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여래
무당산에서의 회동.
혈마교와 황실에서 만든 용성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물론, 구파일련의 장문인들이나 육대세가의 가주들은 각자의 안건을 또 가지고 있으리라. 이렇게 정파의 축을 담당하는 수장들이 모이는 건 흔치 않았으니까.
천선대사가 준비한 안건은 만뇌문이었다.
황실은 물론이고 사파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파. 용성이라는 거대 세력에 편승하여 위험을 벗어났지만, 소림사는 만뇌문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제아무리 황실이 그들을 보호해 준다고 하더라도.
‘배교.’
전전대의 소림사 방장 현공선사(賢恭禪師)는 배교의 출현을 경고했었다.
천선대사도 그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현 무림에서 배교의 악행은 거의 잊힌 듯 보였지만, 그들의 위험한 사상은 경계해야 한다. 여러 갈래로 나뉘긴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혼(魂)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다루려고 한다.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강시.
인간의 진원진기를 흡수하는 무공 흡성대법.
상대의 육신을 빼앗는 이혼대법(移魂大法).
강시와 흡성대법은 아직도 가끔 무림에서 튀어나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소림은 그때마다 배교의 잔당들을 처리해 왔었다. 200년 가까이 활동하지 않던 배교는 최근 꼬리와 흔적을 드러냈다. 음지에서 얼마나 힘을 쌓았을지 예상할 수 없었다.
만뇌문은 배교와 결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아니, 소림의 방장 천선대사는 확신하고 있었다.
거기다 배교의 흔적은 중원 곳곳에서도 발견되고 있었다. 첫째로 화산파가 개최했던 용봉지회에서 발견된 생기가 빨린 시체. 마공의 일종이라 여겼으나 소림사의 방장은 직접 그 시신을 확인하여 흡성대법의 흔적을 발견했다.
또한, 최근 들어 그러한 시체가 발견됐다는 소문도 자주 들렸다.
황극린.
그는 불혹(不惑)의 나이도 아니고 이립(而立)의 나이도 아니었다. 방장 자신이 황극린의 나이일 때는 촉망받는 후기지수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의 나이대에서 천하칠대고수 수준에 올랐던 이는 방장이 알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과연 정상일까.
세상은 이치를 가지고 있다. 마땅한 법칙이 있었다.
그의 성장은 몹시 이질적인 종류였으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과연 그가 그토록 빨리 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황극린 그자 또한 화산파의 용봉지회에 참석했었지.’
과연 28회 용봉지회에서 생기가 빨려 죽은 사람이 나온 것은 우연일까.
황극린이 그 이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룬 것을 짐작해 보건대.
‘배교도.’
천선대사는 뇌불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유령’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그런데 배교가 그 배후에 있었다면?
뇌불이 살아 있는 이유가 배교가 만든 역천의 술법의 결과물이라면? 황극린의 배후에 배교가 있다면? 그들은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계속 성장할 것이다.
언젠가 혈마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위험을 몰고, 중원을 피바다로 물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천선대사는 황극린과 만뇌문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번 회동에서 그 의지를 드러내리라 각오했다.
그러던 중.
황극린과의 만남은 운명이라 할 수 있었다.
황실과 척을 질 수도 있겠지만… 방장은 황극린이라는 악의 주체를 멸한다면 강호의 후환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 * *
“여래옥불장(如來玉佛掌).”
소림의 방장은 무공명을 왼다.
대개 무공이란 최대한 은밀하고 빠르게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소림의 경우에는 스스로를 단련하고 종국에는 번뇌를 잊어 부처가 되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소림의 무공은 조금 다르다.
인간의 언(言)에는 힘이 담겨 있다. 의지의 표명이라고도 할까. 싸우기 전에 기합성을 내지르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 할 수 있었다.
천선대사의 손바닥이 펼쳐진다.
동시에.
“……!”
황극린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손바닥의 형체가 스쳐 갔다. 가공할 속도였다. 마치 소리의 속도처럼 빠르게 나아간 여래옥불장의 기운은 저 멀이 우뚝 선 소나무를 거칠게 찢어 버렸다. 그 참담함에 천선대사가 불호를 외면서도 황극린의 위치를 찾았다.
콰지직.
천선대사의 후방에서 뇌전이 공간을 찢는 듯한 소음이 들린다.
“여래합장(如來合掌).”
