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만무지회
구자광이 늠름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광이 줄줄 흐르는 얼굴. 그는 무림을 정처 없이 떠돌 때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 험상궂은 인상은 그대로였지만, 과거처럼 광기가 엿보이진 않았으며 여유가 넘쳤다. 그 또한 문도들이 성장한 것처럼 확연한 성장을 이루었다.
“주목!”
“주목!”
문도들이 구자광의 말에 힘차게 외친다.
그 뒤에서 흑주가 배를 홀딱 뒤집고 날개를 파닥이고 있다.
“석 달 뒤, 제1회 만무지회(萬武之會)가 개최될 것이다.”
당연히 무림 물을 좀 먹은 제갈수의 반응이 가장 빨랐다.
“비무대회!”
“어? 사제, 비무대회? 혹시 용봉지회 같은 걸 말하는 거야!?”
백온후가 깜짝 놀라 묻는다.
“예, 사형! 맞습니다!”
“헉!”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깜짝 놀라는 백온후.
어느샌가 그의 머리 위로 흑주가 올라타 있다. 왜인지 흑주도 눈을 반짝이며 구자광을 바라본다.
“크으음……!”
아무리 구자광이라도 흑주에게만큼은 불호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영물 주제에 어찌 저리 강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장로님이 키우는 영물이라 다른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석 달이면 너희가 또 다른 벽을 넘을 시간으로 충분하다.”
“…….”
모두가 긴장한 얼굴이다.
“본문에서 비무대회를 개최했는데, 만약 다른 문파에서 우승자가 나오면 어떻게 되겠느냐.”
“……!”
백건악, 비청하, 백온후, 제갈수 그리고…….
- 끼에!
흑주까지.
‘아니, 저놈 진짜 영물 맞아?’
구자광이 말을 이어 나간다.
“다, 당연히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예! 맞습니다!”
“그러니 노력해라! 그리고 또 발전해라! 우리는 천혜의 환경에서 수련하고 있다. 연공실엔 청성산의 정기가 가득하며, 필요한 영약을 언제든 제공해주고, 진법 내에서 육신의 한계까지 몰아붙일 수 있다. 내가 이런 환경에서 수련했다면… 어쩌면 난 지금 화경에 올랐을 수도 있다!”
“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화경은 단순히 환경만으로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 끼이이?
그게 사실이냐 묻는 듯한 흑주의 울음소리를 무시한 구자광이 말을 이어 나간다.
“특훈이다. 우승자에겐 무극단(無極丹)이 수여될 예정이니 무조건 우승해라. 우승자는 여기서도 가장 앞서 나가게 될 것이다.”
무극단!
성수신의가 최근 완성한 영약 중에서도 상급에 속한다. 물론, 화산의 자하신단이나 소림의 대환단엔 미치지 못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결코 나쁜 영약은 아니다.
“참가자는 후기지수로 한정하되 칠룡오봉에 오른 자들은 참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제약을 건 만큼 너희는 무조건 우승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 끼에에!
마치 우승은 자신의 것이라는 듯이 흑주가 백온후의 머리 위에서 펄쩍 뛰고 있다.
구자광이 난감하다는 듯이 뒤를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황극린이 말한다.
“흑주.”
- 끼이이이.
“넌 못 나간다.”
- …….
묘한 침묵.
황극린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거미줄을 사방으로 쏘아 댄다. 그리고 거미줄엔 아주 미약하지만 뇌전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려 주려는 것이다.
- 끼에에에!
영물에게 넌 사람이 아니니 나가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넌 너무 강해서 못 나간다.”
- ……!
갑자기 멈춰서 꼼지락대던 흑주.
녀석의 몸통에 솟아오른 사람의 얼굴이 마치 미소를 머금는 것처럼 표정이 변했다. 구자광은 소름이 끼쳤지만, 헛기침하며 티를 내지 않았다.
‘저놈 계속 탈피하다가 정말 사람으로 변하는 것 아니야? 저런 인면지주가 있다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백온후의 머리 위에서 통통 튀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흑주도 뒤로 빠졌으니 구자광은 문도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비무가 진행되는지 설명했다. 지원자가 많을 경우 예선이 치러질 수도 있지만 문도들은 특혜를 받아 바로 본선으로 진출한다고 했다.
