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89화 (189/316)

189화 한 방울

간단한 의문이었다.

뇌불이 저리 반응하는 거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존재했다. 혈풍뇌전신공을 처음 익히던 당시 뇌불은 말했다. 혈풍뇌전신공은 소림의 절학 대반야금강공을 기초로 하여 북해빙궁의 빙백마소(氷魄魔笑)와 유령의 무공인 유령몽(幽靈夢)의 묘리를 담았다고 했다.

그 말을 황극린은 기억하고 있다.

뇌불은 언젠가 북해에 가 본 적이 있으리라. 그렇기에 빙백마소의 묘리를 담아낼 수 있었겠지. 서로의 무공을 견식한 사이라면 꽤 가까웠을 가능성이 컸다.

황극린의 물음에 뇌불이 당황하는 듯했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한때는 꽤 친한 사이였지.”

뇌불은 과거를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기억을 거의 다 되찾았다고 했다.

“그렇군. 아무튼, 난 빙백마후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소.”

“왜? 거기 아이들은 하나같이 미색이 빼어나지 않으냐. 그리고…….”

“그리고?”

“큼큼, 아니다.”

뇌불은 황극린과 더 가까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의 말대로 뇌불은 빙백마후와 딱 하루 동침했던 적이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 하루의 동침으로 아이를 낳았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빙궁의 부궁주라면? 황극린이 그녀와 혼인하게 되면 뇌불은 그의 장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진짜 가족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뇌불은 과거처럼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있지 않았다.

‘한 번 같이 동침하고 떠났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장인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지.’

물론, 사정은 있다.

북해빙궁에선 ‘아버지’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북해에서는 사내들을 납치하고, 단물이 빠지면 버린다. 뇌불은 그런 모습을 보고 북해빙궁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빙백마후와 심하게 싸웠다. 당시 그녀는 빙궁주가 아닌 부궁주의 신분이었지만… 그녀가 방출한 빙백마소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정말 미친년처럼 달려들었지.’

몸을 부르르 떨던 뇌불이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당연히 거절할 것이오.”

“그 미친년이 발광하면 골치 아플 텐데…….”

빙백마후의 성격은 잘 알고 있었다.

하룻밤 동침했다고 하여 뇌불은 그녀에게 정을 품었었지만, 빙백마후는 주저하지 않고 살수를 펼쳤다. 뇌불 또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죽일 생각은 없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잔혹해졌으리라. 한 문파의 문주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그러니 문주가 더 강해져야 하오.”

“그래야겠군.”

뇌불은 황극린이 보여 준 ‘뇌전’에서 희망을 보았다.

“중원 곳곳에 영약을 숨겨 뒀다더니 그건 찾았소?”

황극린의 질문에 뇌불이 씨익 미소를 머금는다.

“그래, 사천성에도 하나 있다. 원래라면 복귀할 때 가져오려 했는데, 천화련 놈들 때문에 들르지 못했구나. 가져와서 주마.”

“아니오. 그건 문주가 취하시오.”

“내가?”

“그림자와 소림사에 복수해야 하지 않겠소?”

뇌불이 비동에 들어간 이유.

그것은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 전투에서 입은 내상을 치료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야지. 알겠다. 그건 내가 취하도록 하마. 몸이 늙어 버려 과거의 무위를 되찾긴 힘들겠지만… 네가 보여 준 그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이제는 힘보다는 요령으로 싸워야 할 때인 것 같군.”

“훈련은 진법 내에서 하면 진전이 빠를 것이오.”

“진법? 아, 거기 말이더냐.”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진법을 겪지 못한 뇌불이다.

세 개의 태양이 떠오르면 그도 버티기가 쉽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적응한다면 바깥에서 더 강한 무공을 펼칠 수 있다.

뇌불은 사대금강과 십팔나한이 그곳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떠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박장대소하며 눈물마저 찔끔 흘렸다.

“그래서? 해월 그 새끼는 어떻게 됐느냐?”

“복수의 칼을 갈고 있겠지.”

“그놈은 정말 음흉한 놈이다. 내 앞에서는 착한 척 미소를 머금었지만, 언제든 등에 칼침 놓을 준비를 했던 놈이지. 아마 유령이 그 자리에 나타났던 것도 그놈의 계략일 거다.”

