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체질
소림사.
천화련주의 대리자가 소림사를 방문할 것이라는 서신이 도착했었다. 그렇기에 방장은 그들을 기다렸다. 만뇌문의 처리와 향후 무림의 방향을 결정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소림사의 방장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들이 소림사를 길들이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의견은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천화련의 서신이 도착하고 두 달이 지났을 무렵.
방장은 오랜만에 분노라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물론, 그것을 외부로 표출할 만큼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다. 방장은 낮아진 음색으로 말했다.
“소식이 없구나.”
천화련의 대공자는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소식이 없었다.
“제가 직접 천화련에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한전주.
천화련을 찾아가려면 소림의 나한전주 정도는 되어야 한다. 방장은 그런 나한전주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러다간 정말 만뇌문이 황실의 용성에 합류하여 무림맹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황실의 소속이 되면 소림사로서도 처리하기가 껄끄러워진다. 아무리 만뇌문이 배교도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의심하는 순간 황실을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물론, 소림사는 당하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자네는 황실에 가도록 하게. 천화련엔 여천(如天)을 보내도록 하겠네.”
“예, 그리하겠습니다.”
사대금강 중 한 명인 나한전주는 황실로.
또 한 명인 여천대사(如天大師)는 천화련으로.
소림사 나름대로 상황을 해결하러 떠났다.
아무리 소림사라도 천화련이 입을 꾹 닫고 있으니 천화련의 대공자가 당최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황극린이 그를 납치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소림사도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 * *
그 시각.
천화련의 대공자 계빈은 ‘식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인간의 피를 취해 내력을 보충하고, 허기를 채운다. 하지만 만뇌문에선 인간의 피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소의 피를 마시며 겨우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이런 것을 먹고 어찌 힘을 길렀을까.’
두 달 동안 갇혀 지낸 계빈이었다.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황극린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었다. 천화련에 원하는 게 있다고만 했었지. 그리고 딱히 찾아오지도 않았다. 제시간에 겨우 허기를 달랠 만한 정도만 제공해 줄 뿐이었다.
아무튼.
짐승의 피만 쪽쪽 빨아 먹고 있으니 참으로 의아했다.
그의 여동생 계지향은 인간의 피를 탐하지 않았다. 후계자 경쟁에서 스스로 밀려난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걸 먹으면 강해질 수 있을까? 만약 자신이 인간의 피를 멀리했다면 계지향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계빈에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무한한 포식(飽食)만이 방도는 아니다.’
천화련에서의 수련 방식은 간단했다.
더욱 순수한 피를 마시는 것. 그것만으로도 천화련의 직계들은 무한히 강해질 수 있었다. 이미 역대 천화련주들이 증명한 사실이다. 현 천화련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대공자는 그마저도 넘어서려 했다.
그는 중원의 일인자가 될 몸이었다. 같은 방식으로는 현 련주이자 그의 아버지를 넘어설 수 없었다.
‘결핍에서 오는 욕구, 그것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극린이라는 호적수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가 품에 품은 ‘붉은 구슬’을 취하지 않는 이유였다.
냄새만 맡아도 송곳니가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구슬을 깨어 그 안에 든 피를 만끽하고 싶었다. 호적수의 ‘맛’이 어떠한지 느끼고 싶었다. 피에는 인간의 역사가 들어 있었다. 아마 저것을 취하더라도 계빈은 또 한 번 발전할 수 있으리라.
다만.
그는 참고 있었다. 적절한 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쿠르으으응-!
그때, 문이 열린다.
첫날 찾아온 이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황극린이다.
계빈이 반가움에 소리친다.
“친구, 드디어 왔군.”
황극린은 내가 왜 네 친구냐고 말하진 않았다. 단지 무표정하게 아래를 바라볼 뿐이다. 그의 시선에는 계빈이 싹싹 비운 그릇이 있었다.
‘중원에는 괴이한 체질이 많군.’
황극린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천화련의 직계들이 타고나는 피는 일견 북해의 ‘저주’와 비슷하다고 말이다. 그들은 추운 곳에서 활력을 띠며, 더운 지방에서는 그 힘이 약화된다. 그건 천화련도 비슷하다. 천화련의 직계들은 태양의 빛을 받으면 상처를 입는다. 붉은빛의 호신강기로 막을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제약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체질은 결핍과 제약이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재능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고민했다.