그 말에 문도들이 더욱 긴장했다.
이제껏 만뇌문은 황극린이라는 한 사람 덕분에 이만큼 중원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문도들이 만무지회에서 맥없이 패배한다면? 만뇌문의 명성은 땅에 처박히고 말 것이다.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었다.
문도들은 상품도 상품이지만, 황극린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모인 이들인 만큼.
절대 폐를 끼칠 수 없었다.
“모두 다 이해한 모양이로군. 석 달이나 남았으니 너무 긴장하진 마라.”
“예, 교관님!”
“그래, 그럼… 바로 수련하러 가자꾸나.”
구자광이 싱긋 웃으며 문도들을 이끌고 동굴 중앙에 위치한 연무장으로 향한다. 황극린이 흑주를 보며 말한다.
“네가 가서 도와주어라.”
- 끼이!
흑주는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난 목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속도가 황극린도 살짝 놀랄 정도였다.
‘진짜 흑주가 참가했으면 우승할 전력이긴 하군.’
황극린은 열정이 가득한 문도들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그들이 비무대회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패배를 맛본다면 문도들은 더 성장할 것이다. 황극린은 문도들이 좌절에 빠져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 * *
섬서성 서안에 위치한 한 객잔.
만뇌문이 개최한다는 비무대회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무극단(無極丹)이 거의 대환단에 버금가는 영약이라던데?”
“그게 정말인가?”
“허허, 그걸 믿나? 만뇌문은 이제 막 생긴 신생 문파에 불과하다네. 어찌 그토록 귀한 영약을 비무대회에 상품으로 내걸 수 있겠나?”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만뇌문에서 유명한 것은 황극린뿐이다. 물론 과거 문도들이 다른 문파들과 비무전을 하며 실력을 드러냈던 적이 있었지만, 아주 잠깐뿐이었다. 어느샌가 중원인들의 인식엔 만뇌문의 전력은 뇌불과 황극린이 전부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그들이 과연 제대로 된 영약을 연단할 실력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진 이들도 많았지만, 이미 발 빠른 정보로 만뇌문이 영약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어허, 당신들 잘 모르는구만.”
대화를 구경하고 있던 무림인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허리춤의 검과 얼굴의 흉터를 보아하니 딱 봐도 무림에서 활동하는 무인이었다.
“음, 뭘 모른단 말이오?”
“만뇌문이 만드는 금창약이나 내상약이 얼마나 효력이 좋은지 한 번도 안 써 봤지?”
“형씨는 써 봤단 말이오?”
“당연하지. 나 고후락의 생명을 살린 것도 만뇌약방의 혈금유다.”
웅성웅성.
고후락. 그는 섬서성 일대에서 유명한 낭인으로 이미 절정에 올라섰다고 알려진 무인이었다. 그가 저리 말할 정도라면…….
고후락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 나간다.
“듣자 하니 만뇌문엔 성수신의가 있다고 하더군.”
“성수신의?”
“누구지? 신의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라면…….”
“어, 난 들어 본 적이 있다! 분명 체질을 바꾸는 의원이라고 알려졌던…….”
고후락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 덕분에 진주언가의 공녀 언교연이 작은 체구에도 칠룡의 일인 팽여해보다 더 강한 근력을 가지게 되었다고도 하지. 그런 이가 만든 영약이니 얼마나 뛰어나겠나?”
“오오오오!”
사실 대환단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헛소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만뇌문이 우승 상품으로 내건 무극단이 품질이 낮다는 건 아니다. 평범한 무인은 평생을 가도 구경조차 하지 못할 수준의 상급 영약이었다.
“나이 제한이 걸려 있으니 난 참가하지 못하지만… 만약 제한만 걸리지 않았다면 나 또한 참가했을 거다.”
마치 부럽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는 고후락.
객잔의 모든 시선이 고후락에게 집중되었다. 그가 관심을 탐하는 성정이긴 했지만, 그가 하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렇군. 그럼 이번 만무지회에 대단한 후기지수가 많이 모이겠군.”
“칠룡이나 오봉의 참가를 제한했다고 하니 신선한 얼굴을 많이 보는 건가?”
“재밌겠구나!”
객잔의 반응은 뜨거웠다.
