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속행
혈마교의 경고는 북해빙궁의 궁주와 더 엮이지 말라는 것.
그게 아니라면 혈마교주는 만뇌문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실 이 부분은 만뇌문으로서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었다. 황극린은 북해빙궁주와 인연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호의를 가지고 황극린을 대하고 있긴 하지만 그 태도는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뭘 그리 생각하시오?”
뇌불은 황극린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
“빙궁주를 만나 보니 어떻더냐?”
“강했소, 지금의 나조차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묘하게 어긋난 성격인 것 같더군.”
몇 번 대화를 해 보지 않았지만, 빙궁주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난 ‘저주’이자 ‘축복’이 어느 정도로 그들을 괴롭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황극린이 생각하기에도 사내로 태어난 아이가 모두 죽어 버리는 북해에서 우두머리가 된다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 의문이긴 했다.
빙궁주는 그러한 저주에 나름의 대책을 세웠을 테지만, 평범하게는 살아갈 수 없다.
빙궁에서 태어나는 모두가 막대한 음기를 타고난다. 무림인으로선 축복이었지만 인간으로선 아니다.
“그녀와 혈마교주는 내가 맡겠다.”
뇌불의 선언은 갑작스러운 게 아니다.
이미 그렇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며, 뇌불은 진법 내에서 수련하며 여러 차례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육신은 노쇠했기에 그가 발전할 방법은 혈풍뇌전신공을 발전시키는 방법뿐이다.
환골탈태 중 하나인 반로환동(返老還童)에 이르지 않고서는 전성기의 무력을 되찾을 방법은 그것뿐이다. 다행히도 화경에 이른 고수의 육신은 아주 조금씩 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만뇌문이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자금으로 영약을 끌어모았고, 뇌불이 영약으로 몸을 조금씩 회복하는 중이었다.
성수신의는 뇌불의 육신을 통해서도 체질 개선의 연구를 했던 적이 있다.
그렇기에 그는 뇌불의 몸에 잘 듣는 영약을 제조할 수 있었다.
“도울 게 있으면 말하시오.”
그 말이 어찌나 든든했던지 뇌불은 부담감이 확 덜어졌다.
“크크, 그래. 그럼 난 수련하러 가 보도록 하마.”
요즈음 만뇌문도들의 수련 장소는 진법 내부로 정해져 있었다.
세 개의 태양이 떠오른 진법 내부는 최고의 수련 장소라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적응하고 나온다면 바깥에서는 더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가자! 이놈들아!”
“예! 문주님!”
심지어는 총관 사마명도 뇌불을 따른다.
처음엔 음침한 눈빛으로 만뇌문을 염탐하려는 자세를 보였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만뇌문에 녹아들었으며, 뇌불이 도착한 후로는 완전히 만뇌문에 녹아들었다. 무공에 재능은 없다지만 그는 수련 시간에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 끼이익!
날개를 파닥거리는 흑주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본능에 따라서 사냥하는 맹수는 애초에 훈련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흑주는 왜인지 수련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 같았다. 녀석은 매번 만뇌문도들이 진법 내에서 수련하는 시간에 따라나섰다.
열성적인 문도들의 모습을 보며 황극린이 몸을 돌렸다.
방금 무문의 교특범이 서신을 보내왔다고 사마명이 전달해 주고 갔었다. 확인해 보아야 한다.
* * *
- 제 개인적인 느낌을 서신에다 적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왜인지 음울함이 깃들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 첫 수색 결과 이곳에는 수상할 정도로 벌레나 작은 짐승들의 수가 적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 회계산의 약초들은 약효가 평균을 밑돌아 약초꾼이 거의 없다는 정보까지 확인했습니다.
“…….”
교특범의 정보 보고는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들었다.
황극린의 의심했던 인형혈삼이라는 거대한 기운을 품은 영약이 주변의 환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회계산은 예상보다 더 정기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인형혈삼이라는 영약이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군.”
주변의 힘을 빨아들여 성장하는 영약.
지맥의 기운을 모두 흡수했다면, 산짐승과 벌레의 수가 적은 것이 이해가 된다. 거기다 평범한 약초들까지 약효가 어그러질 정도라?
가만히 교특범의 서신을 읽던 황극린은 사마명이 놓고 나간 무림 동태 보고서를 펼쳐 보았다.
‘소림사.’
수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혈마교의 정예가 움직였기에 정파 무림이 만뇌문을 견제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아예 반응이 없다는 건 주의해 보아야 할 점이다. 폭풍 전야라는 말이 있듯, 이러한 침묵을 경계해야 한다.
