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거래
사망교(死亡橋).
과거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문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천흉이 최종적으로 머물렀던 문파였다. 결국 남궁세가의 창천뇌검과 수많은 정파의 기인 인사들이 모여 멸문시킨 문파였지만, 그들이 죽인 무림인의 수만 해도 공식적으로 천 명을 넘어섰다. 비공식적인 사망자와 무림인이 아닌 백성들까지 합치면 그 수가 훨씬 많았다.
현재 천흉은 사망교가 아닌 배교의 부교주다.
사망교가 배교의 분파 개념일까? 사망교가 멸문할 당시에도 배교라는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었다. 아마 천흉이 배교에서 나와 새로이 만든 문파가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흉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배교의 일원이었을까?
아니라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리라.
“천흉은 제 고모랍니다.”
마령은 혈마교주의 딸이다.
그렇다는 말은.
“혈마교주와 남매라는 말인가?”
“네, 저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랍니다. 이름은 마연연. 저도 어릴 적에만 잠깐 얼굴을 보았을 뿐이지만… 기억은 하고 있어요.”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현재 혈마교주의 직계들도 소교주 쟁탈전을 벌이고 있으리라. 흑살문에서도 그것에 개입하려다가 피를 보았다. 마령이 흑살문을 찾아갔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으리라. 마령은 소교주의 위(位)에 오르지 못하였었다. 황극린이 207호라 불렸던 전생에서는 말이다.
소교주가 되지 못한 이들은 처형당하거나 도피하거나 한다.
천흉은 현 혈마교주인 혈황마제(血皇魔帝)에게서 도망쳐 배교로 갔으리라.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사망교를 만들어 무림에서 활동하게 된다.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지고 있었다.
상황은 과거와는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이미 황극린이 지흉이나 혈귀비 같은 사망교의 간부가 될 이들이 성장하기 전에 처리했기에 사망교는 등장하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무림엔 그보다 더한 비사가 많소. 그리고 놀라운 일도 아니지. 혈마교의 소교주가 되지 못하면 혈마교에서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
“본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계시는군요. 놀라워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마령이다.
그녀의 눈에는 경계 따위는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감정을 숨기는 데 매우 능하거나, 혹은 황극린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 뭐든 상관없었다. 황극린은 마령이 부교주와 함께 만뇌문에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천흉의 정보를 말해 주는 이유는… 힘을 실어 달라는 말이오?”
마령이 들켰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먼저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네, 맞아요. 황 공자님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마령과 연을 맺는다면, 그녀가 소교주의 위에 오른다면.
황극린으로서도 나쁜 상황은 아니다. 현 무림에선 정사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며 흉흉한 분위기였지만, 모든 전쟁은 파멸로만 이어지진 않는다. 전쟁이 벌어져야만 얻을 수 있는 평화도 있었다. 애초에 무림이란 그런 곳이다.
다만.
“내 상황을 알고 있소?”
“알죠. 만뇌문주님의 정체가 뇌불이라는 게 드러났으니 무림맹에서 만뇌문을 곱게 보지 않겠죠. 아마 용성에서도 불만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마 소저에게 힘을 실어 주기 힘들다는 건 잘 알고 있겠구려.”
마령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젓는다.
“황 공자님께 원하는 건 절 위해 싸워 달라는 게 아니에요. 단지.”
“단지?”
“이걸 제 고모님을 만나면 전해 줬으면 좋겠어요.”
한 장의 서신이었다.
대충 짐작이 간다. 천흉을 다시 혈마교로 불러들이려 하는 것일 테다. 천흉이 마령의 후견인이 된다면 소교주에 오를 가능성도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물론, 문제는 많다. 천흉은 과거 혈마교주와 교주직을 걸고 싸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령이 조카라고 해도 그 자리를 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위험하지 않겠소? 천흉은 위험하오.”
적어도 황극린이 기억하기로는 천흉은 잔악무도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대마두였다.
아직 무림에선 제대로 활동하지 않아 이름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니까요. 뭐, 고모님한테 밀린다면 제 한계가 거기까지인가 보다 생각하면 되죠. 한 번 사는 인생이니 뭐든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세에엑-
다짐하듯 말을 내뱉는 마령.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목에 걸린 독각화망이 혀를 날름거린다.
“그런데 난 천흉과 접점이 없소. 왜 이런 서신을 내게 주는 것이오?”
“황 공자님은 믿을 수 있으니까요. 똑똑하신 분이잖아요?”
마령은 광사탑에서 만났던 황극린을 기억한다.