합장을 한 천선대사.
그의 몸 위로 금빛의 광채가 크게 일렁이다가 어느 순간 기괴한 문양을 그리더니 방진을 형성했다. 호신강기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높은 경지의 무공이었다.
쿠르으으-
황극린이 내뿜은 뇌전이 천선대사의 여래합장을 뚫어 내지 못하고, 주변으로 마구 튀었다. 천선대사는 깊은 눈동자로 황극린을 의식한다.
“시주께선 잘못을 되돌릴 길이 있소이다.”
다짜고짜 장법을 펼쳐 황극린을 공격한 주제에 잘못을 되돌릴 길이 있다니?
황극린은 황당했지만, 대답해 주었다.
“내가 잘못을 했소?”
“그 잘못은 내가 차차 알려 주겠소이다.”
눈을 감은 천선대사가 손뼉을 두 번 쳤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기파가 황극린의 육신을 묶는다.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외다.”
눈을 뜬 천선대사가 손바닥을 펼친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황 시주께선 더 강해졌을 거외다.”
번쩍이는 광채와 함께 금빛이 휘몰아친다. 고아하면서도 웅장한 기운이 천선대사의 손바닥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작게 읊조린 듯한 목소리였지만, 거대한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모든 것을 부숴 버릴 수 있는 금강(金剛). 응축되고 또 응축된 기운이 포박된 황극린을 강타한다.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막아 낼 수 없다. 소림사가 만들어 낸 최강의 무공 중 하나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사방으로 피어난 먼지.
그 속에서 황극린을 찾는다. 이것으로 끝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제부터 황 시주의 잘못이 무엇인지 천천히 알려 주도…….”
그때였다.
천선대사의 눈썹이 꿈틀한 것은.
‘이건……?’
과거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천선대사는 뇌불이 소림에서 머물렀던 시절 혈풍뇌전신공을 본 적이 있다. 소림에서 과거의 산물이 아닌 새로운 절기가 태어날 것이라 기뻐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공의 위험성을 깨달았을 땐, 뇌불은 이미 소림사의 그늘에서 벗어났었다.
혈맥에 흐르는 피의 속도를 극대화하여 감각과 육신의 반응을 재조정한다.
중단전을 활용한 그 무공이 펼쳐지면, 뇌불은 천선대사조차도 감지하지 못할 수준으로 빨라진다.
그리고.
천선대사는 손바닥에 느껴졌던 감각이 황극린을 강타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역시 중원은 넓군.”
황극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합성을 터트릴 시간도 없었다.
반응하지 못하면 당한다.
천선대사의 신형이 움직인다. 이제껏 제자리에서 황극을 상대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쿠릉!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천둥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천선대사의 눈앞이 번쩍였다.
“…….”
뇌룡의 형상.
거대한 기운이 한곳에 집약되면 의지가 형상화되곤 한다. 환(環)의 묘리를 담아 고리를 형성하고, 그 고리가 연결되어 실체를 이룬다. 거대한 뇌룡은 천선대사의 몸을 집어삼키고, 그의 한쪽 무릎을 꿇렸다.
콰지직! 콰지지직!
단순히 뇌전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떼어 내지 못한 수많은 뇌전의 줄기들이 살아 있는 듯이 움직여 여래합장으로 만들어 낸 반탄지기를 찢어 버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천선대사가 천천히 일어섰다.
황극린은 무심하게 말한다.
“역시 이 정도로는 팔 하나도 받아 낼 수 없었구려.”
천선대사로서는 황당한 말이었다.
소림의 방장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물론, 지금도 그를 괴롭히는 뇌전을 보면 자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다시 가겠소. 이번엔 긴장해야 할 것이오.”
방장 또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 그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끈다면…….’
황극린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천선대사의 육신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면에 담긴 거대한 기운이 서로 충돌하며 힘을 증폭시킨다. 온몸이 찬란한 금빛으로 물든 천선대사. 소림사에서 모든 고승이 지혜를 끌어모아 만든 금강불괴체신공(金剛不壞體神功). 물론, 방장은 그것을 대성하지 못했다. 금강불괴체신공을 대성하기 위해선 특정한 체질을 타고나야 했다. 소림의 대제자 천덕처럼.
이곳에서 황극린만 처단할 수 있다면.
천덕은 소림사의 미래가 될 것이다.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황금빛의 손바닥과 뇌룡을 품은 황극린의 권격이 부딪친다.
