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방문
“기분은 어떠시오?”
“나쁘지 않구나.”
두 사람은 세 개의 태양이 떠오른 상황에서도 태평하게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뇌불은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이라는 건 가끔 어이없을 정도로 작은 계기로 찾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길을 걷다가 떨어지는 과일을 보고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자다가 꿈을 꾸고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계기가 아니다. 그런 계기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 전까지 무수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작은 계기라는 건 꽉 찬 항아리의 물을 넘치게 만드는 마지막 한걸음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뇌불은 황극린과의 비무가 계기가 되어 한 단계 더 발전했다. 비동에서의 오랜 경험과 최근 기억을 되찾고 천화련에 납치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은 마치 오늘의 작은 계기를 마주할 준비 과정인 듯 뇌불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어쩌면 말이다.”
뇌불이 황극린을 보며 말한다.
“중단전과 하단전의 기운을 조화하여 사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뇌불의 말에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조화 말이오?”
“그래. 나는 아주 짧은 시간만 가능하겠지만 네놈은 다를 것 같아.”
황극린의 육신이 아무리 튼튼하다고 해도 하단전과 중단전의 기운을 조화하여 사용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하지만 성수신의가 영약을 완성한다면 어떻게 될까?
황극린은 대번에 뇌불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렇군.”
“벌써 이해한 것이냐?”
“이해는 했으나… 꽤 어려울 것 같긴 하군.”
“뭐가 문제냐? 비동에서도 수련만 죽어라 하던 놈이. 또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뇌불이 일어서 황극린에게로 신형을 돌린다.
“자, 와라. 이번엔 조금 다를 거다.”
두 사람은 다시 비무를 시작했다.
* * *
정식으로 용성이 만들어지고, 한 달이 지나갔다.
신강성은 지나 청해성을 넘어 감숙성과 사천성에 그들의 정예가 흘러들어왔다는 정보가 만뇌문에게까지 들려왔다. 그런 것을 보면 이미 경계가 뚫린 것은 사실이리라.
“사실 경계랄 것도 없는 게 사실이지요. 혈마교가 작정하면 신강을 넘어 중원에 침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이미 비밀 지부를 중원 곳곳에 만들어 뒀을 테니까요. 허나,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아낸 바가 없다고 합니다.”
사마명이 문주인 뇌불과 장로인 황극린에게 보고를 마쳤다.
그는 개방이나 하오문에서 구매한 정보들을 집약하여 보고하는 일도 했다. 만뇌문의 사업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기도 했지만, 어느샌가 군사의 일도 같이 겸하고 있었다.
그는 나날이 발전하는 만뇌문도들을 보며 자극을 받았으며, 만뇌문에 머무는 기간 동안 하루에 두 시진 이상을 자지 않았다. 관련 서책을 읽고 공부했다. 사마세가의 출신이라 그런지 적응은 빨랐다. 늦은 만큼 더 노력하였기에 발전은 빨랐다.
“허나, 정파 무림에서 걱정하는 것처럼 천화련과 싸우기 위함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마명의 말에 뇌불이 묻는다.
“첫째로 소수 정예를 작정하고 보냈다면 정예가 청해성을 넘었다는 정보가 새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건 규모가 꽤 되거나 신강을 나선 혈마교도들의 실력이 예상보다 낮다는 게 되지요.”
“두 번째는?”
“혈마교와 천화련의 관계에 관하여 생각해볼 때, 혈마교가 만약 천화련과 싸울 생각이었다면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과거 천화련이 혈교와 마교에 선포했듯 말입니다.”
“영 틀린 말은 아니로군.”
뇌불은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최근 막혀있던 혈이 뚫린 듯이 쭉쭉 성장하고 있었다. 사실 성장이라기보단 과거의 경지를 빠르게 되찾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하리라. 거기다 자신이 데려온 사마명이 제법 일을 잘 하는 것 같았다. 역시 어미를 닮아 재능이 뛰어나다. 물론, 무공의 재능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혈마교는 만뇌문을 찾아올 수도 있겠군.”
황극린의 말에 뇌불과 사마명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제 만뇌문은 무림맹 소속이 아닌 용성에 소속되어 있었다. 혈마교는 천화련과의 정면 전쟁을 위해 만뇌문과 손을 잡으려 할 수도 있었다.
“혈마교는 믿으면 안 되는 족속들이다. 그놈들은 평범한 무인들과는 사고방식이 다르지. 천화련 놈들도 괴물이지만 혈마교도 마찬가지지. 그들이 단일 문파로 정파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유는 분명히 있다.”