북해에서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그녀는 황극린의 행적을 처음부터 조사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보았다. 어떨 때는 마두를 잡아 족치는 대협객이 되었다가, 또 가끔은 정파인들이 지탄할 만큼 잔인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그는 똑똑했으며, 은혜와 원한을 확실하게 갚는다.
그런 사람과 연을 맺기 위해서는 먼저 신뢰를 보여 주어야 한다.
“본교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정파에서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혈마교주의 딸이 말하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
“황 공자님은 정보를 이용하여 정파에서 가장 앞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과거처럼 대규모로 진행되지 않을 거예요. 피의 혈족들은 천화련만을 노리고 있거든요. 무식하게 앞에 보이는 문파들을 하나씩 멸문하다간 혈마교는 얻는 것도 없이 신강으로 또 후퇴하겠죠. 원로들의 방향성은 이미 정했답니다.”
피의 혈족이란 혈교의 출신들을 뜻했다.
혈교와 마교가 합쳐진 문파였기에 혈마교 내에서도 세력이 나뉜다.
마령은 부탁하면서 황극린에게 도움이 될 법한 정보를 풀었다.
마령은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좋소.”
마령이 황극린을 신뢰하는 만큼 황극린 또한 믿기로 했다.
나쁜 거래는 아니다. 애초에 천흉을 만날지도 안 만날지도 모르지만, 만나서 서신만 전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좋다니까? 호호,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나야말로 잘 부탁하오.”
그렇게 말하며 황극린이 마령을 빤히 바라본다.
“이왕 잘해 보기로 했으니 부탁할 게 있소만.”
그녀의 한쪽 눈썹이 꿈틀하더니 작게 한숨을 내쉰다.
황극린이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눈치였다.
“정말 황 공자님은 방심할 수 없다니까요. 대신, 천흉이 가까이에 있다는 정보가 있으면 꼭 찾아가 주셔야 해요?”
“그러겠소.”
황극린의 간결한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마령이 선선히 품속에서 봉황이 새겨진 패를 꺼내 들었다. 봉황의 패였다. 북해빙궁주가 다시 찾아온다면 뇌불이 그녀를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굳이 북해빙궁까지 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거기에 봉황의 패까지 건네준다면 북해빙궁주의 의지를 돌리진 못하더라도, 지연시킬 수 있진 않을까?
‘그러고 보니 마령은 재능을 볼 수 있다고 했었지.’
정확히는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고 했던가.
“마 소저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떻소?”
마령이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연다.
“아, 북해에서 말씀드린 거요? 황 공자님은… 눈이 멀 것만 같은 적색을 가지고 있어요. 그 정도 되는 빛을 품은 사람은 교주님이나 빙궁주 그리고 흑살문의 문주밖에 보지 못했어요.”
사흑련의 수장들은 화경에 이른 지도 수십 년이 넘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같은 화경이라도 수준 차이가 다르다. 무림에선 화경에 이른 고수들이 다 비슷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황극린은 뇌불과 수련하며 그 차이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사람만 볼 수 있소?”
“네……?”
마령으로서도 그러한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에 휘감긴 독각화망을 풀어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본다. 독각화망이 불쾌한 듯이 꼬리를 휘휘 저었지만, 마령을 때리거나 하진 않았다.
“솔직히 사람만큼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보이는 것 같아요.”
“그렇군.”
“왜 그러시죠?”
“따라오시오.”
황극린이 향한 곳은 흑주가 있는 곳이었다.
* * *
“이건……?”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간 공동. 마령이 눈을 크게 뜬다. 사방이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중구난방으로 쳐진 거미줄은 아니다. 마치 인간이 성곽을 쌓아 올리듯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듯한 거미줄. 공동 안에 수천 마리의 거미가 있더라도 믿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 사아아아-!
독각화망이 기겁하며 마령의 뒤로 물러선다. 영물끼리는 무언가 통하는 게 있는 걸까?
- 끼이?
왜인지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더 크기가 작아진 인면지주.
거기다 평범한 인면지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파다다다닥!
날개를 힘차게 휘두르며 흑주가 황극린의 어깨에 앉았다.
“나, 날개? 인면지주 맞아요, 그거? 광사탑에서 본… 어떻게 날개가?”
“모르겠소. 갑자기 피부를 벗더니 이렇게 바뀌더군.”
솔직히 황극린으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물이 인간의 피를 탐하고 사람처럼 환골탈태를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흑주는 최근 들어 제대로 거미줄도 잘 뽑아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천화련의 대공자가 나간 후에 이렇게 변화한 듯하다.
