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멈출 수 없다
“그 천선대사마저 꺾었다는 말인가…….”
“예, 장문인.”
모용가아는 축 처진 어깨를 한 채로 말했다.
분명 용봉지회에서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황극린과의 격차는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 차이였다. 모용가아는 결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수련해 왔다. 그런데도 차이는 더 벌어졌다. 이제는 대체 어느 정도로 벌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현실을 부정하게 된다.
또한, 자학하게 된다.
‘대체 난 이때까지 뭘 한 거지?’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던 시간은 사실 별것 아니었던 걸까. 재능의 차이라는 게 이토록 극명하게 나는 걸까. 10년, 20년이 걸려 수련한다면 그와 동등한 선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 모용가아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피나는 노력으로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는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있겠지.’
그리고 그땐.
정말 천외천(天外天)의 경지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
태을종객은 그런 모용가아의 심리를 읽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그 또한 청성 제일의 기재라며 사문 장로들의 이쁨을 받으며 자라 왔다. 청성산 안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무림이 발아래 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림에 나와 수많은 무인과 마주하며 그것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재능의 차이를 통감하고 극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
“경쟁자는 밖에서 찾지 말게.”
“예……?”
“나 자신이 경쟁자라네. 좌절을 주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네의 마음이라네.”
“…….”
비슷한 말을 많이 들어 왔던 모용가아였다.
하나, 상황의 특별함과 청성파 장문인의 진심 어린 표정에 모용가아는 무언가를 느꼈다. 지금 청성파 장문인 태을종객은 경험담을 말해 주는 것이다.
모용가아는 수많은 무인의 이름을 떠올렸다.
태을종객 또한 무인. 최고의 위치에 올라서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방금 조천궁의 입구를 지나친 화염신황만 보더라도 태을종객과의 격차는 꽤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구파의 장문인인데도 말이다.
왜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멈출 순 없지 않겠는가? 거기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무인의 비무를 보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라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게나.”
“예, 조언 감사드립니다, 장문인.”
태을종객의 한마디 말로 모두 극복할 수 있다면 거짓말이다. 모용가아는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럼 들어가지. 자네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네.”
“아… 예, 장문인.”
태을종객이 앞서 들어간다.
모용가아가 조용히 그의 뒤를 뒤따르고 있을 때.
“모용 소협.”
누군가 모용가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계 공자.”
그러고 보니 또 한 명 더 있었다. 모용가아에게 좌절을 선사했던 사람이 말이다. 천화련의 대공자 계빈. 그 또한 이번 회동에 참석했다. 그렇다는 말은… 역시 천화련주도 무당산에 있다는 말인가.
천선대사와 황극린의 전투를 보고 나니 드높은 경지에 오른 무인들에게 절로 경외감이 들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누굴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파천뇌권 말입니다.”
“아, 그는… 화염신황 대협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갔습니다.”
“무당산엔 오르지 않았다는 말이로군요?”
“예…….”
“하하,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아쉬움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하는 계빈.
모용가아는 계빈과 두어 번 만나 보았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건 경우는 처음이었다. 거기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그보다 계빈과 황극린이 접점이 있다는 말인가?
모용가아가 눈을 가늘게 뜬다.
“황 장로와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예, 그와의 만남은 천운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
끼리끼리 어울린단 말인가.
사실 모용가아도 어딜 가서 꿀리진 않는다. 출신 배경도 그렇고, 무공도 후기지수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어떻게 싸웠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모용가아가 뒤를 돌아본다.
계빈의 뒤로 다른 문파들의 후기지수들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계빈은 후기지수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선망의 시선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모용가아는 왠지 말해 주기가 싫었다. 찌질하다고 욕할 수도 있으리라. 아버지는 천화련과 연을 맺을 기회를 차 버렸다며 꾸중하실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싫군.’
계빈은 어쩌면 두 사람의 전투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듣는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는 분명히 그러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의 전투에서 배울 것은 무수히 많았다. 왜인지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전투가 거의 끝날 때 도착하여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천화련의 대공자 계빈이 미소를 머금는다.
