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폭풍의 중심
“당신은 왜 왔지?”
황극린의 물음에 빙백마후의 입꼬리가 뱀처럼 길어졌다. 북해를 지배하는 마후(魔后)의 시선은 누구라도 고개를 조아릴 위엄을 품고 있었지만, 황극린에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지나가는 벌레를 바라보더라도 그리 무심하진 못할 것이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빙백마후는 황극린의 표정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게 다행일까.
“사위가 공격당한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느냐?”
그때 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빙백마후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차라리 여기서 죽일까.’
솔직히 장담할 수 없었다.
진법 내에서 황극린은 빙궁주가 북해에 있는 것처럼 평소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빙궁주는 그와 반대로 힘이 약화됐다. 황극린에겐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있다.
그림자는 강했다.
황극린은 그와 싸우며 꽤 많은 상처를 입었다. 북해빙궁주는 황극린의 실력을 알아보겠다는 듯이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만약 북해빙궁주와 싸워서 이긴다면? 만뇌문으로선 걱정거리를 하나 덜 수 있다. 하지만 패배한다면…….
‘빙궁주에겐 자비란 없다.’
황극린은 흑살문에 있으면서 북해빙궁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었다.
특히 특급 살수들이 말하길 빙궁주는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무인이었다. 그녀가 강한 것도 있었지만, 그 지독한 성정이 상대하기 껄끄럽다는 게 이유였다.
당장은 북해빙궁은 만뇌문을 건드리지 않을 거다.
황극린은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북해빙궁주도 놀랄 정도로 말이다.
그녀는 아닌 척했지만, 황극린이 보여 준 무위에 무척이나 감탄했다.
‘본녀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더 성장한 것 같구나. 그것에는 이 장소도 영향이 있겠지.’
괴이한 진법이었다.
시시때때로 날씨가 바뀌었으며, 지금은 짜증 날 정도로 강렬한 햇빛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다. 땅에서도 해가 떠오른 듯하다. 솔직히 바로 떠나가고 싶을 정도로 불쾌했지만… 눈앞에 있는 ‘보물’을 보고 있으니 그리 못 견딜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체질을 물려받는다면, 북해빙궁은 북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역대 빙궁주들이 염원했던 것을 그녀의 대에서 끊어 낼 수 있었다. 그럴진대 이깟 햇볕 따위가 대수랴? 빙궁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온다. 그의 체질은 어떤 무림인도 가지지 못한 종류의 것이 분명했다.
천마니 하는 놈들보다 훨씬 더.
뛰어날 것이다.
“후후후후후.”
음흉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황극린이 혀를 찼다.
일단 북해빙궁주와의 싸움은 미루는 게 나을 것이다. 당장은 그녀와 자웅을 겨룰 때가 아니다. 그림자와의 싸움에서 내력을 많이 소모했으며, 상처도 꽤 깊었다. 아무리 진법 내부에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무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으음? 무엇을 말이더냐?”
“천화련이 이곳으로 올 줄 말이오.”
천화련이 직접 떠벌렸을 리는 없었다. 애초에 북해빙궁에게 떠벌릴 만한 종류의 사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것은 배교뿐이다.
“다 방법이 있단다. 사실…….”
그녀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문다.
“이건 네가 북해의 왕이 된다면 모두 말해 주마. 어차피 그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란다.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북해의 왕이 되겠다고 선언한다면 모두 알려 주도록 하마. 본녀는 시간이 많으니.”
“북해빙궁주가 한가한 모양이군.”
황극린의 도발에도 빙백마후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널 위한 시간은 많단다.”
“…….”
솔직히 황극린은 사파나 정파를 구분하지 않는다.
연을 쌓을 수 있다면 그들의 출신이 뭐가 중요하리? 황극린도 따지고 보면 흑살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저런 음흉한 목적으로 접근하는 이와는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연을 쌓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헛걸음이었소. 배웅은 하지 않겠소.”
“잠시만! 여기까지 왔는데 차도 대접해 주지 않느냐?”
“피차 차를 마시며 대화할 사이는 아니잖소?”
“그렇게 안 봤는데, 부끄럼이 많구나.”
“가시오.”
황극린이 뇌섬사로 그림자의 사지를 빈틈없이 꽁꽁 묶었다. 단전을 파괴한다면 쉬웠지만, 그렇게 되면 천화련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천화련의 무인들은 죄다 점혈이 통하지 않으니 뇌섬사로 묶는 게 방법이었다.
쿵!
황극린이 갑자기 그림자의 관자놀이를 내려쳤다. 어찌나 강하게 쳤는지 땅이 울릴 지경이다. 빙궁주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
그림자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졌었다.
그는 천화련의 대공자처럼 기절에서 깨어나자마자 다시 기절했다.