황극린은 보고서를 읽고 나가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지 확인해 나갔다.
‘구파일련의 장문인과 육대세가 가주의 회동이라.’
보름 뒤, 무당산에서 정파 무림의 기둥들이 대거 참석하는 회동이 열린다고 한다.
보통 이러한 회동이 있을 때면 몇 달 전부터 알려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꽤 비밀 유지에 공을 들인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무슨 대화가 오갈지가 중요하다.
혈마교의 정예가 움직였다는 소문이 무림에 파다하게 퍼진 지금은 만뇌문에 신경 쓸 여력은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소림사가 아닌 곳이라면 방장과 직접 마주할 수도 있을 거다. 대화로 풀 수 있다면… 수고는 감수할 필요는 있겠지.’
가만히 그들이 행동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좋다.
황극린은 만뇌문에 남은 이들의 전력을 생각해 본다.
뇌불을 비롯한 문도들의 실력은 황극린처럼은 아니었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각성하고 새로운 힘을 얻은 흑주까지 있다. 흑주는 특히 진법에서 운신의 폭이 자유로웠다.
황극린이 떠날 채비를 했다.
결단을 내렸으면 바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
* * *
“어머, 공자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귀공자 한 명이 아리따운 여인이 내미는 고기와 채소볶음을 입에 넣는다. 백의를 갖춰 입은 젊은 사내는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것을 보면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 이들은 그의 출신을 알아보고 흘끔흘끔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이것도…….”
“아니, 이젠 괜찮소. 소저들께서 먹여 주시니 벌써 배가 부르구려. 이제 내가 먹여 주겠소.”
“어쩜 그리 말씀도 우아하게 하세요?”
“정말 모용 공자님은…….”
모용세가의 대공자 모용가아.
그는 용봉지회 때와 마찬가지로 여인을 끼고 다니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휘황찬란한 명문가라는 배경을 뒤에 업으니 그의 곁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도 아직 정착하지 못하여 가문의 어르신들이 훈계를 내리기도 했지만, 모용가아는 크게 걱정이 없었다.
가진 자의 여유라고 할까.
그는 언제든 마음에 드는 여인과 혼인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후우.’
하지만 모용가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는 가문에서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고, 가끔 친한 여인들과 만남을 가지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현 무림의 상황은 명문가의 대공자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무당산에서 개최 예정인 회동.
그곳에서 대공자로서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 장문인과 가주만의 회동이지만 무당산에 찾아오는 이들은 그들이 끝이 아니리라. 인맥을 만드는 것도 대공자의 임무였고, 그곳에서 혼인할 여인을 찾으라는 어머니의 지엄한 명이 있었다.
모용세가에서 이곳까지 함께해 준 여인들과도 곧 헤어져야 한다.
물론, 떠나기 전부터 여인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용가아와 함께했다.
‘그래도 무당산 부근까지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이미 장문인들과 가주들은 무당산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으리라. 정식 회동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들끼리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구파일련에서도, 육대세가에서도 파벌은 나뉘는 법이니까.
수련을 핑계로 요동성에서 늦게 출발했으니 아버지와 만날 확률은 낮았다. 물론 이미 모용세가의 가주는 모용가아가 여인을 끼고 출발했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만, 직접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
“슬슬 가 봅시다.”
“네에, 공자님.”
무당산(武當山).
십언(十堰)현에서 출발한 모용가아. 최대한 걸음을 늦추어 무당산에 도착하는 시간을 조절한다. 무당산에 가까워질수록 어찌나 바람이 부드럽고 햇볕이 따스한지……. 모용가아는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후기지수들끼리의 모임이었다면 이렇게 불편하진 않을 것이다.
용봉지회와 같은 비무대회였다면 그의 실력을 한껏 뽐낼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고작해야 칠룡에 오른 이가 어찌 구파일련의 장문인들과 육대세가의 가주들 앞에서 힘자랑을 할 수 있겠는가?
저 멀리 눈으로만 봐도 그 정기에 압도되는 위용의 무당산이 보인다.
“이제 슬슬 헤어져야 할 것 같소. 십언현의 목우객잔에 머물고 있으면 찾아가도록… 응?”
“왜 그러세요, 공자님?”
“저희랑 헤어지기 싫으시죠?”
여인들도 모용가아와 헤어진다는 생각에 슬픈 얼굴을 했다.
하지만 모용가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기운은 뭐지?’
