제 와서 다른 가문의 눈치를 본다? 멍청한 건가? 아니면 여자 앞이라고 정신이 나간 건가?

‘내, 내가 이런 놈과 함께 다녔다니!’

사실 남 탓을 할 순 없는 상황이긴 했다.

단리총운도 사마광도와 성격이 맞아 함께 다녔을 뿐이니까. 다만, 황극린에게 당한 강렬한 기억 덕분에 그나마 현실적으로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황 소협? 왜 대답이 없으십…….”

“명문가의 자제라는 것들이 개념이 없군.”

황극린이 조용히 말한다.

그러자 사마광도를 위시한 일행의 표정이 어둡게 변한다. 현재 만뇌문의 위세가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 사마세가, 위지세가, 단리세가 그리고 황보세가 전체와 싸울 수준은 절대 아닐 거다.

그리고 사마광도는 만뇌문이 현 무림에서 매우 위태로운 위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 가문을 무시하는 발언이군요.”

사마광도가 강하게 나오자 위지세가의 위지봉도 앞으로 나선다.

“위지세가의 위지봉입니다. 황 대협의 이름은 중원을 격동시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리 말씀하시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습… 니… 다?”

황극린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본다.

순식간에 퍼져 나오는 스산하고 저릿한 기운. 은밀한 기운이 반응하기도 전에 다섯 명의 후기지수를 감쌌다.

“컥?”

“큭!”

“헙?”

“악!”

“켁!”

각양각색의 비명을 토하며 모두가 심장을 움켜쥔다.

이게 대체 뭐지?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 일류 고수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무림인으로서 강호를 횡보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출신 가문엔 고수가 즐비했으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 왔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하며 살아가는 무림인들이었다.

화경의 고수라는 게 이런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딴 게 가능할 리가…….

“사마 총관.”

“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황극린은 사마명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그가 정하는 게 곧 답이 될 것인데도, 총관의 생각을 물었다. 사마명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합니다. 황악반점의 사람들도 만뇌문의 식솔이니까요.”

사실 황악반점에서 일하는 어린 소년은 의창현에서 중강현까지 만뇌문을 따라온 도제의 자식이었다. 그렇기에 그들도 만뇌문의 식솔이나 다름없었다.

“맞는 말이로군.”

“커륵… 그, 그마아안…….”

겨우 입을 뗀 사마광도.

그러자 순식간에 심장을 옥죄던 기운이 사라진다.

“헉!”

“하아악!”

다섯 명 모두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황극린을 무슨 괴물 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새겨진 공포였다. 황극린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손짓 한 번만으로 자신들의 심장을 터트릴 수 있었다.

진정한 고수.

중원 절대자의 자리를 논하는 무인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모두가 깨달았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상세히 고하고 사과하도록.”

절대자의 명령.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단리총운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줄을 서기가 싫어서 돈을 주고 빨리 입장하려 했습니다! 친우를 말리지 못한 제 불찰이기도 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다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황극린이 단리총운을 바라본다.

움찔한 단리총운이 몸을 배배 꼬면서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천목의방에서 봤던 놈이군.”

“커, 컥!”

보통 때린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황극린은 단리총운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황극린은 항시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왔었다. 단리세가의 직계를 건드렸으니 후환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여 대비한 적이 있었다.

“이, 인사가 늦었습니다! 단리총운입니다.”

술렁술렁!

열심히 황악반점에서 고기를 뜯던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하지만 단리총운의 머릿속에선 자신의 명성이 땅에 처박히는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까딱 잘못하다간 나머지 이가 죄다 뽑혀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넌 통과.”

“감사합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후다닥 반점을 뛰쳐나가는 단리총운. 그것을 본 사마광도가 어이없다는 듯이 눈길을 준다. 그는 단리총운처럼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황극린이 어떤 괴물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난 잘못한 게 없다. 고작 반점에 일찍 들어가려고 돈을 건네려던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과할 만큼?’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사과할 수가 없었다.

“상관세가의 상관려입니다……. 황악반점을 만뇌문이 운영하는 것을 모르고 결례를 범했어요. 명문가의 자제라면 응당 순서를 지켜야 했지만, 반점의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고 참을 수가 없었답니다. 사죄드립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함을 가득 담아 사과하는 상관려.

그녀의 판단도 빨랐다. 사마광도가 자신을 연모한다는 걸 알고 그걸 잘 이용했던 여인이다. 눈치가 없을 리가 없었다. 단리총운보다 빨리 사과하지 못한 게 한이었다.

긴장한 눈빛으로 황극린의 처분을 기다린다.

“통과.”

“가, 감사해요!”

상관려가 뛰쳐나가자 사마광도가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사, 상관 소저…….’

다음은 황보세가의 황보일패.