“가지 않는다면, 싸울 의사가 있다고 판단하겠소.”
황극린이 최후통첩을 내린다.
진득하고 음울한 살기. 빙궁주는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고 입꼬리를 내렸다.
“무서운 아이로구나. 알겠다. 어차피 약조한 날은 되지 않았으니까. 이만 가겠노라.”
황극린이 그녀를 무시하고, 기절한 그림자를 질질 끌고 간다.
빙궁주가 그를 보며 마지막으로 말한다.
“남궁가의 아이가 얼마나 외모가 출중한지 모르겠으나… 본궁의 부궁주가 더 아름다울 것이다. 미색으로는 본녀보다 더 뛰어나니까. 그 아이도 널 원하고 있으니 언제 한번 서신이라도 보내도록 하여라.”
빙궁주는 더는 말하지 않고, 진법을 떠나간다.
황극린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남궁운혜의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알겠다. 그녀는 중원에 떠도는 풍문을 듣고, 남궁운혜와 자신이 연인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물론, 그런 착각 따위야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역시 완벽하진 않군.’
빙궁주가 떠나가자 하늘에 뜬 태양의 개수가 1개로 줄어들었다.
물론, 진법 후반부에는 절대 고수들도 쉽사리 피할 수 없는 진짜 살상 기관진식들이 잔뜩 깔려 있었지만… 저런 고수들이 작정하고 나선다면 뚫릴 것이 자명하다. 그것이 황극린의 심기를 건드렸다.
살수는 지킬 것이 없었다.
그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뿐이다. 아니, 임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 그렇기에 살수는 자신보다 강한 무인들을 죽일 수 있다.
지금의 황극린은 지켜야 할 게 많았다.
‘문주, 돌아오면 각오하시오.’
그는 진법의 수호자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황극린의 허락이 없으니 만뇌문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 * *
“허, 당신도 잡혀 왔군.”
움찔.
귀식대법(龜息大法)까지 펼쳐 가며 정신을 차린 걸 숨기던 그림자가 천천히 눈을 뜬다. 어둠이다. 그가 선호하는 공간이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광광, 울리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황극린 놈이 대체 어떻게 알아채는지 깨어날 때마다 관자놀이를 후려친 탓이었다.
“대공자.”
그림자는 대공자에게 존칭을 하지 않았다.
그의 정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기하군. 황극린 그 친구가 아무리 강해도 당신이 패배할 줄은 몰랐… 아니, 욕한 것 아니다. 그만 좀 째려보거라. 그 친구 이름만 나오면 왜 그리 발작하느냐? 허허, 또 침을 뱉었군.”
갑자기 허공을 향해 발끈하는 계빈.
그림자가 알던 대공자의 품위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대공자가 드디어 주화입마에 걸린 건가?’
천화련에 직계들은 많았다.
수십 명도 넘었지만,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 있는 건 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천화련주의 피는 강한 저주와 축복을 타고났다.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버텨 낼 수 없는 ‘괴이’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을 원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주화입마에 빠진 게 아닌가.”
“아니오.”
그림자가 고개를 든다. 그는 뭘 보고 소리친 거지? 불그스름한 무언가가 허공에서 번뜩이고 있다. 그 순간.
‘이건… 뭐지.’
뜨거운 것이 그의 얼굴에 묻었다.
마모된 감정으로 분노를 느껴 본 지가 꽤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림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침을 뱉었다고 했나? 그런데 저것은…….
“인면지주로군.”
그림자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왜인지 평범한 인면지주와는 느낌이 달랐지만… 애초에 인면지주는 인간이 ‘거미 영물’을 통합하여 부르는 것이다. 인간도 모두 같지 않듯, 같은 거미에서 영물이 되었어도 인면지주는 모두 같지 않았다.
그림자의 흉흉한 눈동자를 바라보던 계빈이 묻는다.
“탈출할 생각이시오?”
그림자의 진정한 힘은 지금과 같은 어둠 속에서 발휘된다.
“그러지 않는 게 좋소. 저놈은 보통내기가 아니거든.”
“그런 것 같군.”
그림자가 계빈을 바라본다.
“황극린이 우릴 어떻게 할 것 같나?”
“놓아줄 것이오.”
계빈의 목소리엔 확신이 차 있었다. 그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그는 나와 같은 종자니까.”
단전도 폐하지 않고 가둬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전투에서 큰 상처를 입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도 말이다. 만뇌문은 뇌불을 원하고 있었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그 또한 완성될 수 있을 테니까.”
계빈은 확실히 천화련주의 뒤를 이을 재목이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갇혀 있었지만, 그가 더 성장한 뒤였다면 죽은 것은 황극린이었을 것이다. 그림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몸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다고 대공자의 말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천화련의 구출만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최대한 다친 몸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기회가 엿보인다면.
