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86화 (186/316)

186화 그림자

진의 입구에 도착한 황극린.

그는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그림자라는 단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천화련에서 만뇌문에 침입한 놈의 특성이 ‘은밀함’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천화련이 키운 살수가 아닐까 생각했다. 천화련 대공자의 무공을 견식한 황극린은 그들의 무공이 은밀한 부류가 아니라는 걸 알고 깨달았다.

‘천화련주가 직접 왔다면 이렇게 진을 돌파하고 있었겠지.’

진이 조금씩 파괴되고 있었다.

아무리 완벽한 진이라도 절대자의 경지에 오른 무인을 십팔나한들처럼 가둬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황극린 또한 진법을 쉽게 통과하지 않았던가?

물론, 제갈창해와 제갈소희는 황극린이 특별하다고 말하긴 했었지만, 황극린은 진법이 무적의 방비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정파 무림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라면 진법을 통과할 가능성도 있으리라.

‘설마 천화련주인가.’

대공자를 납치할 때부터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 누구라도 상관없다.’

자만은 아니다.

황극린은 북해빙궁주와의 만남 이후로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성장했다. 거기다 진법 안은 황극린의 구역이다. 그 누구보다 진에서 자유자재로 싸울 수 있다.

“장로님.”

구자광과 문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긴장한 눈으로 황극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그들은 뇌불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황극린보다는 아니었지만, 문도들은 진법에 적응했으며, 황극린의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만약 검은 달이 떠오르면 진입하도록.”

검은 달.

진법의 마지막 단계. 사대금강 중 하나인 해월대사와 십팔나한이 세 개의 태양에서 좌절했었다. 진법이 뚫릴 위기에 처했다는 말도 된다. 황극린이 막을 수 없다면 검은 달이 떠올라 대지 위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 것이다.

“예, 장로님.”

황극린이 진으로 들어갔다.

감히 누가 만뇌문의 진에 침입했는지 확인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 신기한 일이로군.

암흑이 내려앉은 성.

천화련의 성은 높게 지어졌지만, 그곳에서 가장 높은 절대자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른다. 천화련주는 천화련의 성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귀기(鬼氣)가 일렁거리는 눈동자에, 대공녀 계지향은 무릎을 꿇었다. 전음이 사방으로 퍼질 때마다 계지향의 몸이 움찔 떨린다.

- 건방진 놈이었지.

천화련주는 뇌불을 떠올렸다.

그 또한 찬란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고,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뇌불은 처단당했었다. 거대한 무림의 흐름에서 혼자 튀어나오려는 놈은 그렇게 늪에 빨려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 만뇌문의 문주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뇌불은 천화련의 지하 뇌옥에 갇혔다.

그는 죽을 때까지 천화련에 피를 공급할 먹이가 될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지만, 건방졌던 놈답게 주제를 모르고 살아 있었다.

- 그렇다면 만뇌문의 문주는 뇌불이겠군. 건방지게 또 허튼 꿈을 꾸었나.

대공자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천화련주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에게 기나긴 세월이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혹자는 저주받은 피를 이어받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축복이기도 하다. 인간의 피를 탐하지만, 인간보다 월등한 육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보통의 인간보다 수배의 세월을 살아간다. 무공까지 익히면 생명의 존속 기간이 훨씬 늘어난다.

새로운 후계를 키우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단지 지루할 뿐.

- 건방진 놈의 제자라……. 하나, 그놈은 뇌불보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독과 태양의 힘을 이용했다지만 계빈이 패배한 건 사실이다. 뇌불은 청출어람의 제자를 키워 냈다. 그것 또한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은은한 즐거움을 주었다. 신선한 자극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만뇌문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 그림자를 보내라. 황극린이라는 놈을 제외하곤 모두 죽이라 명해라.

“예, 련주시여.”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계지향은 련주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천화련은 언제나 순수한 피를 원했다. 무인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그들은 더욱 ‘순수한’ 피를 생성한다. 내력을 품은 인간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피를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천화련의 먹이가 될 것이다. 사제가 같은 방에서 머물고 있다면…….

그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겠지.

당연히 천화련은 인질 교환에 임할 생각이 없었다.

