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인연
“허허, 오랜만이구나, 골아! 오늘은 양하대곡(洋河大曲)이 마시고 싶군!”
양하대곡.
주액이 맑고 투명하며 뒷맛이 상쾌하다고 알려진 강소성의 명주. 당연히 가격이 몹시 비쌌다. 백성들은 구경조차 힘든 명주였지만, 일 년 만에 나타난 빡빡머리 사내는 대뜸 양하대곡이 마시고 싶다며 운을 떼었다.
“하하하… 아직 안 죽었나?”
“내가 죽을 것 같나?”
“그것참 아쉽군.”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진주언가의 가주가 한숨을 내쉰다. 누가 육대세가의 가주에게 찾아와서 술 요구를 하겠는가? 그렇기에 즐기기로 했다.
“껄껄! 오늘 잘 마셨네! 나중에 또 오지.”
“오지 마라.”
일 년 뒤.
또 그다음 해에도 빡빡머리는 질리지도 않고 찾아와 술을 요구했다. 와서 한 병만 마시는 것도 아니다. 술도 어찌나 센지, 밤을 새우도록 마시는 게 일상이었다.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다. 이런 사내와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걸 알면 가문의 장로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아니, 가문이 문제가 아니라, 무림맹에서 행동에 나설 것이다.
하지만 진주언가주 언치골은 빡빡머리 사내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가 언치골의 비밀을 알고 있긴 했지만, 이리저리 입방정을 떨 성격도 아니었고… 고작 비싼 술로 입막음을 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였다. 물론, 그 때문에 부인에게 매번 혼자서 술을 얼마나 마시는 거냐며 구박을 받긴 했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의 인연은 깊어졌다.
단순하게 말하면 술친구였지만, 언가주 언치골은 술김에 그에게 많은 비밀을 알려 줬다.
가장 심각한 비밀을 그가 알고 있으니, 다른 사소한 비밀 따위야 털어놓아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모든 사람은 각자의 비밀을 품고 살지만, 그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언치골에겐 행운이었다.
“파초선(芭蕉扇)을 얻었다네.”
“그거 제갈세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것 아닌가?”
“흥, 제갈가 놈들이 뭐가 이쁘다고? 내가 가져야지.”
“그것도 운철로 만들어졌다던가? 하늘에서 떨어진 철이라 그런지 신기하긴 하군. 한번 보여 다오.”
“자, 마음껏 구경하게. 부수지는 말고.”
빡빡이 사내.
그러니까 뇌불이라 불리는 대마두는 물욕이 없었다. 진주언가의 뿌리를 뒤흔들 비밀을 알고 있음에도, 술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는가?
“호오, 역시 운철인가? 신비한 기운이 깃들었군…….”
“팔면 작은 성채 하나는 지을 돈이 나올 걸세. 제갈가 놈들이 발작하는 이유가 있지.”
“그럼 오늘은 더 마셔야겠군?”
“마음대로 하게. 그리고 말일세. 최근에 그녀와 또 몰래 만났는데…….”
“오오, 진전이 있었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뇌불이 눈을 반짝이고.
뇌불은 원 없이 술을 마시는 가운데 언가의 가주 언치골은 모든 비밀을 토해 낸다. 부인에게도, 자식에게도, 심지어 죽은 아버지의 묘(墓) 앞에서도 고백하지 못할 이야기를 털어 낸다.
다음 날 술이 깨면 조금 후회하긴 했지만, 어떤가?
뇌불이 무림맹에 잡혀 죄를 지우고자 폭로전을 펼치지만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뇌불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해서인지 최근에는 사고를 치고 있지 않으니, 평생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의 인연은 영원할 것 같았지만.
뇌불은 어느 순간부터 찾아오지 않았다.
뇌불이 죽었다는 소문.
장보도를 남기고 비동에 머문다는 소문.
그리고 소림사에 잡혀 참회동에 갇혀 있다는 소문.
그런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언치골은 긴장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누군가에게 언가의 비밀을, 아니 언치골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을까? 매번 찾아올 때는 그런 걱정이 들지 않았지만, 그가 없어지고 나니 걱정이 치밀었다.
그런 걱정이 모두 사라진 건 뇌불이 실종되고 10년이 지났을 때였다.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다.
시원섭섭했다.
언가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사내였으니, 살아 있다면 후환이 됐을 가능성이 컸다. 비밀을 터놓을 사람이 없어졌다는 건 아쉬웠지만… 언가의 미래를 위해선 그의 존재가 사라지는 게 옳은 일이었다. 이제 그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목소리를 다시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클클, 오랜만이로구나! 골아!”
눈이 번쩍 뜨인다.
버릇없고 오만한 후배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황성에서 쫓아낼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낮은 자리를 주고 만뇌문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언치골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었다.
용성의 성주? 만뇌문에게 어떤 자리를 주느냐?