그 또한 비슷하게 사과하고 황극린에게 통과할 수 있었다.

위지봉과 사마광도만 남았다.

두 사람은 일행 중에서도 특히 자존심이 강한 이들이었다.

‘여기서 사과하면… 사마세가의 평판이 땅을 길 것이다.’

‘아버지가 이 일을 아시게 되면 나는…….’

사마광도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사마세가의 위신을 살리면서 사과할 수 있을까?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두 사람에게 전음이 들려온다.

- 자네들, 죽고 싶나! 얼른 사과하게. 자존심이 대수인가? 목숨이 달려 있네! 용살단주 이중산 대협이 어떻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가!

단리총운은 빨리 사태가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입구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두 사람에게 전음을 쏟아부었다. 위지봉은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못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착실히 줄을 서겠습니다! 욕심이 과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가도록.”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사마광도의 일행 네 명이 통과했다.

사마광도는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평생지기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얍삽하게 먼저 사과하고 도망쳤다. 연모하던 상관려가 도망칠 때, 그를 바라보던 눈빛이 어찌나 차가웠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결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자존심을 부릴 순 없었다. 다른 가문의 힘까지 빌린다면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사마세가 혼자서 만뇌문과 척을 질 수는 없었다.

‘오늘 일은 잊지 않으마. 부군사께 오늘 일을 보고하여 만뇌문이 다시는 무림맹에 발을 걸치지 못하도록 하마.’

사마광도가 그렇게 자위하며 황극린에게 사과하려 할 때였다.

“황 대협, 죄송…….”

“그만.”

“…합니, 예?”

“네가 우리 만뇌문의 식솔을 협박했지 않나?”

“그, 그게…….”

“사죄는 물론이고 벌도 받아야 한다.”

“예……? 벌이라면 무슨…….”

황극린은 사마명을 바라보았다.

“어떤 벌을 내릴 것인지는 본문의 총관인 사마명이 정할 것이다.”

“……!”

사마광도가 깜짝 놀란다.

사마명이 고작해야 반점의 총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만뇌문의 총관이라고? 대체 언제? 당장 이 사실을 사마세가에 보고해야 한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벌을 내린다고? 그것도 사마명이 정하는 벌을?

그리고 놀란 것은 사마광도뿐만이 아니었다.

“장로님……?”

황극린은 작은 미소를 머금는다.

마치 그의 상황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 사마세가에 당한 게 있지 않은가?

“……!”

황극린은 한 번도 사마세가에 대하여 사마명에게 묻지 않았다. 사마명도 처음 만뇌문에 온 목적과는 달리 그러한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연고도 없는 사마명을 만뇌문이라는 문파에서 총관을 시켜 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애초에 황극린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마세가와 척을 지는 건, 아무리 만뇌문이라도… 아니, 이미 많은 적을 만든 만뇌문이었기에 그건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서 복수의 기회를 준다고?

- 만뇌문의 총관이니 어쭙잖은 벌은 주지 않을 것이라 믿지.

황극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반점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한번 사마광도를 노려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금 죄여 오는 심장 압박에 사마광도가 꺽, 소리를 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마명은 그런 사마광도를 바라본다.

당연히 이번 일로 사마세가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마광도에게 책임을 묻고, 그 피해가 사마세가에 미치도록 할 수는 있었다.

과거.

사마세가가 그녀의 어머니가 만든 표국에 했던 것처럼.

그리고 황악반점과 만뇌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도록.

“너는 만무지회가 끝날 때까지… 황악반점의 점소이로 일해야 한다.”

잠시 이해하지 못했던 사마광도가 두 눈을 부릅뜬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점소이? 대사마세가의 직계보고 고작 반점의 점소이를 하라는 말인가? 그것도 만무지회가 끝날 때까지?

“만약 거절한다면 가문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도록 하겠다.”

차가운 사마명의 목소리.

사실 사마명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황극린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사마세가에 만뇌문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과연 가문에서 어떤 꼴을 당할까? 차라리… 점소이로 잠시 고생하는 게 좋지 않을까? 대충 시간을 보낸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마광도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사마명의 귀에도 들려온다.

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예상이 간다.

하지만 사마명은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사마광도는 점소이 일을 하면서 세상이 어떤 곳인지 깨달을 수도 있으리라. 운이 좋다면 철이 들 수도 있겠지.

‘만무지회 덕분에 무림인의 숫자가 더 늘어나고 있지. 아마 네놈보다 더한 놈들이 반점에 찾아올 거다.’

진상은 진상으로 상대한다.

그리고 만뇌문은 사마세가의 직계를 점소이로 쓰는 문파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사실 명문가에선 그리 좋은 반응을 얻어 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중소문파들은 통쾌함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함부로 만뇌문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줄 수 있겠지.’

여러 의도가 깔린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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