- 끼이.
묘한 울음소리에 그림자의 눈썹이 움찔한다.
조금 더 다가온 인면지주. 놈이 마치 의사 표현을 하는 듯하다.
‘비웃음? 마치 우리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대공자 또한 그것을 알아챈 걸까.
그는 갑자기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 아이에게 그걸 뺏기지만 않았어도…….”
대공자의 깊은 탄식.
이렇게 갇혀 있었음에도 비통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 대공자의 목소리엔 감정이 뚝뚝 담겨 있었다. 그림자는 대공자를 5살 때부터 봐 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대체 뭘 빼앗겼길래?
“뭘 뺏겼다는 거지.”
“아니오. 시간은 많으니까.”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후 대공자가 침묵한다.
평소처럼 오만하면서도 무심한 얼굴로 돌아온 대공자가 눈을 감는다. 본래 두 사람은 살갑게 대화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림자도 힘을 비축하려 눈을 감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
- 끼이이익!
“큭.”
미친 인면지주가 또 침을 뱉었다.
아니, 침은 아닐 것이다. 아마 거미줄이 아닐까?
- 끼익, 끼익!
지금은 잘 때가 아니라는 듯이. 넌 휴식을 취하면 안 된다는 듯이.
엉덩이를 내밀고 그것을 뿅뿅 쏘아 대고 있었다.
* * *
“흐으으음?”
흑살문의 특급 살수 암귀는 고심에 빠졌다.
황극린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자꾸만 방해가 들어온다. 마치 그를 건드리지 말라는 듯한 경고. 흑살문을 이리 건드릴 수 있는 문파는 몇 되지 않는다. 솔직히 어딘지는 대충 감을 잡은 상태였다.
‘만독문.’
운남성에 자리를 잡은 만독문은 흑살문과 솔직히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사흑련 중에서 친밀하다고 말할 문파는 없긴 했지만, 흑살문과 만독문은 더욱 그러했다.
‘잠시만.’
그러고 보니 왜 만독문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천기피독신주(天機避毒神珠)를 진정으로 원하는 문파일진대 말이다.
만독문이 제정신이었다면 이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만독문주와 흑살문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흑살문주가 직접 나서게 된다면 아무리 만독문이라 하여도 막심한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중원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혈마교가 심어 둔 비밀 지부가 무림맹에게 발각되었으며.
소림사과 천화련이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정보에 따르면 혈마교의 정예가 움직였다는 첩보도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완벽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아마 천화련을 치기 위함이겠지. 무림이 혼란에 빠진다. 만독문이 움직일 명분은 충분했다.
‘만뇌문. 만독문.’
이름도 비슷했다.
어쩌면…….
암귀로선 이해가 안 됐다.
아니, 중원의 그 어떤 누구도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뇌문은 역사로 따지면 갓난아기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배교의 진이 있던 청성산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는 이제는 무림맹이 아닌 황실이 만든 용성 소속이 되었다. 거기다 황극린이 싸우는 방식은 마치…….
‘살수처럼 움직인다.’
파천뇌권이라는 별호도 생겼건만, 암귀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황극린은 보통 살수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런 정황은 몇 번이나 드러났다.
복잡해진다.
천흉이라는 표적 뒤에 배교가 있다는 게 밝혀졌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가 갑자기 의뢰를 취소했기에 황극린을 노릴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만뇌문이 위기에 처하자 북해빙궁과 혈마교 그리고 만독문까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암귀는 스스로 중원의 모든 정보를 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황극린에 대한 정보를 접할 때마다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놈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그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까지 샅샅이 조사하였어도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정보에 따르면 그는 황씨 가문에서 처음 무공을 배운 게 맞았다. 그게 정말 말이 되는 건가?
‘안 되겠군.’
암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혼자서 판단할 범위는 이미 넘어섰다. 사흑련의 세 문파가 움직였으니 이제는 흑살문도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특급 살수라 해도 흑살문 전체를 움직일 힘은 없었다. 혈고독이 잠들었다고 하여 완전한 자유를 찾은 건 아니었다.
그는 지하로, 또 지하로 들어갔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거미가 양각된 거대한 문 앞에서 암귀가 허리를 숙인다.
“문주님, 암귀입니다. 한 달 전, 보고드린 황극린에 대하여…….”
“만뇌문은 폭풍의 중심이니, 주위로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리라. 신경 쓰지 말고 기다리도록.”
기다림.
그것이야말로 살수의 덕목이다. 또한, 문주 암혼마제(暗混魔帝)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암귀는 황극린에 대한 모든 의문을 털어 내기로 했다. 정말 그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예, 문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