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언치골
“처음 뵙겠습니다. 만뇌문의 구자광입니다.”
구자광이 진주언가의 손님을 맞이했다. 진주언가의 태상가주 언치골은 그를 보고 갸우뚱하더니 피식 웃는다.
‘황 장로가 나올 줄 알았더니.’
이쪽은 진주언가의 가주도 아니고 태상가주가 직접 만뇌문을 방문했다.
급을 맞추려면 문주는 아니더라도 장로급은 나와야 하지 않은가? 뭐, 구자광의 직급이 장로일 수도 있었지만, 언치골 입장에선 백대고수의 반열에 들어가는 구자광도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감정이 흔들릴 사내는 아니었다.
“반갑네. 그럼 안내를 부탁하겠네.”
“예.”
구자광이 진법 안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언치골과 언교연이 따랐다.
공간 자체를 왜곡하는 진법. 아니, 새로운 공간 자체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부에 진입하니 온갖 음울한 기운들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언교연은 이러한 진법에 진입한 것이 처음인지 당황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본다.
“이거… 예상보다 훨씬 대단하군.”
지금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만 떠 있었다.
듣기로는 소림의 해월대사가 세 개의 태양을 보았다고 했던가?
“조심하셔야 합니다. 적의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제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셔야 진이 반응하지 않을 겁니다.”
구자광은 진법의 생문(生門)을 기억하고 있으며, 진의 열쇠를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의 공격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르다. 만뇌문을 지키는 진은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처럼 움직이고 공명하며 적을 말살하려 한다. 물론, 진주언가의 태상가주쯤 정도 되는 인물이면 홀로 진을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쉽진 않으리라.
일부러 만뇌문을 도발할 필요는 없었기에 언치골은 구자광의 말을 따라 그의 뒤를 바짝 뒤따랐다. 그런 와중에도 진 내부를 구경하는 걸 멈추진 않았다.
‘음양오행의 기운을 모두 품고 있다. 시시각각 날씨가 바뀌고 있군.’
진법이란 보통 현실과는 정반대의 현상을 품기 마련이었다.
메마른 땅에서는 수분이 가득한 공간이 만들어지며, 양기가 가득한 곳에선 음기의 폭풍이 사방을 덮쳐 오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게 언치골이 알고 있는 진법의 기초였지만, 만뇌문의 진법은 그 상식을 모조리 깨부쉈다.
‘배교랑 관련이 있다는 말은 거짓은 아닌가.’
만뇌문은 의심이 가는 문파였다.
배교나 다른 사흑련의 문파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황실은 그런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용성의 힘을 키우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으며, 진주언가나 다른 정파 문파를 섭외하며 중심을 잡으려 했다.
언치골은 이번 만남에서 모든 것을 정리할 생각이다.
‘황실과 정파 무림은 다르지.’
그렇지만 용성에서 진주언가의 자리를 위협한다면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언치골은 진법 내부를 관찰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을 통과하는 데 시간은 무려 한 시진이나 소모되었다.
구자광 혼자 열쇠를 들고 이동한다면 이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었지만, 손님을 안내해야 했기에 이동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진에서 빠져나가자 언교연이 거친 숨을 내뱉는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아…….”
“괜찮으냐?”
“예, 태상가… 주님.”
둘이 있을 때만 할부지라 부르라고 했다. 그렇기에 태상가주라 부르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순간 마주한 태상가주의 눈빛이 살벌하여 언교연이 당황했다. 언치골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
언교연을 짓누르던 진법의 악의가 사라진다.
태상가주가 장난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손녀를 놀리진 않았다
“가자꾸나.”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진법을 빠져나온 후의 내부는 또 달랐다.
마치 잘 다듬어진 동굴 같은 느낌의 벽면. 하지만 단순한 동굴 같은 느낌은 아니다. 군데군데 야명주가 공간을 비추고 있었으며, 희귀한 식물들이 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언치골은 기감을 넓혀 이 장소가 얼마나 넓은지 확인했다.
‘거의 본가의 장원 수준으로 넓구나.’
대체 어떻게 청성산의 지하에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까?
만뇌문이 만들진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치골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실에서도 만뇌문에 대한 정보를 많이 수집하길 원한다. 황실의 금의위도 만뇌문을 모두 파악한 게 아니다.
“장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군.”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방 안에 돌로 만들어진 탁상, 그 주위에 의자들이 널려 있었다. 아마 회의실로 사용하는 장소인 듯하다.
