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변화와 인식
“으음, 여긴가.”
교특범.
전대 하오문주인 무영천왕(無影天王)의 자식 중 한 명이었으며, 현재는 무문(無門)의 문주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은인 황극린에게 은혜를 갚고,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인간의 형태를 한 붉은 삼의 정보를 얻는 것이었지만, 꽤 오랫동안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황극린에게 서신이 도착했다.
요약하자면.
- 절강성 회계산 부근을 수색하라.
서신을 받은 교특범은 무문의 문도 9할을 회계산 부근으로 집결시켰다. 그들이 해야 할 것은 간단했다. 회계산을 뒤져 은인께서 원하시는 영약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혹여나 영약이 발견되었을 수도 있으니 주변 마을과 약초꾼들을 수소문하는 것도 병행해야 하리라.
적절하게 인원을 분배하고 회계산의 초입에 선 교특범.
그의 눈이 가늘어진다.
‘묘한 느낌의 산이군.’
그 또한 산전수전을 겪은 사내였다. 때로는 도망치기 위해 산에 오르기도 했으며, 누군갈 쫓기 위해 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회계산은 묘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이미 오기 전에 회계산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향로봉. 그 아래로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명산 중 하나라 여겼던 교특범이었지만.
왜인지 음울함이 깃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감(五感)으로 느낀 건 아니다. 그렇기에 수하들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음울함이다.
‘이런 곳에 영약이 있다는 말인가?’
뭐, 이상한 것도 아니다.
황극린이 내린 임무를 수행하며 영약이 어떤 곳에서 자라는지 공부했다. 땅과 하늘의 기운이 이어지는 높은 봉우리에서 희대의 영약이 피어나기도 하지만, 인간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혹한의 환경에서도 전설상의 영초가 피어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너무 살기 좋거나 인간이 아예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 영약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
물론, 사람이 살기 좋은 장소라면 영초가 다 자라기도 전에 인간의 배 속으로 들어갈 터이니 혹한의 환경에서 더 자라기 쉬울 것이다.
‘회계산은 그래도 방문자가 꽤 많은 편이니까.’
교특범은 이곳에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만약 인형혈삼이라는 게 회계산에 있다면…….
‘정말 찾기 힘들겠군.’
당연히 인간의 눈에 닿는 곳에 떡하니 삼이 묻혀 있진 않으리라.
교특범은 넓은 산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 * *
용성은 총 열 개의 문파와 가문이 모여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성주로는 진주언가의 태상가주인 언치골이 되었으며, 부성주는 만뇌문의 문주인 뇌불이 임명됐다. 당연히 뇌불도 황실이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했어야 했지만, 뇌불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황실에 양해를 구하고 참석을 미루었다.
황실에선 아쉬워했지만, 뇌불이 무림맹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었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서신을 보내왔다. 사실 이번 일에는 진주언가의 태상가주 언치골의 입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었다.
‘끄응.’
태상가주가 되고 무림에서도 배분으로는 어딜 가나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된 언치골.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었지만, 이번엔 황실에 고개를 숙여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제안을 받아들인 건가.’
만뇌문에서 그와 몇십 년 만에 수다를 떨 때는 기분이 좋았었다.
젊은 시절의 자신과 인연이 있던 이와 과거를 추억하다 보니 회춘하는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막상 북경에 돌아와서 자신의 직위를 돌이켜 보니 괜한 약점이 잡힌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 뇌불에게 끌려다닐 것 같군.’
하나, 그런 불평은 의미없는 짓이다.
이미 뇌불은 부성주가 되었으며, 이제는 한배를 탄 입장이었다. 무림맹이 아닌 용성이 중원 무림을 이끌기 위해서는 반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수백 명의 금의위와 함께 드높은 단상에 앉은 황제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다. 이제 용성은 황실이 공인한 무림의 최대 세력이 되었다. 이제부터 언치골이 어떻게 용성을 이끄느냐에 따라 강호에서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다.
연회가 무르익을 때쯤.
“빈니에게 하실 말씀이 있지 않으십니까?”
겉으로 보기엔 40대로 보이는 여인이 언치골에게 다가왔다.
‘올 게 왔군.’
검후신제(劍侯神帝).