몇몇 이들은 황급히 객잔에서 빠져나가 자신과 관련이 있는 문파로 향했다. 칠룡오봉이 참가하지 못하는 만큼 우승 상품을 차지할 확률이 높아졌다. 아니, 우승 상품이 아니더라도 8강 안에 든다면 꽤 높은 수준의 상품을 수여한다고 했다.
만뇌문이 만무지회를 개최한다고 중원에 퍼트린 지 칠 주야가 되던 날.
중원의 대부분 객잔에선 만무지회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특히 특정 소문과 함께 퍼지면서 파급력이 극대화됐다.
“소림의 방장이 파천뇌권에게 패배했다는 소식 들었나?”
“그게 정말인가?”
“무당산에서 천선대사가 내상을 입은 얼굴로 등장했다고…….”
“허, 그렇군.”
“그리고 만뇌문에서 비무대회를 연다더군.”
“오호, 그럼 그곳에 가면 소문의 파천뇌권을 볼 수 있다는 건가!”
청성산으로 향하는 목적이 비무대회 참가든, 황극린이나 뇌불을 보는 것이든 간에.
만무지회에 대한 소문은 확실하게 전 무림에 각인되었다.
당연히 이 소문들은…….
“뭐어어어어!”
독이 가득한 욕탕 안에서 헤엄치던 여인이 벌떡 일어선다.
“나도 가야지! 오랜만에 극린이랑 한판 붙어야겠어!”
만독문의 두야랑에게도 전해졌으며.
“…보여 드리고 싶어.”
흑주보단 크기가 컸지만,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거미를 쓰다듬고 있는 여인의 귀에도 들어갔으며.
“어디, 나의 대적자가 어떤 수하들을 길렀는지 구경하러 가 볼까.”
천화련의 대공자 또한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만무지회에 참가하지 못하는데도 먼 거리를 달려갈 채비를 마쳤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황극린을 알고 있던 이들은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청성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뇌문이 예상하는 것보다 비무대회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뭐, 규모가 커진 만큼 수준 높은 참가자들이 등장하여 문도들의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기에 오히려 좋았다.
그리고 하얀 장식물로 뒤덮인 거대한 공동.
“만무지회라……. 우리 사위가 재밌는 일을 벌이더구나.”
빙궁주와 약조한 날이 코앞이다.
하지만 황극린은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있었다. 왜인지 북해빙궁주는 화가 나지 않았다. 만뇌문에 뇌불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런 걸까. 그가 빙궁의 도움 없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으리라.
물론, 광증을 가진 그녀의 성격상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부궁주가 말한다.
“제가 소궁주와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직접 말이더냐?”
“예.”
“후후후, 사내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하더니… 적극적이로구나?”
부궁주 한소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빙궁주 빙백마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혼인할 낭군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을 이해한다. 하나, 넌 가지 못한다.”
부궁주가 인상을 찌푸린다.
“왜인가요.”
“몰라서 하는 말이더냐?”
부궁주가 눈을 감는다. 그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빙궁의 모든 것을 이어받아야 그녀는 빙궁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도 빙궁주처럼… 정신을 놓아 버리겠지.’
빙궁주의 자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였지만, 그 자신에겐 고통을 선사하는 자리였다.
빙백마후가 한소연을 그토록 괴롭혔던 것은 그 자리를 가져가라고 말했던 게 아닐까. 부궁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소연은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옳지. 말을 잘 들으니 착하구나.”
빙백마후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궁주를 호출했다.
“소궁주.”
“예.”
“만무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도록 하라.”
“만무지회요?”
“네 낭군이 될 사람이 개최한 비무대회란다.”
빙백마후의 말에 소궁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빙백마후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그 더운 곳에서 힘을 발휘하긴 힘들겠지만, 이걸 가져가면 도움이 될 거다.”
빙정석(氷晶石).
북해의 보물 중 하나로 소유자에게 살을 에는 추위를 선사하는 물건이다. 사실 북해빙궁도가 아니고서야 거의 쓸모가 없는 신물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궁주도 같이 가는 건가요?”
“아니, 부궁주는 가지 못한다.”
그 말에 소궁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북해에서 사천성까지는 매우 멀다.
빙궁주가 미친 경공술로 금방 다녀올 수 있었지만, 소궁주는 쉬지 않고 달려야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소궁주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 일어섰다.
부궁주 한소연이 떠나가는 소궁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