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밝혀진 비밀
언교연.
그녀가 작은 체구에도 하북팽가의 대공자 팽여해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이유는 성수신의의 체질 변화 연구 덕분이다. 수많은 실패와 한두 번의 성공. 성수신의는 실험을 포기하려 했을 때 언교연을 만났다. 그 덕분에 성수신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구를 진행했다.
물론, 그 이후로 성공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허, 정말 진주언가의 언교연이 맞느냐?”
“네. 맞아요, 장 의원님.”
그때 언교연이 고작 다섯 살이었던가?
오래전 일인데도 언교연은 단번에 성수신의를 알아보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성수신의도 그녀를 알아보았으니 서로의 인상이 강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수신의가 언교연의 팔을 바라본다.
“겉으로는 근육이 거의 안 보이는구나. 혹시 부작용은 없었느냐?”
“부작용은요. 너무 건강해서 탈인걸요.”
“그래?”
언교연이 은근한 기대가 섞인 얼굴로 황극린과 성수신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황 공자님도 장 의원님 덕분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걸까?’
언교연도 그러하다.
언가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그리 재능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형제자매 중에서는 부족한 편이었다. 명문가인 언가의 고수들은 근골만 보고도 재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언교연이 현재 직계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이유는 당연히 성수신의의 시술 덕분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언교연의 머릿속에서 이성과 본능이 싸우고 있다.
황극린에게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오랜만에 본 성수신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예의가 없는 건가. 그래도 부탁을 해도 되지 않을까? 거절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
“한번 맥을 짚어 봐도 되겠느냐?”
성수신의가 먼저 말을 꺼내 주었다.
언교연이 두 주먹을 꽉 쥐고 말한다.
“봐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아, 너무 목소리가 컸네요…….”
기다란 원형의 통로로 이어져 있었기에 소리를 높이니 그녀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성수신의가 피식 웃는다. 이미 황극린과 전음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성수신의의 몇 되지 않는 성공 사례. 20년도 더 지난 지금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면, 황극린의 체질 연구에도 도움이 되리라.
“따라오너라.”
“네!”
세 사람은 성수신의의 연단실로 향했다.
* * *
“허어, 놀랍구나.”
극도로 발달한 무림인의 육신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 겉으로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닐지라도 힘의 효율이 다르다. 성수신의는 근골이 자연의 기(氣)를 얼마나 잘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낸 상태다.
“그때보다 근육의 밀도가 더 높아졌어.”
언교연의 팔뚝은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하면서도 탄력적이었다. 언교연은 체질 변화에 성공한 만큼 무공을 익힌 무림인 중에서도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감사해요. 지금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어요.”
“그렇구나.”
혈에 침을 놓아 보기도 하고, 맥을 짚기도 하며 언교연의 상태를 파악했다.
그녀의 근골은 무인의 이상향에 가까웠다.
“…시술을 통해 제 몸이 더 튼튼해질 수 있을까요?”
언교연의 질문에 성수신의가 쓴웃음을 짓는다.
“아마 시술을 통해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
성수신의는 이제 체질 변화를 위한 시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운이나 타고난 체질이라는 이유로 언교연은 성공했지만, 다음 시술에서 성공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만약 실패하며 언교연은 이제껏 쌓아 올린 것을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다만.
“이걸 달여서 칠 주야에 두 번 복용토록 해라. 위험성은 적은 대신 큰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야. 그래도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다.”
“감사합니다!”
언교연에겐 성수신의가 기연 그 자체나 다름이 없었다.
약재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곱게 접어 품에 집어넣는다. 그런 언교연을 바라보던 황극린이 입을 열었다.
“의원님.”
“예?”
“체질 변화를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나 공통점이 있습니까?”
“으음.”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딱히 공통점은 없다. 어떤 이는 이름 없는 무관의 관주이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작은 문파 출신의 무인이었다. 진짜 성공이랄 것은 세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약간의 체질 개선만 이루어 냈을 뿐이다. 아팠던 몸이 회복되는 정도랄까. 그건 체질 개선이라기보단 치료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황극린의 물음에 최대한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
“그러고 보니 두 명은 절강성에서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절강성 말입니까?”
“예.”
하지만 진주언가는 북경에 있었다.
절강성과는 꽤 거리가 먼…….