쿠웅-
충격음이 퍼지고.
“끄윽…….”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간하기 힘든 신음이 들려왔다.
하늘과 맞닿은 고수의 비무를 지켜보던 한 사내는 넋을 잃은 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대, 대체 누가 이긴…….”
모용세가의 모용가아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공간에서 불꽃이 튀었다.
* * *
“천선대사……?”
내상을 입은 것인지 파리한 안색을 한 구릿빛 피부의 고승. 그가 무당산을 올랐다. 절뚝이는 두 다리를 보아하니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천선대사였지만, 기어코 회동이 개최되는 조천궁까지 올라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때마침 조천궁에서 산보를 만끽하던 청성의 장문인 태을종객(太乙從客).
감히 누가 소림의 방장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무당산에 오기 전에 합공이라도 받은 건가?
천선대사가 부상을 입은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그가 무당산으로 올라온 것을 보면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역시 승리했군.’
천선대사는 강호에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 힘은 천하칠대고수에 필적한다.
아니, 그 이상이 분명하리라.
“대체 어떤 놈이 감히 소림의 방장을 공격한 것입니까? 이건 구파일련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태을종객이 분개하여 소리치자.
천선대사가 눈을 감는다. 그것이 육신의 고통 때문이라 생각한 태을종객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천선대사가 그걸 거절한 후 조천궁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때마침 뒤에서 누군가 등장한다.
붉은 장포를 걸치고, 뒷짐을 진 거한 사내. 그의 등에는 사람이 쓸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검이 매여 있었다. 화열신검(火熱神劍). 화산파의 장문인 화염신황(火炎神皇)의 상징과도 같은 보검이었다. 붉게 그슬린 듯한 눈썹을 꿈틀거리며 화염신황이 말한다.
“쯔쯧, 자존심이 상하여 부축을 받지 않는다고 하네.”
“화염신황? 장문인께선 누가 천선대사님을 저렇게 만든 건지 보신 겁니까?”
같은 장문인이었지만, 화염신황과 태을종객의 배분 차이는 꽤 났다.
특히 두 사람이 활동하던 시절엔 청성의 태을종객은 화염신황의 뒤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이 나도는 화염신황이었으니 후기지수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건 당연지사.
과거 천하의 대마두로 불린 뇌불도 용봉지회 준결승에서 화염신황에게 패배했었다.
분개한 태을종객을 보며 화염신황이 혀를 찬다.
“쯔쯔.”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자네가 받아 준 그 문파의 장로와 싸운 거네.”
“어… 지금…….”
“황극린, 참으로 기이한 기운을 품고 있더군.”
“……!”
태을종객이 입을 벌린다.
용성에 들어가더니 기어코 일을 벌인 건가. 이렇게 되면 그들을 청성산에 받아 준 청성파의 입지가… 아니,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천선대사가 이렇게 되었고 화염신황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설마……?’
태을종객은 황극린이 마음에 들었다.
몇몇 이들은 만뇌문이 배교와 결탁했다며 욕하고 있었지만, 청성파는 그걸 믿지 않았다. 다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만뇌문을 비호하지 않았을 뿐. 그것은 황극린과 대화를 통하여 이미 합의를 본 내용이었다.
“황 장로… 그는 정녕 죽음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감정이 요동친다.
막상 죽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아릿하게 저리며 눈이 뜨거워진다. 그런 태을종객을 바라보던 화염신황은 사뿐히 그를 지나쳐 지나갔다. 천선대사가 쓰러지나 안 쓰러지나 지켜보다가 이제 조천궁에 도착했으니 회담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태을종객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천선대사가 이리 살아 있고, 부상까지 당한 것을 보면 끝까지 싸웠다는 건데… 결말은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그때, 태을종객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
“파천뇌권이 승리했습니다.”
“응? 자네는?”
“청성파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저는 모용세가의 모용가아입니다.”
“자네는 어찌 황 장로가 승리했는지 알고 있는가?”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에 닿은 두 무인의 전투를 지켜봤습니다.”
모용가아.
회동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영광으로 알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억지로 무당산으로 왔었다. 평소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눈동자는 퀭하게 변해 있었고, 눈동자에 검은 그늘이 져 있었다.
“아니… 한 사람은 하늘의 구름을 뚫고 올라갔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모용가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