자신도 그와 비슷한 저주에 걸린 것이 아닐까? 세상에는 균형이라는 게 존재했다. 황극린이 가진 재능, 영약을 취하면 체질이 변화하는 압도적인 재능에도 그들과 같이 ‘약점’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제까지 전혀 그러한 약점 따위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약조한 한 달은 꽤 남았는데… 이 몸과 대화하고 싶은 건가?”
“그래.”
황극린이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묻는다.
“천화련주쯤 되면 햇빛을 극복할 수 있나?”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경지에 오르면 북해빙궁주처럼 더운 지방에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천화련주도 아마 그러지 않을까?
“후후후.”
계빈이 미소를 머금는다.
개구쟁이의 얼굴이 되어 황극린의 시선을 마주한다. 천화련에서 그를 보아 왔던 사람들이 보았다면 경악할 표정이다. 대공자 계빈은 정색하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미소도 아니고, 장난스러운 미소는… 극히 드문 것이다.
“궁금한 게 많은 듯하군. 자네는 최강의 무공을 가졌으면서도 나의 무공을 탐내는가? 역시 그래서 강해진 것인가……. 역시 본받을 만한 자세로군, 나의 호적수.”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한다.
황극린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계빈이 입을 연다.
“당연히 극복할 수 있다.”
“그런가.”
“다만, 아버지의 경지에 오르더라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호신강기를 둘러야 하나.”
“그럴 수도, 아닐 수도.”
계빈의 미소는 짙어졌다.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이다. 그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줄 테지만, 곧이곧대로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미끼를 던져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는 심리 싸움도 계빈이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천화련에선 그의 한 마디면 모두가 진실을 토해 냈었으니까.
지금 황극린도 자신을 납치한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지 않은가?
그때, 황극린이 말한다.
“인질 교환을 할 것이다.”
“교환?”
대체 누구와?
의문이 떠올랐지만, 묻지 않았다.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벗의 생각을 읽는 것도 참으로 재밌을 거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계빈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최근 지하에 잡혀 온 한 사내. 오랜만에 보는 최상품. 그가 누군지 떠올린다.
‘황극린이 익힌 무공이 혈풍뇌전신공이라고 했던가.’
계빈은 금방 깨달았다.
“그렇군. 그래서 날 납치한 것이로군. 자네는 역시 똑똑해.”
“그의 신변에는 문제가 없겠지?”
“그렇다네. 뭐, 탈출 시도라도 하지 않은 이상은 무사하겠지.”
괜히 그의 말에 불안해진다.
뇌불의 성격이라면 탈출 시도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서신을 써도 되겠나?”
“서신?”
“그렇다네. 아버지께선 내 필체를 알아보시겠지. 자네가 지향이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겠다만… 이대로 있으면 자네는 죽을 걸세.”
“죽는다?”
“그래, 아마 자네도 계획이 있겠지만… 솔직히 조금 불안하군.”
황극린은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만약 ‘그림자’가 온다면 황극린은 쥐도 새도 모르게 황천길을 건널 가능성이 컸다. 황극린의 존재는 그에게 중요하다. 이제껏 경쟁자나 호적수 따위는 없었던 계빈이었기에, 그의 존재 자체가 소중했다.
잠시 뒤, 황극린이 붓과 종이를 가져왔다.
계빈이 유려한 필체로 서신을 작성한다.
짧게 요약하면 이러했다.
- 뇌불을 내어 주십시오, 아버지.
솔직히 계빈이 이렇게 협력을 잘해 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왜인지 황극린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다. 황극린으로선 딱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에겐 이익이라 할 수 있었다.
천화련과의 마찰이 쉽게 해결되면 만뇌문으로서도 다행이었으니까.
“자네 또한 ‘극복’의 방법을 찾고 있는 건가?”
“극복?”
“나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다네. 중원 땅에 살아가는 괴이(怪異)들은 모두가 같은 뜻을 품고 있으니까.”