뇌불은 유령과의 정면 승부에서 한계를 느끼고 비동으로 갔었다.

어쩌면 해월대사는 유령이 뇌불을 죽여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뇌불이 죽었던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면상에 주먹을 날려 주려면 얼른 회복해야겠군.”

“그러도록 하시오. 몸이 회복되면 날 부르시오.”

“알겠다.”

뇌불이 가부좌를 틀고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한다. 황극린에겐 참으로 익숙한 기운이 뇌불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 같은 무공을 익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 *

천화련의 대공자는 소림사로 향하지 않았다.

이미 해월대사가 천화련으로 가서 련주와 회담을 가졌으리라. 그렇기에 그는 소림사에 방문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엔 소림사로 가서 대제자인 천덕이 자신의 친우가 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를 만난 이후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황극린을 대체할 수 없다.’

대문파의 장문인이면 모를까.

또래에겐 밀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황극린에겐 처참하게 패배했다. 마지막 순간 황극린이 보여 줬던 움직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자신과 같은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나 태어난 인간이 분명했다.

대공자 계빈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뺏겼지만.’

패배의 순간.

계빈은 바닥에 고였던 황극린의 피를 뭉쳐 인위적인 영약을 만들었다. 그 구슬을 취했다면 아마 신선한 피 맛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그건 빌어먹을 거미에게 빼앗겼다. 그렇다고 황극린이 키우는 아이를 잡아 족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거의 포기했는데, 그림자가 가진 검에는 그의 피가 남아 있었다.

이미 굳어 있었지만… 그래도 어떤 맛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

계빈이 조심스레 황극린의 피만 떼어 낸다. 처음 만들었던 혈구슬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지만, 이게 어딘가? 적혈강의 기운을 이용하여 굳은 피를 녹여 냈다. 그리고 몇 번의 정제를 거쳐 순수한 피 한 방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딱 한 방울.

그리 기대되진 않았다. 애초에 한 방울로는 계빈의 입맛을 돋우는 것도 할 수 없으리라. 그래도 그가 어떤 맛을 지녔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조심스레 한 방울의 피를 혀에 가져다 댄다.

“……!”

그 순간, 계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손가락을 떼어 낸다.

이미 정제된 피 한 방울은 사라졌다. 이미 계빈은 그것을 모두 취해 버렸다.

“허……!”

그 어떤 피를 취하더라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

친우로 인정한 황극린의 피를 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피가 특별하기 때문일까?

왜인지 몸을 짓누르던 천형의 기운이 아주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아쉽구나. 너무도 아쉬워.”

그런 상황이니 혈구슬을 빼앗긴 게 너무 타격이 컸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분명히 기회는 온다.

계빈에게 중요한 건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거다.

“다시 만날 땐,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도록 하마. 그땐… 네 피를 더 마실 수 있겠지.”

계빈이 미소를 머금었다.

마땅한 목표 없이 살아왔던 그에게 확고한 목표가 생겼다.

* * *

용성.

황실에선 무림맹을 견제하기 위한 금의위라는 조직을 만들어 꽤 오랜 기간 키워 왔다. 막대한 황금의 힘으로 키운 금의위는 구파일련에 속한 대문파의 힘과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당연히 그 정도로 황실은 만족하지 못했다.

금의위만으로는 무림의 판도를 바꾼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황실에선 용성이라는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정파의 무림맹과 같이 황실의 아래에 중원의 문파를 모을 생각이었다.

그 첫 번째 조각이 바로 진주언가였다.

진주언가는 예로부터 북경에 자리 잡은 명문가로서 많은 무관(武官)을 배출해 냈으며, 무림 육대세가 중 하나였다. 그들은 천천히 무림맹에서 발을 빼고 이제는 새로운 조직 용성의 발전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변화의 바람에서 가장 앞에 올라탄 이들은 가장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진주언가는 무림맹보다 황실을 선택했다.