그딴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네, 네, 네, 네놈!?”
이제는 가주가 아닌 전대 가주, 그럴듯한 이름으로는 태상가주라 불리는 언치골.
본래 대가문의 태상가주들은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보통이었지만, 언치골은 용성의 기회로 새로운 활로를 열고자 아직도 활발하게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언치골이 발작하듯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리친다.
언교연은 당황하며 새로이 등장한 노인과 언치골을 번갈아 바라본다.
‘대체 누구지?’
과거 막대한 내공으로 젊음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뇌불의 외모는 노화했다. 지금도 40대의 외모를 유지하는 언치골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언치골 못지않게 흉흉했다.
“만뇌문의 문주님이오.”
“뭐, 뭐라?”
황극린의 말에 언치골이 황극린을 노려본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만뇌문의 성장은 말이 안 된다. 거기다 죽은 줄 알았던 뇌불이 살아 있다. 황극린이 혈풍뇌전신공을 익혔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래, 내가 문주다. 골아, 오랜만에 술 한잔해야지?”
“술……?”
이 상황에서도 술을 찾는다고?
언치골은 멍한 눈으로 입을 벌렸다.
그의 손녀 언교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자꾸만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그녀의 상상력으론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살아 있었구나.”
“내가 죽을 것 같나?”
문득 과거에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온갖 상념이 뇌리를 지배했다. 당장 죽여야 하나? 어떻게 입막음을 하지?
과거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언치골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것참 아쉽군.”
술로 그의 입을 막을 수 있다면.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뇌불은 과거의 뇌불이 아니다.
그는 술 말고 다른 것도 원하고 있었다.
“참, 파초… 뭐시기는 잘 가지고 있나?”
“커륵!”
너무 놀라 혀를 깨물어 버린 언치골.
언교연 또한 멍하니 태상가주를 바라본다. 천하의 태상가주를 이렇게 당황시키는 사람이 있나? 현 언가주와 장로들이 모두 몰려가서 압박해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런 사내가… 만뇌문의 문주라는 노인의 기세에 밀리고 있었다.
“무, 무슨 개소리냐!”
“으음, 개소리? 오랜만에 보니 입이 거칠어졌구나.”
뇌불이 정색하자 언치골이 더 당황한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참, 맞다. 그분은 잘 지내고 있는…….”
“으억! 교연아, 일단 나가 있거라. 오랜만에 친우를 보니 너무 반갑구나! 술을 한잔 기울이며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구나! 응? 착하지?”
“네? 아, 네… 네에?”
언교연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황극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언교연에게 말한다.
“잠시 나갑시다.”
“네, 황 장로님…….”
언교연과 황극린이 밖으로 나선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언치골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
“이미 극린이가 다 말했지 않나?”
뇌불이 소매 속에서 술을 꺼낸다.
변함없이 술을 밝히는 그 모습에 언치골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는다.
“부성주?”
“그래. 요즘 우리 문파를 노리는 놈들이 많아서, 그런 자리라도 하나 차지해야 할 것 같다.”
우리 문파라는 말에 언치골이 묘한 눈빛을 보낸다.
“자네가 그런 말을 다 하는구나.”
“사람은 변하니까. 자, 한잔 받게.”
타들어 가는 속을 뜨거운 술로 달랜다.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내지 않고 연거푸 다섯 잔을 마시니 아주 약간 취기가 올라온다.
“…협박인가.”
“협박은 아니지. 난 네놈이 좋거든. 솔직히 비밀을 떠벌릴 생각도 없고 말이야.”
“부성주의 자리를 줄 수 없다고 해도 말인가?”
“친우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뇌불의 눈빛을 본 언치골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제기랄…….”
“보타문의 장문인은 걍 그럴듯한 직위를 만들어 주면 되지 않나?”
보타문의 장문인은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물론, 언가의 여력을 총동원한다면 보타문이야 찍어 누를 수도 있겠지만, 그리 쉽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눈치챈 걸까? 뇌불이 피식 웃는다.
“보타문의 장문인이 쉬운 상대일까, 아니면 내가 쉬울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언교연을 황급히 내보낸 것이다.
“하아, 내가 왜 너에게 비밀을 다 털어놓았을까.”
“자네도 즐기지 않았나? 나와 이야기할 땐 절로 웃음이 난다지 않았나?”
“그건… 그랬었지.”
언치골이 손을 휘젓는다.
공중에 떠오른 술병이 홀로 기울어져 뇌불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클클, 허공섭물이라……. 꽤 실력이 늘었구나?”
“허, 원래 자네보다는 내가 더 강했지 않나?”
“그래? 한판 붙어 볼까?”
“…됐다.”
언치골의 성격을 알고 있다.
