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88화 (188/316)

188화 돌아오다

약속한 날이 되었다.

천화련은 대공자의 서신과 그림자가 사로잡혔다는 서신을 받고, 인질 교환에 합의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객관적으로 천화련이 작심하고 만뇌문을 멸문하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공자와 그림자를 희생할 수도 있었기에 천화련은 뇌불을 내어 주기로 했다.

“일어나시오.”

스산한 음색이 깃든 목소리.

팔이 묶이고, 점혈로 내공까지 제한당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뇌불이었다. 홀쭉한 볼에, 왜인지 어깨가 축 처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만약 운신의 제약만 없었더라면, 뇌불은 자신을 감시하는 무인을 때려 죽었을 것이다. 그처럼 광포한 눈빛이었다.

“여긴, 어디냐.”

간결한 물음에 천화련 염왕대(炎王隊) 대주 계충산이 답한다.

“당신을 원하는 곳이 있더군.”

“날 원한다?”

뇌불이 인상을 찌푸린다. 눈을 가리고 있었던 터라 하늘에서 쬐이는 햇볕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천화련의 지하 뇌옥, 소위 목장이라 불리는 곳은 그리 불쾌한 환경은 아니었었다. 오히려 생활 환경으로만 따지자면 편하게 생활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바깥이 좋았다.

온갖 자연물이 만들어 내는 청명한 냄새에 뇌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기억을 더듬던 뇌불의 눈동자가 점점 커진다.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청성산?”

“맞소.”

뇌불은 생각에 빠졌다.

‘극린이 놈이 내가 납치된 걸 알았단 말인가? 어떻게?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화련에서 함부로 내어 줄 리가 없는데?’

당연한 일이다.

천화련의 비밀을 아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놈’은 뇌불에게 평생 목장에 갇혀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의 ‘피’는 천화련으로서도 귀한 것이었으니까.

뇌불은 여기까지 오면서도,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설마 황극린이 모든 것을 밝힌 건가?

그렇다면 만뇌문은 무림공적이 될 수도…….

순간, 뇌불의 가슴이 답답해진다.

차라리 자신을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동굴에서도 황극린은 언제든 뇌불을 죽일 수 있었다. 그때, 뇌불 또한 힘을 회복하면 황극린을 죽이려고 했었다. 그러니, 그때처럼 인연을 끊어 냈다면 좋았으련만.

뇌불이 걱정하는 건.

황극린과 만뇌문의 문도들이 받을 취급에 대해서였다.

무림맹과 척을 진다는 것.

무림공적인 뇌불을 감싼다면 만뇌문도 같은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다.

‘제기랄.’

뇌불의 마음은 약해졌다.

과거였다면, 탈출하는 즉시 천화련에 복수를 꿈꾸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계란으로 아무리 바위를 쳐 보았자 깨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뇌불은 20년도 지난 과거에서도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비동에 들어갔었다. 혼자서는 바꿀 수 있는 게 없다.

중원을 둘러싼 거대한 세력들의 힘은 뇌불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뇌불의 심각한 표정을 본 염왕대주 계충산이 말한다.

“당신은 운이 좋았소. 뭐, 조만간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

뇌불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장에 갇혔던 기억. 그리고 과거에 잊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뇌불은 주화입마를 완전히 극복한 것이 아니었다. 파편 조각들은 뇌불의 기억을 찢고, 자르며, 그에게 무한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강직한 것은 언젠가 부러지기 마련이었고, 부러진다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 그나마 뇌불이었기에 이 정도로 버텼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볼 때를 기억하시오. 그때 당신은 죽을 것이오.”

염왕대주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뇌불은 그것이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천화련은 언제든 뇌불을 죽일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만뇌문까지.

‘내가 돌아가는 게 맞는 걸까.’

죽음은 각오했다.

하지만 만뇌문도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마음이 약해진다. 그들이 받을 고통을 생각한다면…….

“풀이 죽어 있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염왕대주는 일견 당황한 듯했지만, 침착함을 되찾았다. 뇌불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찌 놈의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문주가 그러면 되나. 문도들이 보면 실망하겠어.”

“……!”

뇌불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황극린이 있었다. 꽁꽁 묶인 ‘그놈’을 사로잡은 채로 말이다.

“극린아.”

뇌불의 목소리에는 항시 자신감이 차 있었다.

다 죽어 가던 동굴에서도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이가 뇌불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지금 힘이 없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미소를 머금었다.