모용가아는 왜인지 섬뜩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분명히 눈과 입은 웃고 있었지만,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런 음산함은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시죠.”
“예…….”
모용가아는 두 주먹을 쥔 채로 조천궁 안으로 들어갔다.
* * *
황극린은 멀리 보이는 무당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서 중원과 맞서 싸울 순 없다.”
과거 황극린은 뇌불에게 고금제일의 고수가 있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뇌불은 당시에 혼자서 중원과 맞서 싸울 순 없다고 단언했었다. 천선대사와 싸우고, 그 직후 나타난 화산의 장문인을 보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당연한 말이었다.
내공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육신은 지치는 법이었으니까. 천선대사와의 싸움에서 황극린은 꽤 많은 내력을 소모했다. 그리고 천선대사는 마지막 한 수를 남겨 두고 있었다. 비장의 한 수. 천선대사는 화염신황의 등장에 그걸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해볼 만하다.”
황극린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전생에선 조금만 더 빨리 무공을 익혔다면 특급 살수에 오를 수 있었을 거라고 한탄의 감정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혈고독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황극린은 이미 전생에서 20년 가까이 무공을 익혔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또한, 미래의 지식을 이용하여 여러 이득을 얻었다. 특히 흑살문의 최상급 살수는 구경도 하지 못할 영약을 몇 번이나 취할 수 있었다.
거기다 익힌 무공도 달라졌다.
뇌불의 혈풍뇌전신공. 처음엔 그것만으로 완벽한 무공이라 여겼지만, 지금은 뇌불과 함께 그것을 더 발전시켰다.
마지막으로.
‘내 육신은 전생과 다르다.’
영약을 많이 취했기 때문일까.
마지막으로 취한 인형혈삼 덕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혈풍뇌전신공이라는 혈맥을 활용하는 무공을 익혔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극린은 고금제일이라는 단어에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다. 거기다 오늘 마주했던 천선대사와의 전투도 그에겐 깨달음을 주었다. 화산의 장문인과도 겨루어 보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마 위험했을 거다.
그는 황극린을 보고도 그냥 보내 주었다.
왜인지 묘한 눈빛으로 황극린을 바라보았던 것 같았다.
“돌아가야겠군.”
황극린은 어느 정도 가뿐한 마음으로 무당산을 등지고 만뇌문으로 돌아갔다.
주관적인 게 아니라 객관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아도 황극린은 강해졌다. 어쩌면 흑살문주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구파일련의 장문인들과 육대세가의 가주들의 회동도 한 달이 지났다.
“장로님, 드디어 10성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제갈세가의 제갈수.
마지막에 만뇌문에 합류했지만, 그는 그만큼 더 열심히 수련했다. 용살천각(龍殺天脚). 용을 죽인다는 각법을 익힌 제갈수는 황극린이 가졌던 전생의 기억처럼 각법에는 특출 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황극린은 직접 제갈수와 비무하여 그의 실력을 확인했다.
“괜찮구나.”
“하핫……!”
제갈수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했다. 황극린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몇 번 제갈수의 무공을 받아 준 적이 있었지만, 못할 때는 엄하게 질책했다. 그런데 황극린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오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갈수에겐 특급 칭찬이나 다름없었다.
황극린은 잠시 제갈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네게 알려 줄 무공이 있다.”
“호, 혹시… 저한테만 말입니까?”
“그래.”
“오오오오오!”
그게 왜 중요한진 모르겠지만 황극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른 문도들은 뇌정신공을 익히고 있었다. 제갈수는 제갈세가의 심법과 무공을 익혔기에 그것을 발전하는 게 낫다고 여겨 다른 무공을 알려 주진 않았다. 구자광은 꽤 좋은 교관이었으며, 화경에 이른 뇌불이나 황극린이 가끔 봐주었기에 제갈수는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아무리 제갈세가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한계가 보인다.