그는 이미 계산을 끝내 놓았을 것이다. 뇌불을 적대하는 것보다는 보타문을 누르는 게 이익이라는 생각을 마쳤으리라. 실제로 언치골은 만뇌문의 평가 등급을 오대세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뇌불과 황극린.
화경의 고수가 둘이나 있다. 뇌불이 비밀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전력이라면 단일 문파로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다. 문도의 숫자가 적다곤 하지만 괴이한 진법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만뇌문과 싸우려면 큰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잘되고 있나? 들어 보니 그녀는 잘 살아 있다던데.”
“그래, 아주 잘 살고 있네.”
오랜만에 뇌불을 보고 있으니 언치골의 입이 근질거린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던 각오를 다졌지만, 뇌불 앞에서는 그 각오가 무너진다. 이미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친구가 아닌가?
“말해 보게, 나도 비밀 하나를 말해 줄 터이니.”
“자네도 말인가?”
확실히 뇌불은 달라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현기(玄機)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수행을 통해 기세를 변화시킨 건가. 체구는 좀 작아졌어도 다른 방면으로 발전한 듯하다.
언치골이 고개를 끄덕인다.
용성에 대한 계획을 전면 수정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자네부터 말하게.”
“클클, 놀라지나 말게.”
뇌불이 왜인지 음흉한 표정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 * *
“참, 야린은 어딨나요?”
“…….”
황극린은 언교연을 데리고 만뇌문 내부를 구경시켜 주었다. 언교연은 과거 생에서 그를 뒤쫓는 무림맹의 척살대였지만, 지금은 용봉지회에서 인연을 쌓았다. 그리고 당시에 같이 인연을 쌓았던 이가 있었다.
‘두야랑.’
만독문의 공녀.
용봉지회에 참가할 당시 그녀는 두야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야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만뇌문의 소속으로 숨겨서 말이다.
“지금은 여기 없소.”
두야랑에 대한 것을 모두 이야기할 순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차마 묻지 못하고 있던 것.
대체 만뇌문의 문주는 누구인가? 누구길래 천하의 진주언가의 태상가주가 저리도 당황한단 말인가? 그녀의 의문을 눈치챈 듯 황극린이 입을 연다.
“황악. 문주의 이름이오.”
“황악이요?”
언교연이 용을 쓰고 이름과 관련된 무인들을 떠올린다. 황씨 성을 가진 무인 중에서 유명했던 이가 있던가. 간간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육대세가 태상가주와 동일 선상에 놓을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황악이라는 이름은 뇌불이 최근에 새로 만든 것이었으니.
“아, 황 대협이셨군요…….”
언교연은 자신이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얼굴에는 죄송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뇌불(雷佛).”
“네?”
무슨 소린지 잠시 이해하지 못한 언교연의 눈썹이 휜다.
뇌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런 별호를 가진 사람은… 설마?
“뇌불이요? 뇌불이라면…….”
“언 소저가 생각한 사람이 맞소.”
“잠시만요, 무림공적으로 지정됐던 마… 아니, 무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소.”
“……!”
만뇌문의 비밀.
혈풍뇌전신공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이미 무림에 큰 소란이 일었다. 용봉지회가 끝나 가문으로 돌아갔던 연교연도 그 소식을 들었었다. 하지만 과거 마두가 남긴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황극린에게 배신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무공에 무슨 죄가 있으랴? 무공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였다.
황극린은 혈풍뇌전신공을 익혔더라도 마두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용봉지회에서 보여 줬던 압도적인 무력.
그리고 온갖 의혹에도 불구하고 남궁세가의 남궁운혜를 구해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만뇌문의 문주가 뇌불이라면?
무림공적으로 지정됐던 대마두의 제자가 황극린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언교연이었지만.
그녀는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태상가주께서 그렇게 당황하셨던 거예요.”
그녀도 눈치가 있었다.
태상가주는 뇌불과 과거 친분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어쩌면 약점을 잡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언교연은 황극린이 뇌불의 제자라고 해도 몰아세울 명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만뇌문과 언가는 한배를 타게 되겠군요.”
“그럴지도 모르겠소.”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황극린과의 인연은 그녀에게 소중하다.
장로들이 원하는 것과 같이 남녀지간의 연정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무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쟁취하고 싶었다. 무인 대 무인으로서 당당하게 말이다.
“나도 잘 부탁하오.”
황극린과 언교연이 서로의 의중을 알아채고 눈빛을 교환한다.
황극린으로서도 언교연은 좋은 인연이었다. 용봉지회에서 보았던 그녀의 재능. 언교연은 황극린과 같이 용봉지회의 우승자 출신이었다.
그때.
“장로님, 안녕하십니까. 손님이 오셨… 어… 너는?”
마침 영초를 바리바리 싸 들고 지나가던 성수신의가 언교연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장 의원님……?”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성수신의가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던 체질 변화 연구. 그중에서도 성공 사례는 존재하긴 했다. 눈앞의 언교연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