호랑이가 개미와 타협하진 않으니까.

그렇게 천화련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 * *

의문이었다.

벌써 세 번째 태양이 떠올랐지만, 놈은 무사했다. 진법에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온갖 기관진식을 뚫고 직선으로 달려와 중간 지점까지 도달했다. 황극린이 보는 ‘그놈’은 강했다. 본능적으로 어둠이 일렁거리는 저놈이 뇌불을 사로잡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싹.

그의 몸에서 일렁거리는 그림자 내에서 수십 개의 눈동자가 떠오른 듯하다. 황극린의 감각을 혼란에 빠트릴 만큼 소름 끼치는 살의의 집약이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솨아아아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대지 위에서 얼음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진 안에서는 날씨와 밤낮의 구분이 없다. 눈을 감으면 벼락이 내려치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지진이 일어난다. 시시각각 바뀌는 환경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야 했다. 진의 내부는 진실이기도 했으며, 거짓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얼음 폭풍은…….

진의 힘이 아니었다.

까드드드득-!

무언가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거대한 음기의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진의 내부가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어둠을 품은 그림자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냉기에도 굴하지 않고, 어둠의 칼날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순간 황극린은 계빈이 마지막에 펼친 암혈강(暗血罡)을 떠올렸다.

그것과 비슷했지만, 더욱 은밀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진다. 황극린은 단번에 깨달았다. 그는 황극린과 동류의 인간이었다.

‘살수는 확실하군.’

하지만 정면에서 저토록 아름답게 싸우는 살수는 처음이었다. 진의 압박이 거세지는데도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고 싸우고 있었다. 화경의 고수가 동시에 만뇌문에 쳐들어왔다. 그것도 놀라울진대 두 사람은 서로 싸우고 있었다.

황극린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북해빙궁은 왜 왔을까? 빙백마후가 이리 엉덩이가 가벼웠던가.

아니, 솔직히 예상은 된다.

북해빙궁은 황극린을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했다.

그에게 많은 것을 약조했다. 모든 북해빙궁의 여인들을 가질 기회를 주겠다고 했었다. 물론, 그것이 함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 북해빙궁은 황극린을 억압하려 할 것이다.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없다. 무엇이든 제약이 있으며, 한계가 존재한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황극린은 진이 왜 이리 크게 흔들렸는지 알 것 같았다. 저리도 거대한 기운을 가진 두 무인이 싸우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바로 나서지 않았다.

이건 기회였다. 화경에 이른 고수가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

저들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직접 싸우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리 멀리서 지켜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까드드드득!

또다시 빙결의 폭풍이 진에 휘몰아친다.

황극린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얼마나 내공이 많은 건가? 완벽한 황극린의 약점을 굳이 지적하자면 부족한 내공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로 추정되는 놈과 빙백마후는 마치 내력이 무한한 것처럼 싸우고 있었다.

‘아니, 무한한 것은 없지.’

여기는 북해가 아니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다.

두 사람은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황극린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그 순간.

세 개의 태양이 나란히 섰다.

태양이 가장 높게 떠오를 때, 직선으로 비치는 거대한 열기는 대지를 녹여 버린다. 황극린은 ‘열쇠’를 지니고 있었기에 진법의 규칙을 임의로 결정할 수 있다. 벼락과 우박, 화염과 냉기가 치밀어 오르는 대지가 오로지 ‘열기’만을 품기 시작한다.

“……!”

두 사람은 황극린이 무언가를 바꾸었다는 걸 깨닫고 살의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심지어 빙백마후마저 눈빛으로 황극린을 살해할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

황극린은 무심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싸우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지금 그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사아아아아…….

서걱!

무언가 베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빙맥마후의 몸에서는 피가 분출되지 않았다. 살갗이 베이는 순간, 얼음으로 상처를 봉(封)한 것이다.

까득.

동시에 어둠이 얼었다. 빙백마후를 벤 만큼, 그림자는 그보다 큰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

그림자가 고통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 네년이 왜 여기에 온 거지?

그림자의 전음이다.

황당함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본래 남의 전음을 엿듣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 장소는 황극린을 위한 대지였기에 그 또한 그림자의 전음을 들을 수 있었다.