“어떻소?”
황극린의 물음에 마령이 흑주를 빤히 바라본다.
뭘 보냐는 듯이 엉덩이를 쑥 내밀고 거미줄을 방출하려던 흑주였지만, 황극린의 만류에 끼이, 하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몸을 돌렸다. 볼 테면 보라는 듯이 번쩍 상체를 들어 올린다. 마치 네 발 강아지가 두 발로 서 있는 듯하다.
그런 해괴한 광경에 독각화망이 입을 벌려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냈지만, 흑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영물이 아닌 것 같은 느낌도 드는군요.”
“그건 무슨 소리요?”
“설명하기 힘든데… 마치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아니, 사람은 분명히 아닌데… 그렇다고 영물은 또 아닌 것 같은 느낌이…….”
황극린이 흘끔 흑주의 등 쪽을 바라본다.
인간의 얼굴이 튀어나와 있다. 과거엔 어색한 인형 얼굴 같았다면, 지금은 조금 더 세밀해진 느낌이랄까? 질감도 마치 인간의 피부와 비슷했다.
“…혹시 그 아이의 알을 받아 볼 수 있을까요?”
“있긴 하지만, 영물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다고 하여 영물이 되는 것은 아니오.”
신병이기라 불리는 금화종을 이용하여 알을 부화시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런 방식으로 영물을 무한정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자연의 섭리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림인을 따져 봐도 그렇다.
천하제일의 고수가 아이를 낳는다고 하여 그 아이가 내공을 잔뜩 품고 태어나지는 않으니까. 그 아이가 고수가 될 가능성은 높지만, 그래도 부모만큼의 노력을 해야 무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
그건 영물도 마찬가지다.
“괜찮아요. 묵룡천가에는 영약이 많으니까요.”
당연히 영약을 주어 영물을 키우는 방법은 무림에서 꽤 오랫동안 연구되었다.
하지만 그 효율이 몹시 낮기에 이제는 영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기껏 비싼 영약을 먹여 키웠더니 내단을 만들지도 못하고 내부의 폭주하는 기운에 몸이 터져 죽은 동물들도 많았다.
동물은 인간처럼 내공을 다루는 ‘내공심법’ 따위를 전수해 줄 수 없었으니까.
“골라서 가져가시오.”
열 개의 알.
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마령은 오래도록 알을 바라본다. 알에 있음에도 마령의 재능이 발휘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으리라. 마령이 성공한다면 또 다른 인면지주가 태어나는 것이니.
“이걸 가져가겠어요!”
“그러시오.”
“감사해요!”
어차피 봉황의 패도 받았으니 알 정도는 줄 수 있었다. 그리고 흑주는 이제 알을 주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오로지 황극린에게만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외관이 변한 후에 알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
그전에는 알을 품으려 하기도 하고 누가 알을 가져가려고 하면 공격하기 일쑤였지만, 흑주는 달라졌다. 그게 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는 알아봐야 한다.
‘뇌섬사도 이렇게 깔려 있으니까.’
흑주의 실은 병기를 만드는 데에도 탁월한 재료였지만, 그 외에도 쓰임이 많았다.
아무튼.
희희낙락한 마령.
처음엔 흑주를 경계하던 독각화망이었지만, 흑주가 시선도 주지 않으니 무언가 심통이 난 듯했다. 쭉 찢어진 눈동자로 마령이 애지중지하는 알을 보더니, 뇌섬사 위에 고이 모셔 둔 아홉 개의 알을 바라본다.
- 새애애애!
독각화망이 불쑥 몸을 움직인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몸짓으로 물속을 유영하듯 앞으로 나아간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반응하지 못할 속도였다. 황극린 또한 알을 노리는 독각화망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먼저 움직인 건 흑주였다.
- 끼에!
- 시에에에에!
독각화망이 제압된 건 순식간이었다.
흑주가 뿜어낸 끈적한 거미줄이 독각화망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흑주는 그 위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며, 끼익끼익 소리를 내고 있다.
그걸 본 마령이 황당해한다.
“그, 그 아이 정말 세군요? 절정 고수와 정면으로 싸워도…….”
“아마 그 이상일 것이오.”
흑주는 만뇌문도들의 대련 상대였다.
실전 경험을 잔뜩 쌓았으니 싸우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황극린의 말에 마령이 몸을 한차례 떨더니 알을 꼭 끌어안는다.
- 새애… 새애애애…….
독각화망은 전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주인이 야속한지 구슬픈 소리를 내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