뇌불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기억은 되찾은 그는 과거 무림의 정세도 거의 다 기억해냈다. 물론, 무림공적으로 지정된 후로는 딱히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굵직한 사건들은 그도 귀가 있으니 들은 바가 있었다.
“만약 혈마교가 찾아오면 어쩔 생각이더냐?”
뇌불이 황극린에게 묻는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무림맹이 만뇌문을 공격할 빌미를 줄 수도 있소. 어떤 제안이 오더라도 거절할 것이오.”
뇌불이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다. 혹시 모르니 골이 놈에게도 서신을 보내놓도록 하마.”
용성의 성주가 된 언치골.
그에게 말하면 알아서 다 해결할 것이다. 안 그래도 만뇌문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여기에 혈마교가 개입했다는 것까지 겹치면 용성의 신뢰가 하락한다. 언치골은 용성을 무림맹을 뛰어넘는 세력을 만들고자 하고 있었으니 최대한 백성들의 여론을 바꾸려 할 것이다.
물론, 과거의 용성은 거의 실패했다는 걸 알고 있는 황극린이었지만…….
황실과 용성에 입성한 문파들의 면면을 보면 최소한 5년은 버틸 수 있으리라.
그렇게 대화를 하는 와중.
“무, 문주니임!”
당황한 목소리가 역력한 백온후.
키가 거의 6척에 달하는 형과는 달리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지만, 순수 무공의 실력으로는 문도 중 가장 가능성이 큰 백온후였다. 만뇌문의 위협 요소가 늘어나고부터 문도들은 진법의 입구에 서서 경계를 섰는데, 지금은 백온후가 경계를 서고 있던 모양이다.
회의를 하고 있던 세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누가 찾아왔더냐?”
문주 뇌불의 물음에 백온후가 크게 외친다.
“혀, 혈마교에서 사람이 찾아왔어요! 엄청 무서운 얼굴을 아저씨랑… 뱀을 목에 두른 여자랑… 막 살수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잔뜩 왔어요!”
뱀을 목에 두른 여자라.
황극린은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령이로군.’
그녀는 혈마교주의 딸이었다.
* * *
“오랜만에 뵈어요, 황 공자님.”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마령. 왜인지 북해에서 헤어질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진 듯하다. 그 사이에 실력이 상승한 걸까? 그리고 그녀의 목에 두른 영물 독각화망(獨角化蟒) 또한 비늘이 윤기가 강해지고, 눈빛이 매서워졌다. 놈은 무언가를 찾듯이 혀를 날름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황극린은 짧게 마령의 시선을 마주한 후, 옆에 있는 중년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만 마주쳐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내는 고수다.
‘강호는 넓군.’
요즘 들어 중원에서도 손에 꼽힐 수준의 고수들과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자신의 무공 실력과 명성이 올라갔다는 방증이겠지만, 딱히 반가운 일은 아니다. 여러 문파에서 만뇌문을 노리고 있다는 말도 되었으니까.
“난 혈마교 부교주 수라진군(修羅眞君)이라 하오.”
“부교주씩이나 되는 놈이 여길 왜 왔느냐?”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뒷짐을 진 뇌불이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그런데 왜인지 수라진군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다. 두 사람이 본 적이 있던가?
“확실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구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맞소. 30년 전에 당신과 만난 적이 있지.”
“나한테 맞았던 거냐?”
“…….”
인상을 찌푸린 수라진군이 황극린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교주께서 당신에게 전하라는 진언이 있으셨소.”
“어머, 부교주님. 급하기도 하셔라… 바로 일 얘기부터 꺼내는 건가요?”
부교주가 마령을 노려본다.
“마령,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그래도… 전 황 공자님과 오랜만에 뵙는걸요. 하고 싶은 말도 있고요.”
마령이 눈을 찡긋한다.
황극린은 마령에게 딱히 원한이 없다. 오히려 호감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마령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봉황의 패.’
북해빙궁의 은인에게만 수여한다는 봉황의 패. 마령은 황극린에게 선뜻 그것을 건네주었다. 뭐, 도움은 되지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주었던 도움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었다.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 한다. 황극린은 그런 행동이 미래를 바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부교주가 말을 꺼냈으니 마 소저와의 대화는 그 이후에 하도록 하겠소.”
하지만 부교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거기다 교주라는 놈이 어떤 진언을 보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황극린의 확답에 마령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성격을 볼 때, 혈마교의 전언을 듣고 바로 그녀를 내칠 것이라 걱정했었지만 황극린이 저리 말한 이상 바로 내쫓지는 않을 것이다.