“후훗, 당연한 것 아니더냐.”

빙궁주가 잔혹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어 나간다.

“사위가 위기에 처했는데,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

- 북해가 화를 자초하는군.

까득.

얼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엄하다. 그림자 따위가 어딜.”

순간적으로 그림자의 기척이 사라졌다. 마치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지만, 황극린은 그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작렬하는 태양을 피해 그림자를 밟고 돌진하고 있었다. 빙궁주가 아닌 황극린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의 이동도 북해빙궁주가 발산한 치명적인 음기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거대해지는 그림자. 그것은 마치 태양마저 집어삼킬 듯 커지고 있었다.

“정녕 여기서 끝을 보고 싶은 것이더냐?”

명백한 비웃음.

빙백마후의 말에 그림자의 크기가 작아진다. 그림자에서 돋아난 수백 개의 그림자가 황극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괴이한 무공이었다. 보통 무공은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같은 자연의 속성 중 하나를 따른다. 태극(太極)이라 하여 음양이 조화된 특별한 개념도 있었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음양오행을 기초로 한다.

그림자의 기운을 굳이 분류하자면 마기(魔氣)와 비슷하다고 할까.

물론, 마기는 혼돈의 기운이라 하나로 딱 정의 내릴 수 없긴 했다. 황극린이 익혔던 혈풍뇌전신공과는 또 다른 부류의 무공이었다. 그에 반해 빙백마후의 무공은 음양오행 중 음(陰)의 기운이 궁극적으로 발전한 형태다.

음기와 그림자의 싸움.

지금도 그 공방은 이어지고 있었으며, 점점 황극린에게 가까워졌다. 그래서 황극린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림자가 가진 기운의 성질을 말이다.

‘그랬던가.’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가 품은 기운은… 유령의 무영심결(無影心訣)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천화련의 그림자라는 놈이 유령의 후계자인가? 흑살문이 유령의 무공을 이어받았다고 알고 있었지만, 뇌불은 유령이 살아 있다고 했다.

-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만.

그림자의 어둠이 둥글게 뭉친다. 그는 태양이 거슬리는 듯 사방팔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림자의 어둠이 조금씩 찢겨 나가고 있었다. 역시나 이 장소는 그에게 최악의 장소였다.

- 네놈은 날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림자가 떠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왜인지 북해빙궁주는 그를 막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걸까. 그녀의 머리 위에 작은 얼음 폭풍이 생겨난다. 빙백마후도 저 태양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림자가 이동한다.

그의 경공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조금만 더 달려 나간다면 진법의 출구에 닿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천화련의 습격이 일견 평화롭게(?) 끝나려는 순간이었다.

“어딜.”

크릉!

크르으으응!

황극린이 한 발을 내딛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그림자가 걸음을 멈춘다.

- 네놈.

“여긴 아무나 오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 감히.

그림자가 분노로 일렁거린다.

하지만 황극린은 지금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황극린은 그림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 밖에서 마주했다면 솔직히 황극린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곳은 황극린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진 내부였다. 거기다 그는 빙백마후와의 싸움에서 많은 내력을 소진했다.

“인질이 두 명이라면… 천화련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테지.”

황극린의 말에 뒤에서 감탄이 터져 나온다.

“호오라, 역시 본녀의 사위답구나!”

빙백마후의 말이 거슬렸지만, 그녀까지 상대할 여력은 없다.

그림자는 강하다. 그는 뇌불을 잡아간 장본인이다. 아무리 뇌불이 전성기보다 약하다고 해도 뇌불은 강하다. 황극린이 진심으로 그를 인정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놈을 사로잡을 것이다.

대공자와 이놈마저 사로잡힌다면 천화련은 결국 거래에 응할 것이다.

크르릉!

뇌전이 공간을 물들였다. 황극린의 뇌전이 그림자를 찢어 버릴 듯 돌진했다.

* * *

천화련에 서신이 도착했다.

한 장은 천화련의 대공자 계빈이 보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서신은…….

- 그림자와 대공자를 데리고 있다.

인질이 늘어났다.

천화련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림자가 실패할 줄은 그도 몰랐으니까.

- 개미는 아니로구나.

어울려 줄 이유가 생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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