계빈이 무언가를 착각한 듯하지만 황극린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북해빙궁이 저주이자 축복인 체질을 극복하고자 황극린을 왕으로 추대한 것처럼, 천화련 또한 그들의 체질을 극복할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황극린은 대충 그들의 체질을 극복할 방법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대공녀는 대공자보다는 안색에 활력이 있었다. 그녀는 짐승의 피만 먹는다고 했었지.’
어쩌면 그들은 인간의 피를 취하지 않는 것으로 햇빛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햇빛이야 막대한 내공으로 호신강기를 둘러서 막을 수도 있다. 다만, 황극린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진 ‘제약’은 아마 단순히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게 끝은 아닐 것이다.
“자네는 나와 함께함으로 그걸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네.”
계빈의 뚱딴지같은 말이었다.
황극린의 무심한 표정을 본 계빈은 황급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무(武)의 극의에 이른다면, 인간의 신체는 재구성된다네.”
“환골탈태?”
“뭐, 비슷하지만 다르다네. 도가에서는 그들을 신선(神仙)이라 칭하기도 하고, 마교에선 그들을 천마(天魔)라 부르기도 했지. 그러한 경지에 오르면 인간의 상식에는 구애받지 않는 완벽한 신체를 구현할 수 있다네. 화룡지체(火龍肢體)를 타고났으면서도 구음절맥(九陰絶脈)도 동시에 타고난다면 어떻겠는가? 음양의 조화는 성별이 결정된 이상 극복하기 불가능하다네. 하지만 무의 극에 이른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지. 음기와 양기를 동시에 품을 수 있음이야.”
황극린은 그의 말을 들으며 기시감을 느껴야 했다.
화룡지체, 구음절맥.
표현하는 단어는 다를지 몰라도…….
‘내 몸이 지금 그런 상태인데.’
황극린의 신체는 극한의 음기를 품고 있었으며, 동시에 극한의 양기를 품고 있었다.
성수신의도 황극린의 맥을 짚을 때마다 경악했다. 이미 완벽한 육신이라고 말이다. 더 놀라운 점은 황극린은 지금도 체질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끝은 어디일까? 그리고 황극린은 축복만 받은 체질인 걸까?
“뭐, 그것을 극복할 다른 방법이 있긴 하네만… 그건 자네라도 알려 줄 수 없군. 언젠가 자네와는 그것을 두고 싸울 예감이 들어……. 물론, 그때는 지지 않을 거라네!”
승부욕을 불태우는 계빈이었다.
황극린이 그에게 또 다른 무언가를 질문하려는 때였다.
타다다닥!
급박한 발소리가 들린다.
“자, 장로님!”
백온후가 황급히 달려왔다.
그의 긴장감에 허공에 줄 하나를 두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흑주가 황급히 천장으로 휙 올라갔다.
“무슨 일이지?”
“입구가 흔들리고 있어요! 누, 누군가 진에 들어온 것 같다고…….”
문도들은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진의 입구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천화련이 인질을 평화롭게 교환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때, 황극린의 감각에도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거대한 기운을 가진 누군가가 만뇌문의 진법에 진입했다. 몹시 빠른 속도로 진법을 통과하고 있었다.
황극린이 움직인다.
그때, 뒤에 있던 계빈이 외친다.
“조심하게.”
“…….”
계빈은 진심으로 황극린이 지금 죽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그는 그림자라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체질을 바꾼 사람이지. 어둠 속을 경계하게.”
그게 계빈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었다.
황극린은 그의 말이 거짓이라 판단하지 않았다.
그가 떠나려고 하자 흑주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등에 올라타려 했다.
“넌 여기서 계빈을 감시하거라.”
- 끼이이이.
흑주는 서럽다는 듯이 울었지만, 황극린은 뇌옥의 거대한 문을 닫고는 떠나갔다. 흑주가 모두 다 네 탓이라는 듯이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다.
“…네놈은 영물이 아니라 사람 같구나. 참으로 똑똑하군.”
그 말이 기분이 나빴던 걸까.
계빈의 얼굴에 뜨거운 무언가가 튀었다. 동시에 흑주가 계빈의 곁으로 다가갔다.
“잠시만, 뭘 하려는 게냐! 안 된다! 그건!”
계빈이 품고 있던 붉은 구슬을 빼앗은 흑주.
거미 따위가 웃는 표정은 몰랐지만, 계빈은 지금 저 커다란 거미가 웃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