“어서 오십시오, 태상가주님.”
“그 유명한 황 장로로군. 반갑네.”
두 사람이 시선을 교차한다.
알게 모르게 서로의 기세를 확인한다. 언치골은 황극린의 기세에 살짝 놀랐다. 소문으로 듣기만 했을 뿐,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손녀인 언교연보다 어린 나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일문의 장문인이 가질 법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틈이 보이지 않는군.’
지금 태상가주와 황극린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당연히 태상가주는 자신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긴 했다.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사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 장로님.”
언교연 또한 황극린에게 인사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반갑소, 언 소저.”
용봉지회에서 언교연과의 기억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두야랑과 꽤 가깝게 지냈으며 황극린이 창천뇌검에게 오해받았을 때도 언교연은 그를 믿어 주었었다. 물론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언교연은 몇몇 정파인들처럼 약삭빠르게 제 이득을 챙기려는 무인은 아니었다. 뭐, 시간이 지나 성격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앉으십시오.”
탁상 위에는 은은하게 코를 자극하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좋은 차로군.”
언치골이 차의 향을 맡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명문가라 불리는 곳에선 보통 차를 즐긴다. 얼마나 고급스러운 찻잎을 쓰느냐로 상대에 대한 대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만뇌문은 예의를 아는 듯하다. 언교연도 살짝 감탄하며 차를 홀짝였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그래, 우리가 방문한 이유는 알고 있을 테지.”
“예.”
용성주가 방문한 이유. 지금 용성은 총 열 개의 문파와 가문이 가입한 상태. 진주언가가 아니더라도 꽤 거대한 세력을 가진 이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애초에 어중이떠중이들은 전혀 영입하지 않았었다.
그런 문파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게 만뇌문과 진주언가였다.
대부분 초대 용성주는 언치골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고, 사실 황실도 그들을 밀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실에선 아직 언치골에게 ‘임시 용성주’라는 자리만 내려 줬을 뿐이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용성에선 최고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용성의 일원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태상가주의 몫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는 용성주의 자리에 출마할 생각이 있는가.”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제껏 강렬한 눈빛으로 황극린의 몸을 훑어보던 언치골의 시선이 부드러워진다.
“그런가?”
“예.”
황극린은 용성주의 자리를 노리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그는 만뇌문 하나만 생각해도 버거웠다. 거기다 외부적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 늘어나 있었다. 그가 용성에 입성하려는 이유는 울타리에 들어가 상대해야 할 적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다행이로군. 자네가 만약 용성주의 자리를 노렸다면 곤란해졌을 것이라네.”
누가 곤란해질 것이라는 건지 정확히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만뇌문을 말하는 거겠지.
일단 황극린의 의견을 알았다. 무조건 그들을 적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태상가주는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용성주는 압도적인 위엄으로 용성을 이끌어야 한다. 무림맹과 사흑련을 견제하는 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선 적당한 친목 단체로 남을 수는 없었다.
“읽어 보게. 임시로 만든 용성의 규칙들일세.”
언교연이 조심스럽게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진주언가를 중심으로 하여 용성의 편제가 모두 작성되어 있었다.
“만뇌문이 배정받은 건 용성의 스무 명의 장로 중 한 자리로군요.”
“그래, 그 정도 자리로 만족하도록 하게. 어차피 만뇌문은 제대로 된 전투대를 구성할 인원이 부족하지 않은가?”
네가 아무리 강해 봤자.
전체의 전력으로 따지면 만뇌문은 대문파의 벽을 넘지 못한다.
두 손으로 모두 헤아릴 수 있는 문도의 숫자. 구파일련에 속한 대문파는 장로의 숫자만 해도 만뇌문도들보다 훨씬 많았다. 만뇌문이 장로 자리 하나를 받은 것도 황극린을 염두에 둔 선택일 것이다. 물론, 황극린은 용성이라는 세력을 차지할 생각이 없었다.
하나.
“부성주의 지위를 받고 싶군요.”
“허허. 자네, 자만이 과한 것 아닌가?”
강인한 기세가 황극린을 향해 집약된다.
“자네가 강한 것은 알고 있다네. 하나, 만뇌문이 처한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닐 테지.”
“알고 있습니다.”