“어릴 때 기억이 있어요. 아니, 어머니가 해 준 말씀인데…….”
“음?”
“제가 네 살 때 이모님의 집에 반년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다고 했어요. 거기가 회계산(會稽山) 부근이었던가 그랬을 거예요.”
“으음, 절강성이라?”
성수신의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절강성이라는 공통점은 솔직히 우연이 겹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공통점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절강성의 지맥이 특별하여 대지 위의 인간들에게 기운을 북돋아 줬다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절강성에서도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
하지만 황극린으로선 그냥 넘어가기 힘든 문제였다.
그의 육신은 전생과는 달랐다. 전생에선 영약을 취한 적이 있었지만 이처럼 극명한 반응이 나타나진 않았었다. 그를 달라지게 한 요인. 황극린은 죽기 전에 취했던 인형혈삼의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현시대에도 존재하고 있는지는 의문이긴 했지만 말이다.
‘인형혈삼이 자라는 장소엔 아마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기운이 잠들어 있겠지. 만약 그 기운이 다른 영초들에 영향을 주었다면?’
영초뿐만이 아니다.
그 대지 위에서 자란 풀을 뽑아 먹는 염소나 사슴. 그리고 그 염소와 사슴을 잡아먹는 짐승. 그리고 포식자의 정점에 오른 인간.
가설에 불과했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회계산이라……. 내 감각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
뭐, 헛수고일 수도 있겠지만.
시도는 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당장 황극린은 직접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니 무문(無門)의 교특범에게 회계산 부근을 수색하라고 하면 될 것이다. 그는 지금도 절강성에서 열심히 인형혈삼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전혀 발견한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뭔가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아직 입으로 말할 단계는 아니다.
거기다 황극린의 가설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보통 영초라는 것들은 주위의 기운을 게걸스레 빨아들여 성장한다. 다른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없게 영양분과 생기를 모두 빨아들인다는 말이다. 최근 만뇌문에서 금화종을 이용하여 영초를 키우고 있기에 알게 된 지식이었다.
‘내공심법을 운용할 때도 똑같지.’
여럿이서 좁은 공간에 모여 내공심법을 운용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인간이 흡수하는 속도보다 공간의 기운이 다시 채워지는 게 빠르지만, 그래도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각자가 흡수하지 못한 불순한 기운이 호흡을 통해 배출되어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건 황극린이 직접 해 보고 느낀 거다.
그는 보통의 무인이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황 공자님께서도 장 의원님의 대법을 받으신 건가요?”
언교연의 질문에는 성수신의가 답한다.
“그건 아니란다.”
황극린은 이미 성수신의와 만나기 전부터 체질이 바뀌어 왔다. 시술이나 대법도 받지 않고 말이다. 그런 세세한 이야기를 언교연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군요…….”
“아무튼, 이렇게 건강하게 성장한 것을 보니 다행이구나. 혹여나 너도 부작용이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말이다.”
“전 튼튼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부작용은 전혀 없답니다. 그래도 만약 궁금한 게 생기면 의원님을 찾아와도 되죠?”
언교연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한다.
성수신의를 배려한 행동이다. 언교연은 성수신의가 떠난 후 그를 수소문했었지만, 많은 이들이 실패하여 부작용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무림에서 종적을 감췄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리라.
“그럼, 얼마든지 찾아오렴.”
“감사합니다!”
언교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포권지례로 예를 표했다.
여기서 체질을 더 변화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그녀는 강해진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과도한 욕심은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
황극린은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 나가자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교특범에게 서신을 보내기 위해서다.
* * *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뇌불이 살아 있다는 내용이었다. 무림맹에선 공식적으로 답변하지 않고 그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정보를 역추적했다.
그리고 드러난 진실.
만뇌문의 문주가 뇌불이다.
무림공적이 떡하니 살아 문파를 개파했다.
무림맹과 만뇌문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림맹에서 무림공적에 오른 이들을 해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맹주 팽사혁은 머리가 빠지는 것 같았다.
“이걸 어쩐단 말이오.”
이번 일로 명성이 땅바닥을 처박고 지하까지 파묻힌 종남파의 중주일검 적중산 장로만 신이 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맹주의 말에 총군사 제갈서운이 말한다.
“뇌불을 무림공적에서 해제하거나.”
“끝을 보거나 해야겠지요.”