모용가아는 여색을 밝히는 무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실력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모용가아는 후기지수 중에서 질투의 대상이었다. 모용세가에서 모용가아의 일탈을 묵인하는 것도 실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었다.
“목우객잔에서 봅시다.”
“공자님!”
모용가아가 본능적으로 거대한 기운이 일렁거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저 사내는…….’
잊고 있었던 기억.
아니,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사내의 얼굴이 보인다.
‘황극린!’
외관은 거의 변한 게 없다.
부스스한 머리를 늘어뜨려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건 변함이 없었다. 소문으로는 대단히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걸 왜 숨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황극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하얀 피부를 가진 대머리 사내. 복색만 봐도 소림사의 고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도 말이다.
‘설마 소림사의 방장……?’
소림과 만뇌문의 관계는 이미 무림에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두 사람이 대치하는 분위기를 보아서도 당장 부딪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모용가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 * *
운이 좋았다.
황극린은 회동이 끝날 때 소림의 방장을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무당산에 올라 다른 장문인들이나 육대세가의 가주들도 한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 만약 무당산에서 만뇌문을 빠르게 처리해 버리자는 결정이 난다면?
아무리 황극린이라도 그들의 합공을 감당해 낼 수는 없다.
물론, 맞서 싸우지 않고 도주만 선택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아니지만…….
‘장문인들과 가주들의 실력은 무시하면 안 된다.’
최근 북해빙궁의 궁주를 만나 보고 느꼈다.
어떠한 벽을 넘은 고수들은 아득한 심상을 새겨 자신만의 길을 구축한 무인들이다. 그들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속단하는 건 금물이다.
그렇기에 무당산으로 향하던 소림사의 방장과 만난 건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리고 소림의 방장 천선대사(天仙大師)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황극린을 마주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나, 방장이 직접 움직여 그를 본다면 무림의 판도가 크게 흔들릴 것이다. 그런 상황은 최대한 지양하려 했다.
이렇게 황극린이 무당산에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기에 조금은 감탄했다.
“아미타불, 황 시주가 직접 빈승을 찾을 줄은 몰랐소이다.”
“그렇소?”
황극린은 소림의 방장이라 해도 딱히 예를 차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해월대사가 만뇌문에 쳐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그들과의 전쟁을 각오했다. 이젠 뇌불까지 돌아왔기에 더욱 결심이 선 상태였다. 싸우지 않는 편이 좋았지만, 뇌불과 소림사의 악연을 들으며 피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일로 빈승을 찾아 주셨소이까.”
고저가 없는 음색.
하나, 그의 몸에는 강렬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언제든 황극린을 공격할 수 있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소림사는 만뇌문을 적대하고 있소?”
“악을 섬멸하는 것은 소림의 의무외다.”
만뇌문을 언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소림의 방장이 말하는 바는 극명하게도 만뇌문이 악이라고 하는 거다. 용성에 들어갔다고 한들 자존심 강한 소림사의 태도가 바뀌지는 않으리라.
황극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소림이 혈풍뇌전신공을 강탈하려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소?”
“사교도와 결탁한 것은 용서할 수 없소이다. 제아무리 황실의 비호를 받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외다.”
황극린의 눈이 가늘어진다.
뇌불의 말에 따르면 현 소림의 방장은 그래도 대화할 구석이 있다고 했다. 뇌불이 소림에 있을 때도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게 현 방장이라던가? 해월대사가 가장 음흉한 놈이라고 욕했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소림의 방장이 만뇌문에 가진 적대감은 예상 이상이었다.
지금 소림사가 만뇌문에 어떠한 시비도 걸지 않고 조용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역시 뒤에서 무언갈 준비하고 있군.’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확신은 아니었다.
그래도 소림이라면 문파의 은원보다는 중원 전체를 생각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뭘 의심하는지 알겠지만, 만뇌문은 배교와 결탁하지 않았소.”
무림맹 장로 회의에서 소림의 장로가 그것을 언급했다.
소림은 아마 그것으로 만뇌문을 악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거기다 뇌불이 만뇌문의 문주로 밝혀졌으니… 사실상 소림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배교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소림 방장의 기세가 갑자기 돌변했다.
그것이 천선대사의 역린이라도 되는 걸까? 황극린은 그 반응을 기억했다.
“문답무용.”
“싸울…….”
황극린은 이곳에서 싸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한번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빙궁주와의 만남에서 황극린은 기(氣)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를 배웠다.
천선대사는 황극린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