아미파와 쌍벽을 이룬다는 절강성의 패자 보타문의 장문인이다. 불가를 따른다고 했지만, 소림사의 불가와는 조금 다르다. 조금 더 황실에 가까운 문파라고 할까. 역대 황제는 소림사보다는 보타문을 총애했다. 그런 만큼 보타문의 장문인이 용성의 부성주가 되는 건 당연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뇌불의 등장으로 인해 검후신제는 부성주의 자리에서 밀려 버렸다.
“으음, 장문인.”
“으음이 아니지요.”
“…….”
언치골과 검후신제가 눈을 마주한다.
겉으로는 전혀 반목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언치골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적의를 품고 있었다. 오로지 언치골만 느낄 수 있도록 은밀하게 기세를 표출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빈니보다 더 올곧은 사람이었다면 인정했을 겁니다. 하나, 뇌불이라니요? 소림에서도 퇴출당한 파계승을 용성의 부맹주로 받아들이다니요?”
솔직히 언치골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껄껄, 네 비밀은 내가 무조건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네!’
호탕하게 외치면서 술을 홀짝이는 뇌불의 얼굴이 떠올라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뇌불이 홧김에 비밀을 공개한다면? 아무리 진주언가라도 황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선조들이 쌓아 올린 언가의 명예가 바닥을 뚫고 지하로 박힐 게 분명하다.
“뇌불은 달라졌소.”
“달라졌다……. 뭘 보고 그리 확신하시는지요?”
“그는 과거와는 달리 혼자가 아니라오. 만뇌문의 문도들을 책임지는 입장이 되었소. 그리고 솔직히 뇌불이 과거에 죄없는 백성들을 괴롭힌 적은 없었지 않소? 시비가 붙은 무인들과 자주 싸웠을 뿐이지.”
“욕을 했다고 상대의 문파를 멸문한 무뢰한입니다.”
뇌불의 악명은 아직도 중원에 전해져 온다.
보타문의 장문인은 뇌불이 한창 무림을 휘저을 당시에 한창 중원에서 활동하던 무인이었다.
“영문파(迎門派) 또한 용성의 일원이 되었소.”
영문파는 사흑련에 속하진 않았지만, 그에 준할 만큼 악명을 떨쳤던 문파다. 용성은 정과 사의 구분이 없었으니 그들도 용성에 소속되었다. 물론, 이제부터는 사파 문파가 아닌 황실의 검으로서 백성을 위해 문파를 꾸려 가겠다 선언하긴 했다.
“그렇다고 영문파의 장문인이 부성주의 직위를 받은 것은 아니지요. 더군다나 영문파의 악명을 모두 합쳐도 뇌불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검후신제께서는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그건 아닙니다만, 뇌불은 경우가 다르지요. 그가 부성주로 있다면 소림사와의 반목은 정해진 수순일 것인데, 그걸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실의 의지가 있다면 가능하다고 보오.”
“북해빙궁은…….”
“금의장군(金衣將軍)께서는 북해빙궁도 황실의 편에 설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셨소.”
검후신제의 눈이 가늘어진다.
금의장군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그러니 지켜보시오. 검후신제께서 뭘 걱정하는진 알겠소. 하나, 기회도 주지 않고 내친다면… 그는 정말로 악인이 될 수도 있소. 그가 다시 무림을 휘젓는 걸 보고 싶은 것이오?”
검후신제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녀로서도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금의위의 지휘사인 금의장군까지 들먹이니 할 말이 없었다. 오늘은 용성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 자리에 부성주라는 놈은 얼굴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계속 지켜볼 겁니다.”
“그러시오.”
검후신제가 떠나간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언치골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검후신제가 집착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긴 한데…….’
뭐, 그건 뇌불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의 근본적인 의심까지 언치골이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최대한 그가 사고를 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
뇌불과 황극린은 진법 내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이놈아, 갑자기 왜 이렇게 강해진 거냐?”
황극린은 뇌불이 떠나 있는 시간 동안 급격히 성장했다. 북해빙궁주와의 만남이 깨달음이 되었다나? 그러고 보면 정말 천재는 천재인 것 같았다. 뇌불 또한 그 소림사에서 최상위권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황극린은 그보다 더한 괴물이었다.
거기다 조만간 황극린만을 위한 성수신의의 영약이 완성된다고 한다.
상처를 입으면 금방금방 회복할 수 있게 된다나?
여기서 더 강해지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문주도 강해져야 하오.”
황극린이 그렇게 말하며 뇌전을 쏟아 냈다.