당연히 용성의 성주는 진주언가의 사람이 차지할 것이라는 여론이 대세였다. 진주언가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지만, 만뇌문이 용성에 가입한다는 소문이 도니 진주언가로서도 조금 불안했다. 최근 만뇌문의 행보를 보면 용성주 자리를 내놓으라고 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진주언가는 용성 내부에서의 기득권을 확실히 다잡기 위해서 직접 만뇌문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무림맹에서 여러 공격을 받으며 압박을 받았다. 무림맹은 만뇌문을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그들은 선택을 완료했다.

같은 배를 타게 된 입장이지만 누가 위인지는 확실히 가려야 했다.

진주언가는 용성을 기틀로 하여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의 자리에 올라서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진주언가에서 용성주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중강현엔 정말 오랜만에 오는군. 허허.”

백발이 가득한 노인.

하지만 흉흉한 눈빛과 살아 움직이는 목의 근육을 보면 절대 노인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젊은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거구의 노인이 서 있으니 감히 그에게 시선을 던지는 이들은 없었다. 딱 봐도 무림인인 게 티가 나는 노인이었다.

“할아버지, 바로 청성산으로 가실 거예요?”

노인에 비해서는 한없이 왜소한 체격의 여인이 말한다. 만약 그들이 속한 가문에서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었다면 난리가 났으리라. 노인의 정체는 진주언가의 태상가주 언치골이었다. 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명문가였기에 허물없이 할아버지라 부르는 건, 옳지 않다고 교육한다.

진주언가주 언치골이 그러한 아이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다.

여인이 흠칫한다.

“할부지라 부르라니까.”

“…그건.”

“어허.”

위엄이 깃든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여인이 하아, 한숨을 내쉬고 겨우 입을 연다.

“하, 할부… 지.”

“껄껄, 그래. 네 나이 땐 다 혀 짧은 소리를 내곤 하는 거란다.”

감히 진주언가의 태상가주 언치골에게 할부지라 부른 여인의 이름은 언교연. 은봉(銀鳳)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으며, 오봉에 속한 무인 중 하나였다. 그녀는 과거 이름 모를 신의(神醫)의 도움으로,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힘으로는 하북팽가의 대공자 팽여해보다 더 강한 여인이었다.

무뚝뚝한 성격으로 그 누구에게도 애교를 부리진 않았지만, 진주언가의 태상가주 앞에서는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손녀라면 할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리고 친하게 지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상가주는 마냥 편한 존재는 아니었다.

‘선을 넘으면 분명히 혼나겠지.’

할부지라 부르라고 하면서도, 정작 할부지 취급을 하면 시선이 달라진다.

그 경계가 애매하기에 언교연은 항시 긴장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태상가주의 시험일지도 모른다.

‘하아, 황 공자를 오랜만에 보는 건 반갑지만… 얼른 끝내고 돌아가고 싶네.’

언교연과 황극린이 용봉지회에서 인연이 있었다는 이유로 태상가주의 일정의 안내자로 결정되었다. 그것뿐 아니라 언가의 장로들 사이에선 언교연과 황극린이 이어지면 좋지 않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그러한 생각들이 언교연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의 목표는 언젠가 태상가주가 되는 것.

황극린이 싫다는 건 아니다. 그는 배울 점이 많은 무인이다. 하지만 그의 휘광을 등에 업고 자신의 영락을 추구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황 공자님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유혹하면 넘어온다?

그리 생각하는 늙은이들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북해빙궁도 이상한 제안을 해서 만뇌문은 무림맹에서 몰매를 맞았었다. 언교연은 늙은이들의 장난질에 어울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현재 그녀의 걱정은.

‘부디, 태상가주님과 싸우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생각에 잠긴 언교연의 어깨를 툭 치는 언치골.

“왜 그리 긴장하느냐?”

“네? 아뇨. 긴장은요.”

“걱정하지 말아라. 그 천방지축 꼬맹이는 이 할부지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할 것이니까. 가자.”

그들은 바로 청성산으로 향했다.

진주언가의 임시 용성주가 된 태상가주 언치골. 그는 만뇌문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그리고 용성에 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만뇌문이 있는 청성산까지 왔다. 그 외에도 소림사의 해월대사가 도저히 뚫지 못하고 도망친 진법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려는 이유도 있다.

이유를 나열하라면 수없이 많았지만.

진주언가의 태상가주는 황극린이라는 후배에게 중원이 얼마나 넓은지 보여 줄 것이다.

그런 생각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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