“잘 돌아오셨소.”

“……!”

그 한마디에 뇌불의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의 머릿속엔 걱정뿐이었다. 문도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황극린에게 도움이 되고자 떠났던 여행에서 피해만 끼쳤을 뿐이다. 거기다 미래엔 더 위험한 일이 만뇌문을 덮칠 것이다. 끔찍한 경험을 했던 뇌불은… 그러한 기억을 문도들에게 전해 주기 싫었다.

하지만.

황극린의 말 한마디에.

왜인지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살아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감동적인 재회였지만, 염왕대주 계충산은 적의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대공자님은 어디 가셨소?”

“그는 어제 보내 줬다.”

황극린은 천화련과 당장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공자 계빈의 성격을 파악한 뒤로 그를 배려하기로 했다. 그는 언젠가 천화련의 련주가 될 사람이었다. 그는 만뇌문이 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순간 사방에서 적의가 쏟아진다.

당연하게도 염왕대주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이동했지만, 사방에는 천화련의 최정예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리고 황극린에게만 느껴지는 은밀한 시선.

‘천화련에는 강자가 많군.’

그는 흘끔 그림자를 바라본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중강현의 객잔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받아라.”

황극린이 대공자 계빈이 작성한 서신을 건넸다.

그것을 읽은 계충산은 잠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분을 풀어 주어라.”

황극린이 그림자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그림자는 미묘한 시선으로 황극린을 바라보더니 계충산 쪽으로 이동했다. 계충산도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닌지 뇌불을 보내 줬다.

“련주님께서 말씀을 전하라 하셨다.”

“그래?”

“언젠가 너를 보고 싶다더군.”

“기대되는군. 그럼 가도록.”

“…그러지.”

염왕대주가 검을 꺼낸다.

그림자의 손을 꽁꽁 묶은 새하얀 줄을 끊어 내려 했다. 그가 가진 검의 예리함이라면 쉽게 베여야 정상이었다.

“……?”

하지만 잘리지 않았다.

검기를 발현했다. 검의 예리함과 검기라면 이딴 줄 따위는…….

그런데 잘 잘리지 않는다.

대체 이것이 무엇이길래? 검기로 몇 번을 시도한 염왕대주는 기어코 검강을 발현했다. 그리고 겨우 그림자의 손을 묶은 실을 잘라 냈다.

“이영(二影) 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안 괜찮다.”

그림자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북해빙궁주와 황극린과의 싸움. 진법 안에서의 전투는 내상과 상처를 선물했다. 뇌옥에 갇혀 휴식을 취했지만, 미친 거미 한 마리 때문에 전혀 회복하지 못했다.

“가자.”

“예.”

이미 황극린은 뇌불과 함께 비동 안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역시 뇌불이 만뇌문의 문주였군.’

두 사람의 대화로 그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뭐, 황극린은 그걸 숨길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대공자를 만나러 간다.

염왕대주는 그림자를 따라 청성산을 떠나 대공자가 기다리는 중강현으로 향했다.

* * *

“미안하구나.”

뇌불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진법에 진입하고 작은 탄성을 터트리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는 죄인이라도 된 듯이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피를 뽑혔기 때문인지 안색도 좋지 않았다.

황극린은 그의 사과에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그의 손에 뇌전이 깃든다.

“황 문주.”

“어……?”

황 문주라는 건.

뇌불이 새로이 만든 황악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다. 뇌불의 몸이 움찔한다.

“보여 줄 게 있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뇌불… 아니, 황악은 황극린의 손을 바라본다.

그의 손에는 생명이 깃든 듯이 움직이는 뇌전이 있었다. 뇌불은 대번에 혈풍뇌전신공과의 차이를 깨닫는다. 무언가 달라졌다.

“그건…….”

“막아 보시오.”

“뭐, 뭣?”

다짜고짜 손을 휘두르는 황극린.

점혈이 풀렸기에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 공격에 즉사했을 것이다. 그만큼 황극린의 일격은 매서웠다.

“이, 이놈아! 죽일 셈이냐!”

순간 뇌불이 과거의 당찬 목소리로 분통을 터트렸다.

스스로도 그것에 놀란 것인지 몸을 움찔한다.

“훨씬 낫군.”

“뭐……?”

“됐고, 각오는 되어 있소?”

“…무슨 각오 말이더냐?”

“문주가 책임감도 없이 여행이나 다니고 있었으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겠지.”

“그건… 미안하다.”