용살천각도 완벽한 무공은 아니었다.
“금강공(金剛功).”
“금! 강! 공!”
이름을 잊어 먹지 않기 위해 제갈수가 결연한 얼굴로 외친다.
“육신을 금강불괴처럼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무공이다.”
“그, 금강불괴요?”
“그래.”
황극린은 천선대사와의 싸움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물론, 금강공이라는 건 소림의 금강불괴체신공과 같이 육신 전체를 단단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육신 전체를 금강불괴로 만든다는 목표는 몹시 효율이 떨어진다. 그 이유가 뭔지 아느냐?”
“음… 눈동자 같은 곳은… 근육처럼 단련할 수 없으니까요?”
“정답이다.”
“오오! 내, 내가 정답을……!?”
“그러니 넌 금강공의 묘리를 다리에만 적용할 것이다.”
“다리에만…….”
황극린의 모든 가르침을 기억하겠다는 듯 귀를 쫑긋한다.
“네 다리는 검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질 수 있을 거다. 물론,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불가능할 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로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계속 갈고닦겠습니다!”
“좋다.”
황극린은 제갈수에게 구결을 알려 주었다.
“성수신의께 가서 디리에 침을 놓아 달라고 해라.”
“예!”
황극린의 지시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제갈수가 떠나간다.
그가 나가자 뒤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 막 퍼 주는 것 아니냐?”
뇌불.
말은 그렇게 했지만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애초에 금강공을 만드는 데에 대반야금강공을 개조한 것이 뇌불이었다. 그 또한 구결을 개조할 때 제갈수가 익힐 것을 알고 그를 위해 특화하여 구결을 만들었다.
그는 혈색도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온몸에 힘이 넘치고 있다. 어쩌면 전성기의 힘을 완전히 되찾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물론, 과거와 전투 방식은 달라졌을 테지만 말이다.
“제갈수는 날 믿고 가문을 나와 여기까지 왔소.”
“보통 문파가 이렇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소.”
문파는 계급과 직책 그리고 출신에 따라서 배우고 익히는 게 달라진다.
하지만 황극린은 문도 모두에게 최선의 무공을 익힐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문파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천하제일 문파라 불리고 있는 천화련에서도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존재하고, 천화련에서 익힐 수 있는 다른 무공은 직계비전을 절대 뛰어넘지 못한다.
“크크, 저놈들이 언젠가 무림에 나서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구나. 그냥 문도들이 천하제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무공을 익히고 있고, 심지어는 대장장이와 그 도제들도 무공을 익힌 문파가 어딨겠느냐?”
뇌불의 목소리엔 흐뭇함과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래서 말인데, 비무대회를 여는 게 어떻겠소?”
“호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구나.”
비무대회.
보통 규모가 작은 문파에서 비무대회를 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문도나 후계자의 실력을 선보이기 위해서. 인맥을 쌓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문도들의 경험을 쌓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문파는 상품을 내걸고 비무대회를 연다.
황극린의 목적은 그 모두였다.
만뇌문도들이 언제까지 동굴에서 수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만의 인연도 만들어야 하고, 실력을 무림에 선보이기도 해야 한다.
만뇌문은 황극린만을 위한 문파도 아니었으며, 문도들의 발전은 곧 황극린의 발전이나 다름없었다.
뇌불도 황극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마침 약쟁이 놈이 영약도 완성했다고 하니 그걸 상품으로 내걸면 되겠구나.”
요즈음 무림에서 만뇌문을 노리는 이들은 많았지만, 개가 짖는다고 하여 마차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들은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그럼 개방을 통해 비무대회를 개최한다고 알리도록 하겠소.”
“그래, 기왕이면 구파일련이랑 육대세가 놈들에게도 초대장을 보내거라.”
뇌불은 자신만만했다.
진법 내에서 수련한 문도들의 실력은 뇌불과 함께 일취월장했다. 그들의 재능은 나쁘지 않았고,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 하나하나가 대문파의 진산절기와 동등한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