살아 있는 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쏘아지는 뇌전에 뇌불이 숨을 참으며 보법을 펼쳤다. 당연히 모두 피해 낼 수 없었기에 반탄지기를 두르거나, 그 또한 뇌전을 뿜어내며 황극린의 뇌전에 맞섰다.
하지만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다.
뇌불의 육신은 전성기 때보다 쇠락했을지 몰라도, 내공의 양은 오히려 늘어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황극린의 뇌전을 막아 내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쿠르으응-!
한 줄기 섬광이 뇌전의 반탄지기를 뚫고, 체내에 침투한다.
그 순간.
뇌불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냥 당하진 않지!”
혈풍뇌전신공.
그것은 역천의 무공이라 불릴 만하다. 무림에서 중단전을 다룬다는 건 금기에 가까웠다. 그 이유는 위험성에 있었다. 하지만 뇌불은 중단전을 만드는 걸 성공했으며, 뇌전의 기운과 조화하여 활용하는 법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몇 배는 빨라진 움직임으로 뇌불이 손을 뻗었다.
그의 권격이 황극린의 복부에 닿으려는 순간.
황극린 또한 뇌불과 마찬가지로 중단전의 힘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의 속도는…….
“……!”
뇌불이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졌다, 이놈아.”
“고생했소.”
황극린은 어느샌가 뇌불의 등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여차하면 만뇌(萬雷)를 쏘아 낼 생각이었겠지.
“네놈의 몸뚱이는 정말… 괴물 같구나.”
혈풍뇌전신공.
마치 황극린을 위해 만들어진 무공 같았다. 그의 세맥과 혈맥은 혈풍뇌전신공의 악랄한 기운에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는 것 같았다. 피가 빨리 흐르고 세맥에서 뇌전이 마구 발광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내상을 입기 마련이었다.
대부분의 기억을 떠올린 뇌불은 자신이 왜 주화입마에 걸렸는지 알게 되었다.
무리한 연공 탓이다. 자신도 모르게 쌓인 뇌기가 육신을 좀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극린의 육신은 중단전의 힘을 저리 활용하고도 멀쩡하다.
거기다.
“그 영약이 완성되면 너는 혈풍뇌전신공을 정말 대성할 수 있겠구나.”
“그럴 것 같소.”
뇌불이 창안한 무공이었지만, 그 또한 대성하지 못했다.
마지막 벽에 가로막혀 주화입마에 빠졌었다.
‘뇌전과 하나가 된 육신.’
그때가 되면 황극린은 얼마나 강해질까.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고금제일이라는 자리에 올라설 수도 있지 않을까.
청출어람(靑出於藍).
뇌불은 애초에 제자를 키우지 않았다. 몇 수 알려 줬던 이들의 재능이 뛰어난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을 뛰어넘으리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뛰어넘기 전에 밟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제자가 성장하는 게 뭐가 좋단 말인가? 분명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뇌불은 황극린에게 패배했음에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항시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던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좋구나.’
황극린의 발전을 몸소 느낄 때마다 뇌불은 행복을 느꼈다.
그가 더 장성하여 넓디넓은 무림에 그 누구도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허허로운 미소를 머금던 뇌불이 하늘을 바라본다.
세 개의 태양이 땅을 비추고 있다. 처음엔 그 태양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고 도망치고 싶었건만, 이제는 저 태양도 귀엽게만 보인다.
‘가슴이 간지럽구나.’
세상을 저주하고 가시만 돋혀 있었던 뇌불은 달라졌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아낀다는 것.
누군가의 미래를 염원한다는 것.
그것은 뇌불의 마음에 평화와 완식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으음.”
왠지 뇌불의 표정이 달라짐을 느꼈던 황극린.
어느 순간 뇌불이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고 있었다. 언제나 바깥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던 뇌전이 부드럽게 뇌불의 육신을 감싸고 있었다.
‘같은 뇌전이라도 당신의 것은 나와는 약간 다르구려.’
순간 북해빙궁주의 손끝에서 펼쳐졌던 빙공이 떠오른다.
그녀의 손엔 무엇이든 멈추게 만드는 염원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들 또한 이런 식으로 발전했을까.’
북해빙궁주.
혈마교주.
천화련주.
그리고 흑살문주.
그들의 무공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까.
황극린은 가만히 서서 뇌불의 호법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