“정말 알고 있는 것 맞나? 소림이 만뇌문을 노리고 있다네. 그들은 황실과도 긴밀한 연을 맺고 있지. 또한, 천화련주와 소통하는 건 소림이 거의 유일하다네. 그들이 만뇌문을 노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알고 있는가? 자네가 그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성을 택했다는 건 용성의 간부가 될 이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네.”
태상가주는 무림맹주라는 직책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리를 원했다.
진주언가는 분명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였지만, 중원 전체로 따지면 만족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그것을 채워 줄 수단이 용성이다.
진주언가는 이미 대부분의 문파와 협의하여 자리를 정했다. 현 부성주로 내정된 이는 보타문의 장문인 검후신제(劍侯神帝)였다. 여러모로 황극린보다 명성이 높으면 높았지 절대 낮은 무인은 아니었다.
거기다 황실이 무조건 황극린을 영입하려고 했던 것과 달리, 진주언가에선 만뇌문에게 쩔쩔매며 그들을 대우해 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런 말을 듣고도 여유가 넘쳤다.
마치 부성주의 지위는 자신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태도. 언치골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장로라면 언제든 잘라 낼 수 있지만, 초대 부성주는… 쉽게 내칠 수 없지.’
황실은 용성이라는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 오래도록 준비했다.
용성주의 임기는 대마다 5년. 임기를 다 채우면 다시 후보로 등록할 수 있으며 장로들의 투표로 연임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한번 임기가 시작되면 황실을 적대하지 않는 이상, 용성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는 이상 직위에서 물러나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장로는 다르다.
무림맹이 강력하게 요구하면 용성이 만뇌문을 던져 줄 가능성이 있었다. 황극린은 황실과 용성을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리 행동하는 것일 테다.
“부성주의 자리에는 이미 검후신제가 내정되어 있다네. 자네가 그녀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건가. 배분으로 따지나 무림에서의 영향력으로 따지나 그녀가 알맞은 자리라네. 부성주를 노린다면 5년 뒤에 도전해 보길 바라네.”
“부성주의 자리를 저희가 가지더라도 성주님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지금 그걸 걱정하는 줄 아는가? 말했지 않나? 자네가 최근 명성을 떨치긴 했지만 검후신제에겐 밀린다고 말일세.”
“제 배분이 문제라는 이야기군요.”
“당연한 일 아닌가? 자네는 내 옆에 있는 손녀와 같은 배분이라네. 자네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네. 오히려 자네는 언젠가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가 될 테지. 하나, 황실이 주도하여 만든 용성의 부성주라는 자리는 결코 가볍지 않다네.”
용성주의 말도 일견 일리가 있었다.
황극린은 무공이 고강하긴 하지만 검후신제에 비해서는 한없이 부족했다.
“그러고 보니 장로의 자리에 사파 문파 출신도 있군요.”
갑자기 황극린이 말을 돌린다.
의아한 눈빛으로 언치골이 황극린을 응시한다.
“황실에선 정파와 사파의 구분을 두고 있지 않지. 나도 황실의 뜻을 존중할 생각이라네.”
황극린은 용성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은 창대하게 시작했지만, 무림맹과 사흑련을 넘을 세력으로는 절대 성장하지 못한다. 지금 황극린에게 필요한 건 용성이라는 이름값. 향후 몇 년간은 용성의 이름값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 부성주의 자리만 차지한다면 용성을 만뇌문의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고.
물론, 성주의 자리를 차지하면 더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네, 욕심이 많군. 자네가 지금 만뇌문의 대소사를 모두 처리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부성주의 자리를 맡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난 아니라고 보네. 이런 일에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야 한다네.”
“제가 할 생각은 아닙니다만.”
“음……?”
언치골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고 보니 황극린은 만뇌문의 장로였다. 만뇌문의 문주는 아직 중원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이름은 알고 있다.
‘황악이라 했던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짝짝짝!
손뼉 치는 소리가 동굴에 울린다.
‘만뇌문의 문주? 내가 처음 보는 것인가?’
살짝 긴장한 언치골이 입구를 바라본다.
조금씩 드러나는 그림자.
“클클, 오랜만이로구나! 골아!”
“……!”
언치골을 골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현 무림을 뒤져도 별로 없었다. 그는 진주언가라는 대가문의, 가주도 아닌 태상가주였다. 거기다 이제는 용성주의 자리에 올라 무림맹주급의 명성을 가질 무인이었다.
그런데…….
‘잠시만, 이 목소리는 설마? 설마 아니겠지?’
언치골의 등줄기에 주르륵 땀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