뇌불은 자신만을 위해 떠난 게 아니다.

그는 만뇌문을 위해 움직였다. 기억을 되찾고 더 강해지기 위해서. 그 또한 언젠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미안하면 평생 일하시오.”

“평생……? 무슨 일을 말이냐?”

“만뇌문의 문주가 아니오?”

“…….”

뇌불이 주먹을 꽉 쥔다.

“하루 주겠소. 몸을 다 회복하시오.”

“하, 하루?”

“만뇌문의 문주가 되어서 매번 밖에서 쥐어 터지고 다니면 되겠소?”

뇌불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혈풍뇌전신공은 완성된 게 아니오.”

“그래, 안다.”

뇌불은 이제 대부분의 기억을 되찾았다.

그는 자신이 왜 비동에 들어갔는지, 왜 장보도가 각인된 의복을 만들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었다. 그런데도 살아남은 것은… 끔찍한 생존 본능 덕분이었다.

“같이 만듭시다.”

무심한 말.

저 아이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비동에 들어왔을 때도 그런 말투였다. 그렇기에 뇌불은 피식 웃고 말았다.

황극린은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았다.

물론, 뇌불은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니었다. 약한 모습으로 힘 빠진 소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긍정.

뇌불은 황극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꾸나.”

황극린이 입꼬리를 올린다.

그리고 몸을 돌려 만뇌문의 보금자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뇌불은 그의 뒤를 따랐다.

처음 보았을 땐, 작은 소년이었다. 조금만 몸을 회복해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허약해 보였던 소년. 그의 어깨가 참으로 커진 것 같았다. 마치… 있지도 않은 장성한 아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들에게 언제까지고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않은가.

뇌불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 * *

“용성?”

“그렇소.”

황극린표 양념 고기를 배터지도록 먹은 뇌불의 안색은 많이 회복되었다.

그는 천천히 어떤 여정을 떠났었는지, 왜 천화련에게 납치당하게 되었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야기했다. 과거에 왜 비동에 들어가게 되었는지까지 말이다.

뇌불의 말이 끝나자 황극린 또한 현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했는지.

“조만간 용성의 임시 성주가 청성산을 방문할 것이오.”

“황실이라……. 그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

무림맹도 믿을 만한 족속들이 못 되지만, 황실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인간이라는 게 모두 그러하다. 뇌불은 소림사에서 만났던 악연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용할 뿐이오, 만뇌문이 확고한 자리에 오를 때까지.”

뇌불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임시 용성주라는 놈은 누구냐? 황실에서 초청했다면 웬만한 놈은 아닐 듯한데.”

“진주언가주.”

“진주언가라고?”

“그렇소.”

의아함을 품던 뇌불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진주언가라면…….

“그렇군. 그래서 나와 함께 가자는 것이구나.”

만뇌문은 뇌불의 존재를 밝힐 예정이었다.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면 스스로 밝히는 게 낫다. 그것은 만뇌문의 큰 약점이 될 것이고, 황실은 그것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만약 황실이 만뇌문을 내친다면 무림맹은 만뇌문을 물어뜯을 테니까.

하지만 임시 용성주가 된 이가 진주언가주라면?

황극린도 진주언가와 인연이 있었다. 그건 뇌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진주언가에선 뇌불과의 인연을 악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뇌불은 사소한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다.

“좋다. 내게 맡겨라.”

“그리고 또 한 가지.”

“무엇이냐?”

“북해빙궁의 소식은 들었소?”

“북해빙궁……? 북해에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뇌불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황극린은 그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었다. 당혹과 의아함 그리고 궁금증이 깃들어 있다.

“빙백마후가 날 찾아왔소.”

“그 미친년이 뭐라고 하더냐?”

“북해의 왕이 되라더군.”

“뭐? 왕?”

무슨 소린가 고민하던 뇌불의 입이 서서히 벌어진다.

“뭐, 뭣이!”

뇌불의 반응은 의외였다.

놀랄 일이긴 했지만, 그의 반응은 단순한 놀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큼큼, 아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북해의 여인들은 아름다우니. 너도 언젠간 혼인을 해야 할 것 아니더냐? 어쩌면 그게 좋을 수도 있겠군.”

그러다 뇌불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다.

왜인지 무언가에 만족한 듯, 흐뭇하게 황극린을 바라본다.

황극린은 뇌불의 그런 음흉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떠오른 의문을 입에 올린다.

“혹, 빙궁주와 동침한 사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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