총군사의 말을 받는 부군사 사마태강.
“끝을 본다고 하면?”
“만뇌문 전체를 무림공적으로 지정하고,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끝내야 합니다.”
사마태강이 잔혹한 미소를 머금었지만…….
제갈서운이 고개를 젓는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지 않소?”
부군사 사마태강이 의외로 반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에는 총군사의 말이 맞았다. 만뇌문의 문주 뇌불은 황악이라는 이름으로 황실이 만든 용성의 부성주가 되었다. 그들을 건드리면 황실을 건드는 거다. 아무래도 상황이 난감했다.
“황극린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 황실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아마 무림맹에 오기 전부터 그러한 계획을 세웠겠지요.”
총군사의 말에 무림맹주가 한숨을 내쉰다.
“그러게 말이오. 어쩐지 회의장에서 그리 당당하게 행동하더라니.”
맹주 팽사혁은 황극린이 장로 회의실에서 보여 줬던 모습을 떠올린다.
다짜고짜 무력을 행사했다. 무림맹에 미련이 남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미 무림맹에 오기 전부터 금의위와 말을 맞춰 놓았을까? 황실이 사파와 정파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두 군사께서는 어찌했으면 좋겠소?”
총군사와 부군사가 시선을 마주한다.
오랜만에 두 사람은 의견을 일치시킨다.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면 바로잡을 좋은 방법이 있지요. 외부의 적을 치는 겁니다.”
“외부의 적이라……. 혈마교를 말하는 것이오?”
“예, 만뇌문은 당장 건드리기 힘듭니다. 거기다 혈마교의 움직임이 수상한 지금 굳이 만뇌문을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정파의 뜻이 하나로 모인다면 제아무리 황실의 비호를 받는다고 해도 그 의지를 감당하긴 힘들 겁니다. 자연스레 거대한 의지에 파묻히고 말겠지요.”
돌려 말했지만, 맹주는 군사들의 말을 이해했다.
그렇기에 분노했다.
“고작 뇌불과 만뇌문 때문에 정사대전이라도 일으키라는 것이오?”
팽사혁이 차가운 눈동자로 군사들을 노려본다.
그러자 두 군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당장 그것을 해결하려 하기보단 더 중요한 것을 신경 쓰는 것이 낫다는 말이지요. 지금 진짜 중요한 건 사흑련의 동태가 아니겠습니까?”
“두 군사의 의견은 알겠소. 그만 나가 보시오.”
“예.”
어차피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죽은 줄 알았던 무림공적이 다시금 등장했으니 각 문파의 장문인들과 육대세가의 가주들과도 회담을 가져야 한다.
‘그래, 간단하게 생각하자.’
무림공적.
분명 처단해야 할 적은 맞지만, 무림맹의 적은 언제나 사흑련이었다.
그들 전체가 무림공적이나 마찬가지. 진짜 적을 앞에 두고 만뇌문에 정신이 쏠린다면, 사악한 무리가 정파 무림을 공격할 것이다.
팽사혁이 마음의 정리를 마쳤을 때였다.
문밖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해월대사가 찾아왔습니다.”
“해월대사?”
왜인지 팽사혁은 그가 방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림사는 구파일련 중에서 만뇌문을 가장 적대시하는 문파 중 하나였으니까. 뭐, 그들이 익힌 무공의 원형이 소림의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으며, 지금은 소림사의 파계승이자 대마두였던 뇌불이 생존해 있다는 정보가 나왔지 않은가?
“오랜만이오.”
“예, 맹주님.”
무림맹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린다.
해월대사는 분명히 소림의 사대금강이기에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그런 고수는 발전이 더디다. 작은 벽을 넘는 데만 10년이 걸리기도 하고, 아예 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해월대사는 발전했다.
그의 눈동자엔 현기(玄氣)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깨달음을 얻으셨나 보군요.”
“예, 그 지옥에서 많은 것을 보았지요.”
공교롭게도 해월대사는 만뇌문의 진법 내에서 나온 후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한 차원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섰다.
어쩌면 화경의 경지와도 맞닿았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현 무림은 역대 무림 중에서도 고수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다. 좋지 않아.’
그렇기에 위험을 직감한다.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은 폭주하기 마련이었다.
“그래, 무슨 일 때문에 날 만나러 오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