혈마교의 부교주 수라진군이 품속에서 서신을 꺼낸다.
일반적인 종이는 아니다. 마치 무언가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만뇌문의 장로 황극린은 들어라.”
엄숙한 목소리로 부교주가 말을 이어나간다.
꽤 긴 문장이었지만 짧게 요약하면…….
“빙백마후와 동침하지 마라.”
말을 마친 수라진군이 보란 듯이 뇌불과 황극린을 직시한다.
“…….”
“…….”
애초에 황극린은 북해빙궁주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또한, 뇌불의 말을 들으니 더욱 그러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걸 전하러 여기까지 왔나?”
뇌불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들려온다.
“교주님의 진언이니까.”
“그렇군.”
황극린은 혈마교주의 진언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깨달았다.
‘혈마교주와 북해빙궁주와도 무언가 관계가 있군.’
혈마교주가 빙궁주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말일까? 지금 당장은 필요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활용하기 나름이었다.
황극린은 대답한다.
“그럼 교주에게 전하시오. 이미 빙궁주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부교주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떻게 믿을 수 있소?”
어떻게 그 제안을 거절할 수가 있느냐.
꼭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믿고 말고는 자유겠지.”
황극린이 말하자 뇌불이 비웃는다.
“여기서 네가 믿지 못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뇌불은 왜인지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그의 흉흉한 눈빛에 수라진군의 얼굴이 굳어진다.
‘어머, 부교주께서 이리 긴장하는 건 오랜만에 보네.’
마령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
순식간에 냉각된 분위기에 마령이 황급히 입을 연다.
“교주님의 진언을 전달했으니 목적은 달성된 것 아닌가요, 부교주님?”
“그래.”
“황 공자님과 따로 대화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에게 줄 것도 있었다.
“따라오시오.”
황극린과 마령이 일어서자 부교주도 그들을 따르려 했다. 마치 마령을 감시하려는 태도였지만, 뇌불에게 가로막힌다.
“수라진군이라고 했나? 넌 나랑 대화 좀 하자꾸나.”
수라진군은 떠나가는 황극린과 마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놀랐어요.”
“뭐가 말이오?”
“만뇌문이라는 문파에서 그 정도 수준의 진법을 만들 줄은 몰랐거든요. 부교주는 여차하면 힘으로 만뇌문을 굴복시키려 했을 거예요. 하지만 진법을 통과하면서 그 생각은 완전히 접어버린 것 같더군요. 뭐, 만뇌문주님이라는 변수도 있었지만 말이에요.”
부교주가 끌고 온 혈마교 정예들은 한 명 한 명이 절정에 달한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전력이라면 웬만한 문파는 하루만에도 멸문지화를 당하리라.
“참, 온후라고 했던가요? 처음에 만났던 아이의 재능이 정말 뛰어나요. 물론, 황 공자님에 비해선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라면 본교에도 높은 자리에 오를 재능을 가지고 있더군요. 만뇌문의 미래가 참 밝은 것 같아요.”
마령은 황극린에게 아부하는 게 아니라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재능을 ‘빛’의 형태로 바라볼 수 있었으며, 지금도 황극린에게선 찬란한 핏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런 핏빛은 혈마교주에게나 보이는 광휘였다.
“돌려주겠소.”
“어머, 정말 사용하시지 않았군요?”
마령이 놀랍다는 듯이 봉황의 패를 받아들였다.
“북해를 다녀와서 북해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었어요. 알고 보니 당시에 부궁주가 공석이었다고 하더군요. 본교에서 파악하기로는… 크나큰 죄를 지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데 그 이유로 북해에선 봉황의 패를 거절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부궁주가 공석이라…….
중요한 정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해둔 황극린이다.
“마 소저의 목적은 무엇이오?”
“네에?”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마령이 황극린과 눈을 마주한다.
“만뇌문에 찾아온 이유가 있지 않소?”
“어머, 저희 관계는 일이 없어도… 참, 농을 즐기는 분은 아니셨죠?”
마령이 쓴웃음을 짓더니 진지한 표정을 했다.
“천흉의 정체를 알아낸 것 같아요. 그는 어떤 비밀 문파에 소속된…….”
“배교의 부교주.”
“…….”
황극린의 말에 마령의 동공이 커진다.
“…알고 계셨나요?”
“최근에 알았소.”
“에고고, 황 공자님께 빚을 지우려 했는데 실패했군요.”
귀여운 척을 하는 마령이었지만, 황극린의 시선은 무심했다.
그녀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을 뗀다.
마치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
“천흉이 과거에 몸담았던 곳에 어딘지 알고 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